《“언론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대한민국의 언론인》
■ 프랑스 신문의 변신
“식인귀(antropophage)” (3월 9일) ⇒ “식인괴수(Corsican Ogre)” (3월 10일)⇒ “호랑이” (3월 11일)⇒ “괴물” (3월 12일) ⇒ “폭군” (3월 13일)⇒ “찬탈자” (3월 18일)⇒ “보나파르트” (3월 19일)⇒ “나폴레옹” (3월 20일) ⇒ “황제 나폴레옹” (3월 21일)
이상의 사건 전개는 1815년 3월 9일 엘바(Elba)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이 12일 뒤인 21일 파리의 퐁텐블로 궁으로 개선하기까지, 당시 프랑스의 최대 일간지《모니테르(Le Moniteur Universel)》가 1면 기사에서 나폴레옹을 어떻게 매일매일 다르게 바꿔서 호칭했는지를 보여준다.
1814년 러시아 원정 실패 후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던 나폴레옹은 다음 해 3월 9일 섬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다음 날인 10일 니스(Nice) 근처의 주앙(Juan) 만(灣)에서 프랑스 본토에 상륙한 뒤 연도(沿道)에서 지지하는 군대를 규합하여 급속도로 세(勢)를 불리면서 그레노블(Grenoble), 리옹(Lyon) 등의 도시를 거쳐서 21일 파리(Paris) 근교 퐁텐블로(Fontainebleau) 궁으로 개선하여 황제의 자리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16일 워털루(Waterloo)에서 영국의 웰링턴(Arthur Welleseley)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에 패배함으로써, 그의《100일 천하(Napoleon’s 100 Days)》는 비극적인 종막(終幕)을 고하게 된다.
■ “기자는 기생” 이런 말의 의미는?
필자는 1958년 11월의 어느 날《한국일보》에 함께 입사한 14명의 견습기자의 한 사람으로 장기영(張基榮) 사장(당시)을 처음으로 대면(對面)하는 자리에서 장 사장으로부터 이 역사적 에피소드를 들었다. 이날 장 사장은 칠판에 백묵(白墨)으로 “기자는 기생(妓生)이다!” 와 “광고는 최고의 특종(特種)이다!” 라는 두 줄의 제목을 써 놓고 특유의 독특한 화술(話術)로 이 엉뚱한 제목에 당혹해 하는 견습기자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발언을 이어갔었다.
“광고는 최고의 특종” 이라는 제목 아래 그가 한 말의 내용은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의 말은 “고비용(高費用) 사업인 신문사의 주수입원(主收入源)은 광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단가가 가장 높은 부고(訃告)” 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신문기자는 모름지기 평소 취재 활동 중에 어느 집이 상가(喪家)인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상가(喪家)를 발견하면 즉시 신문사 광고부에 전화해서 알려야 한다” 는 것이었다. “부고가 곧 최고의 특종 기사”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기자는 기생” 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한 나폴레옹 이야기는 그 자리의 젊은 햇병아리 견습기자들 입장에서는 취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난해한 것이었다. 그날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부터 파리 개선까지 12일 동안 문제의《모니테르》라는 제호의 신문이 매일 1면 기사에서 나폴레옹의 호칭을 바꾼 것을 소개하면서 장 사장은 “이것이 신문의 속성(屬性)” 이라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당시 장 사장의 이 말이 긍정적 평가였는지 아니면 부정적 평가였는지는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자에게는 알쏭달쏭할 뿐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필자 자신의 입장에서는 1971년 남북대화 참가를 위해 언론계를 떠나기까지 13년간 정치부 기자로 일하는 동안 장 사장의 이때 이 말이 “해서는 안 되는 금기(禁忌)” 로 인식되어서 줄곧 필자 자신의 언행(言行)을 규제하는 경구(警句)로 작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내란행위로 침소봉대에 앞장서다니
필자가 느닷없이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되는 것은 지난 12월 3일 돌발적으로 발생한《비상계엄 파동》의 와중(渦中)에서 우리나라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보도 행태를 보면서 과거 언론에 몸을 담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상(感想)이 있기 때문이다.
12월 3일 오후 10시 20분경 공중파 TV 화면을 통해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돌연 선포한《비상계엄》은 그로부터 불과 1시간 40분 뒤인 4일 오전 1시경 긴급 소집된 심야(深夜) 국회본회의에서 해제 결의가 이루어지자 윤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여 오전 4시 27분 역시 TV 생방송을 통해 이의 해제를 발표하는 싱거운 해프닝성 단막극(單幕劇)으로 끝장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끝장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재명(李在明) 의《더불어민주당》이, 마치 물실호기(勿失好機)라도 되는 것처럼, 이《비상계엄 단막극》을 형법(刑法)의《내란행위로 침소봉대(針小棒大)》하면서 이를 구실로《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밀어붙이는 정치 공세를 전개》하고 있어서《새로운 차원에서 나라 헌정(憲政)이 격렬한 동요의 와중으로 함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정국이다.
사실은《헌법》을 비롯하여 관련 실정법의 관점에서 본다면《헌법》제77조와《계엄법》제2조에 근거를 둔 《비상계엄 선포권은 대통령의 고유한 통치행위》다. 지금 존재하는 어떤 실정법에도 대통령이《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선포한 비상계엄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 조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법적 장치》는《헌법》제77조 ⑤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국회가 재적 과반수의 찬성으로 해제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이 방법이 발동되지 않는 한《대통령이 선포한 계엄은 시행되는 것》이고 일단《헌법》과《계엄법》에 의거하여 시행에 옮겨진《계엄 행위》는, 《국회의 요구로 해제되는 경우》를 포함하여,《현행 실정법상으로는 이를 사후에 처벌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대법원》의 확정 판례도 엄연히 존재한다. 《대법원 1979년 12월 7일자 79초 70 결정》이 곧 그것이다.
이번 윤 대통령의《비상계엄》은《국회 통보 미비》등 절차상의 하자는 있었지만,《전체적으로는 헌법과 계엄법의 관련 조항에 근거하여 발동되고 해제되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이재명(李在明) 의《더불어민주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술 더 떠서 윤 대통령의 이번《비상계엄 선포》를《형법의 내란 행위》로 밀어붙이고 있다.
■ 이재명 속셈은 오로지《조기 대선》
《더불어민주당》의 속셈은 명백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의 도전자 없는 간판 스타인 이재명(李在明) 대표는 지금 그를 형사 피의자로 하여 진행 중인 5건의 재판 가운데 어느 한 재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이 내려져서 그의 출마 자격이 법적으로 박탈되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탄핵 재판을 통한 윤 대통령의 파면》을 실현시킴으로써《대통령 보궐선거의 내년 중 실시를 실현》시키고《이 선거에서 자신의 독주(獨走)가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이 같은 더불어민주당의 행동》은《실정법상으로는 명백한 불법 내지 탈법행위》이다. 대한민국에서《내란 행위》에 대해서는 형법 제87조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토를 참절(僭竊)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하는 행위”로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국토 참절과 무관하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오직《국헌을 문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행위》에 해당되는가의 여부를 법적으로 따져 볼 문제이다.
여기서《국헌을 문란하는 목적》에 관해서는《형법》 제91조가,
①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과 ②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의 두 가지의 경우로 명시하고 있다.
결국 이번《비상계엄 사태》를《내란 행위》로 몰기 위해서는, 《이번 사태가 위의 ②에 해당하는가의 여부》를 가려보면 될 일이다.
■ 비상계엄, 형법 상 내란행위 아니다
이번《비상계엄》이《헌법》과《계엄법》의 명문 조항에 의거하여 선포되었고《국회의 해제 결의》에 따라 해제된 이상,《비상계엄 그 자체가 형법 상의 내란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이번의 《비상계엄 사태》를 구실로 하여 지금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고 있는《정부에 대한 일련의 극한적인 정치 공세》야말로《형법》제91조가 규정하고 있는《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국헌문란 행위》로《형법》제87조의《내란행위》에 상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의 여지를 열어 놓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결국 율사(律士)들의 세계에서 시비가 가려져야 할 문제다.
■ 210여년전 佛 언론 닮은 한국 언론
그러나, 필자는 지금의 시점에서 거의 모든 제도권 언론들이《비상계엄 선포 = 내란행위라는 등식(等式)을 기성사실화》할 뿐 아니라, 아직 법원의 판결은커녕 검찰에 의한 기소(起訴)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윤 대통령을 상대로《공공연하게 내란 수괴(首魁)라는 기결수(旣決囚)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을 사용하여 기사를 작성·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1815년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이후 프랑스 유력지《모니테르》의 보도 내용들이 보여주었던 일탈(逸脫) 행위를 새삼 회상(回想)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법치국가(法治國家)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법치국가라면 법치국가의 국민이 갖추어야 할 양심은 물론 양식(良識)의 금기가 있다. 그 금기 가운데는 이른바《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라는 것이 있고《무죄추정원칙(無罪推定原則)》이라는 것도 있다.
2000년 김대중(金大中) 의 민주당 정권이《동아일보》를 상대로 언론파동을 일으켰을 때 진상파악을 위해 한국을 찾았던《국제언론기구(IPIㆍInternational Press Institute)》의 요한 프리츠(Johan Fritz) 사무총장이 필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번에 언론 자유 문제로 한국에 와서 새로이 깨우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면서 “그것은 한국에 와보니 많은 사람들, 특히 언론인들이《민주주의(Demcracy)》라는 가치 용어와《민주화(Democratization)》라는 구호 용어를 혼동(混同)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 전직 정치부 기자의 입장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 1958년 12월 24일은 당시 여당인《자유당》이 국회에서《경위권》을 발동하여 농성 중인 야당 의원들을 짐짝처럼 들어서 의사당 밖으로 팽개치고《자유당》단독으로《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날이다.
이때의《국가보안법 개정안》은 그 다음다음해인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자신을 상실한《자유당》이 언론을 겁박하여 순치(馴致)시킬 목적으로 그때까지《목적범 처벌》이었던 언론인 처벌을《결과범 처벌》로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때의《국가보안법 개정 파동》을《24 언론법 파동》이라는 별칭으로 보도했었다.
■ 60여년전 보다도 못하다니
《24 언론파동》다음날인 25일은 크리스마스 날이었고, 이날 아침 모든 조간신문의 1면과 2면은 그 전날 밤 국회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하는 기사로 도배(塗褙)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필자가 일하던 《한국일보》의 영문 자매지《The Korea Times》는 2면에《한국일보》의 주(主) 사설을 번역하여 게재하고, 그 아래에 100년 전 그 날짜 영국《The Times》의 주 사설 축약본을 게재하고 있었다.
1958년 12월 25일자《한국일보》주 사설의 제목이《언론의 자유와 책임》이었는데《Press Freedom vs Responsibility》라는 영문 제목으로 번역되었었다. 그런데 그 날짜《The Korea Times》2면의《한국일보》주 사설 아래에 축약되어서 실린 1858년 12월 25일자 영국《The Times》의 사설 제목이《Press Freedom vs Responsibility》였다.
이 두 사설의 똑 같은 제목이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순간, 필자의 머리를 강타했던 아픔의 느낌은 그로부터 66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필자의 머리를 강타한 느낌은 “아, 영국과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 사이에는 100년의 시차(時差)가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이 시간 현재 윤석열 대통령을《내란 수괴》라는 호칭으로 보도하는 이 나라 얼치기 언론인들이《언론의 자유와 책임》문제를 한 번 성찰하고 음미해 주기 바라는 심정이 간절하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12/24/20241224002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