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점령군》도심 장악?
“지난 21일 정오쯤부터 경찰버스로 차벽을 만들어 시위대를 막은 경찰은 22일 오후 4시 40분쯤 대치하던 서울 서초구 과천대로에서 모두 철수했다.” - 조선일보( 2024/12/22) 《전농》과《민노총》 부대와《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란 단체가 몰고온 트랙터 50대중 10대를 끌고 윤석열 대통령 관저까지 행진했다. 경찰은 이 세(勢)에 속절없이 밀렸는가? 그랬다면 공권력의 불법 집회 진압 능력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혁명 점령군》의 도심 장악? ■ 노(민노총)·농(전농)이 혁명 선봉대?
농촌 단체와 노동단체가 선봉에 섰다면,《혁명의 주도권과 기본성격이 급속도로 급진화했음》을 반영한다.
현장에선 몇몇 자유 우파 청장년 활동가들(신혜식 우동균 홍철기 박완석 등)만이 피맺힌 외침을 발할 뿐, 저《혁명 군단》을 막을 힘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군(軍)은 움직이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다. 경찰도 차벽을 포기할 정도가 되었다. 경찰은 계엄 사태 후 윤석열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도 보였다.
누가 저《혁명 부대》를 저지할 수 있겠나? 없다. 무중력 상태다. ■ 과연 이것으로 끝날까?
이런 사태가 오리란 건 불을 보듯 환했다. 극좌 혁명가들은 1960년 4.19 학생혁명이 났을 때,《그것을 좌익 혁명으로 끌고 갈 전국적 지하당이 없었음을 개탄》했다.
그 후 60년. 그들은《열심히 혁명 주도세력을 구축하려 획책》했다. 《NL 주사파》까지 생겼다. 이들의 전술은《해방공간 때의 폭력혁명 방식》과 달랐다. 《주사파》가 남한의 각종 사회단체와 정치단체에 파고들어,《반정부-반체제 운동을 자기들 방향으로 견인하는 속임수 전술》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때의《광우병 난동》때도, 박근혜 대통령 때의《촛불난동·탄핵》때도, 그 배후엔 어김없이《운동꾼》 음모가·조직자·선동가 들이 준동했다. 일부 비(非) 좌파 언론들과 시민들마저 선동에 휩쓸리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 혹한 속 한밤의《서울 공방전(攻防戰)》
결과 오늘날과 같은《 체제 대개혁 변란(變亂)》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장렬하다고 할까, 감격적이라 할까.소식을 접한 애국 광화문 시민들이 급거 현장에 몰려들었다.
저들의 침공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백병전이었다. 저들은 철수했다. 역사적인 방어전이었다. 자유대한민국 애국 민병 만세! 위 문장을 쓴지 하루밤이 지난 23일 새벽 4시 현재. 남태령 현장엔 일단의 청장년 애국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엄동설한의 아스팔트 위에 농성하고 있다. 경찰은, 트랙터는 불가항력이라는 듯 들였으면서 애국시민들이 이불과 의자를 들이는 것은 안된다고 한다. 혹한 속 한밤의 비장한《서울 공방전(攻防戰)》.그러나, 한국인 대다수는 조용하다.《일제 강점 그날도 조선인들은 평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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