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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포로 석방 = 수용소는 ‘김일성의 도살장’ … 세계를 뒤엎은 한글자 ‘晩’--‘통일 미치광이’ 이승만의 단독투쟁! ”미군철수 반대 안해, 전작권 회수“

뉴데일리

6월8일 포로송환협정을 서명하러 도쿄에서 날아오는 클라크는 옆자리 최덕신을 돌아보았다.“제너럴 최, 비행기에서 내리면 기자들이 달려들 텐데 당신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되요. 내가 직접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설명드릴 것이오” 클라크의 말을 듣는 최덕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결국 그렇게 결말이 난 모양이다.판문점 협상의 한국군 대표 최덕신은 지난 5월 25일 판문점에서 유엔 측이 자신을 따돌리며 굴욕적인 ‘양보’를 공산측에 건넨 문서를 발견하자 “NO”를 소리치며 회담장을 뛰쳐나왔었다. 처음부터 미국도 주장해온 조건 <반공포로는 휴전 즉시 한국내서 석방한다>는 조항을 미국측이 하루밤새 삭제하였던 것이다. 퇴장한 최덕신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였고 분격한 이승만은 아예 회의 참석을 보이콧시켰던 터이다. 최덕신 뿐만 아니다. 뒷날 ‘5.25 항복’이라 부른 그날 양보 즉시, 옵서버 참모 이수영 대령도 문산 평화촌을 떠났고. 김일겸 해군준장도 서울로 철수해버렸다.

서울에 도착한 클라크는 브리그스 미국대사와 만나 경무대로 향하였다.만78세 노대통령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낡은 책상 위에는 ‘북진통일’ 혈서와 수많은 ‘휴전 결사반대’ 결의문들이 수북히 쌓여 미국손님을 맞는다. 이승만의 외교기법은 이처럼 꼼꼼하게 연출된다. 대통령 책상에 국민들의 의사(휴전반대) 혈서까지 늘어놓아 상대를 찌르는 것이다. 그것을 훑어본 클라크는 아이젠하워의 새로운 친서부터 전하였다. 이 외교친서 아닌 ‘아이크 협박장’ 내용은 이승만이 공개하여 앞(89)에서 우리는 다 읽어보았다.

◆클라크 설명에 이승만 부들부들 “우리는 살고 싶소”

그동안 이승만과 협상 아닌 협상을 거듭해왔던 클라크는 ‘탄약고로 타들어가는 불붙은 도화선’처럼 어떤 휴전도 파탄 내겠다고 벼르는 이승만이 “지혜가 깊고 예지력이 탁월한 국가원수로 존경심이 절로 울어 난다”고 뒷날 회고록에 썼지만, 이 날도 예상대로 흥분에 떠는 노대통령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새로운 ‘양보’를 설명을 이어나갔다. 변영태 외무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클라크 회고록, 앞의 책)우리의 최종안(반공포로 즉시석방의 철회 및 중립국 송환)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친 감정적 영향은 너무나 컸다. 나는 그가 그처럼 난처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청년시절 감옥에서 고문 받아 화상을 입은 손가락들을 후후 불며 비벼대고 있었고 얼굴 근육은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약을 애써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브리그스 대사와 내가 번갈아 휴전 동의와 원조계획과 약속을 설명하는 도중에 그는 갑자기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나는 대단히 실망스럽소. 당신네 미국 정부는 자주 태도를 바꾸고 있소. 당신네들은 한국 정부의 견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단 말이오”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면서 “당신들의 위협은 우리에게 효과가 없소. 우리는 살고 싶소. 우리는 생존하고 싶은 거란 말이요. 우리는 우리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이러한 사정아래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를 약속할 수 없소...” 부들부들 떨며 뜨거운 울분의 말을 토해냈다. 변 장관은 만약 포로를 강제송환 한다면 반공포로의 많은 수가 자살을 택할 것이라고 또렷한 옥스퍼드식 영어로 경고하였다. 2시간 넘는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속담을 인용해가면서 ”인도군 병사는 한 사람도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아이젠하워에게 설명해 달라“고 잘라 말했다. “내 친구 아이크에게 전하시오. 휴전반대는 내가 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간절한 소원에서 나오는 것이오. 우리 동포 포로들을 남의 나라에 넘기고 국토를 중공에 팔아넘기는 이런 휴전을 수락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잔인한 사형선고문서와 같소. 당신네 대통령에게 말하시오. 우리 국민들은 단독으로 싸우기를 원한다고...”주름진 노인 얼굴은 절망과 분노에 말을 끝내지 못한 채 젖은 눈이 불을 뿜고 있었다.이날 회담의 뒷이야기를 취재한 AFP통신은 워싱턴 당국이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회담 분위기는 험악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두 미국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화 내내 자기 권총을 만지고 있었다」고 전한 이 통신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먼저 한미상호방위협정이 조인되지 않고 휴전협정이 체결된다면 한국군은 단독으로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데, 미국의 교섭자들은 이에 대한 확약을 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고 썼다. 동시에 “국가운명을 강대국에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 약소국 대통령의 남다른 강고함에는 “단1인치의 양보도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는 관측통의 말도 인용 보도하였다.

◆이승만, 원용덕에 “可 晩” 친필 명령서

클라크와 브리그스 대사가 최종 휴전안을 설명하며 진땀을 빼다가 돌아간 그날 오후, 방문객들과 접견을 끝낸 이승만은 원용덕(元容德, 1908~1968)) 헌병 총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렀다. 바로 작년 직선제개헌파동(부산정치파동)때 부산-영남지역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결정적 역할을 맡겼던 심복중의 심복이다. 평소 원용덕의 무인다운 애국심을 신뢰한 이승만은 올해3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서 당시 육군편제를 넘어서는 헌병총사령부를 만들어 총책을 삼았다.건국 후부터 여-순 반란을 거치며 ’숙군‘(肅軍)을 감행한 김창룡(金昌龍)과 함께 두 사람은 반공국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이승만의 양팔이다. 원용덕이 경무대에 들어서자 이승만은 비서들을 물리치고 바싹 다가앉으라 했다.“이봐, 원 장군. 미국 사람들이 우리 애국청년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려하니 큰일이야. 나로서는 한사람이라도 우리 아이들을 북으로 보낼 수는 없네. 그러니 원 장군, 반공포로들을 석방했으면 하는데 그 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해 주시오. 오늘 밤중이라도 괜찮아, 서두르시오”해’올것이 왔구나‘ 원용덕은 ”네 각하!“ 두말없이 힘차게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부터 해마다 포로수용소를 시찰한 뒤에 ”반공포로들은 빨리 풀어줘야 되겠어“라고 여러 번 말하는 것을 들었던 터였고, 그때부터 원용덕도 제네바협정등을 조사해 ’포로 상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세계2차대전 종료후 체결된 제네바협정 제118호는 ’전쟁포로는 적대행위가 종결되는 즉시 송환되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소련등 공산국들이 포로들을 강제수용소에 억류하여 노예처럼 혹사했던 만행을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원용덕은 갈등한다. 상부조직 뿐 병력이 없는 헌병총사령부가 유엔군이 관리하는 포로들을 석방시켜야하는 것, 병력동원 지휘권도 유엔군에게 있고 육해공군 소속 헌병대도 유엔군 산하에 있으니 맨손이나 마찬가지이다. 신당동 집에 돌아온 원용덕은 포로석방 비밀명령이 곧 우방 미군과 싸워 애국청년들을 구출하는 구국명령임을 새삼 명심하며 숙연한 감개에 젖었다. 나도 원했던 일, 내가 해내고야 말리라! ([비화-임시수도1000일] 부산일보사, 1984)혼자서 ‘석방작전’ 윤곽을 다듬은 원용덕은 진헌식(陳憲植) 내무장관부터 찾아갔다. 군인 대신 전국의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일, 탈출한 포로들이 갈아입을 옷과 숙식문제, 미군과의 문제발생 처리 등을 협의하고 경무대로 달려갔다.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원용덕을 이승만이 반겼다.“각하,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만 수용소들을 접수하려면 헌병들이 필요한데 제겐 지휘권이 없지 않습니까?”“그렇군.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나?”“저에게 육해공군소속 헌병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십시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원용덕은 미리 작성한 계획서를 꺼냈다. ‘오늘부로 모든 헌병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들어감을 명령함’이란 문안을 읽어주면서 ‘대통령 이승만’ 서명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여기에 결재를 해주시면 이것을 가지고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다.”이승만은 주저 없이 문안에 ‘晩’이란 사인을 해주더니 새 종이를 꺼내 붓글씨를 썼다.‘대통령이 명령하니 반공 한인 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可 晩’ 결재 서명 ‘晩’은 이승만의 ‘만’이다. 포로 석방명령서를 즉석에서 친필로 써준 이승만은 신뢰하는 심복이자 동지의 넓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였다.

◆수용소는 김일성의 '해방구'...인민재판 폭동 집단학살

자유송환이냐? 강제송환이냐? 전자는 유엔측 원칙이고 후자는 공산측의 억지였다. 이것이 스탈린이 죽기까지 포로교환방식을 둘러싸고 양측이 2년 넘게 줄다리기했던 쟁점이다. 유엔측은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른 개별 송환을 주장하고, 공산측은 무조건 전원강제송환을 고집한 것, 미국이 자유송환을 양보할 수 없었던 까닭은 2차대전직후의 참혹한 악몽 때문이었다.미국은 1945년 당시 독일에서 인수받은 소련군 포로 4천800여명이 본국송환을 거부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제네바협정에 따라 일괄 송환하였다. 맙소사, 길고 긴 열차가 오스트리아 산악지대 계곡을 지날 때 포로들이 일제히 탈출, 계곡으로 떨어져 내렸다. 죽느냐 사느냐는 신에게 맡긴 집단 투신, 스탈린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의 허공에 생명을 던진 것이었다. 다시는 반복해선 안 될 비극, 그러기에 이번에 미국이 양보하였다. 무엇을? 공산측의 주장대로 포로들의 의사를 사전에 심사한 뒤에 중립국 인도에 일단 송환하자는 꼼수에 속았다. 판문점 북한대표 남일(南日,1913~1976)은 갑자기 유엔 측에 호응하는 체 이렇게 말했다. “자꾸 포로의 송환불원을 말하는데, 도대체 자기고향에 돌아기기를 거부하는 포로가 얼마나 된단 말이오? 하나하나 의사를 물어보고 숫자로 말하시오. 그 숫자도 모르고 자유의사 송환문제를 논의할 수 없소” 유엔 측은 귀가 번쩍 열렸다. 이 말을 곧이듣고 덜컥 동의해버린 것, 그러나 이것이 ‘함정’인 줄을 미군들이 알 재주가 있겠는가.

★판문점 북한대표 남일, 수용소에 ‘해방동맹’ 결성...폭력투쟁 조종다시 신문기사를 읽어보자. 유엔사 발표 “공산측 휴전대표들이 포로수용소의 폭동을 사주”[동경29일발AP=합동] 유엔군 사령부는 1월 29일 소련군 장교들과 휴전협상의 공산군측 고위대표들이 한국전쟁의 ‘제2전선’의 일부로서 연합군 포로수용소내에서의 폭동을 “고의로 계획하고 지도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포획된 문서와 포로들의 진술에 입각한 이 비난은 오래전부터 휴회 중인 한국휴전회담이 종국적으로 결렬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시하게 만든다. 5페이지에 달하는 유엔군사령부의 성명이 첨부되어있는 50페이지짜리 방대한 정보보고서는 작년 2백명 이상의 포로들이 살해된 거제 제주 등 수용소들과 공산군 휴전대표들 간의 연락망을 폭로하고 있다. 동보고서는 특히 ‘한국전쟁의 새로운 분야’라고도 할 포로폭동사건의 책임자로서 다음의 인사들을 지명하고 있다.*남일=전소련군장교이자 소련시민권자, 판문점 휴전협상의 공산측 수석대표. *이상조(李尙朝)=공산측 수석대표대리, 북한괴뢰군 보위부장. *매코트=소련군장교, 북한 게릴라 지도국장, 북한 게릴라군을 한국에 침투시켜 작전지도. *킬다=전소련 비밀경찰대원, 현재 북한 정치보위부측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상사 혹은 소위로 변장하여 판문점 협상장소에 출입했다고 한다. *전문일 (일명 박상현)=거제도 포로수용소내의 정치위원회 지도자, 포로들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작년 수용소장 도드 장군의 납치를 명령 지도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1953.1.31일자)

한국에 포로수용소가 생긴 것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거듭하자 중공군이 참전하면서부터였다. 1950년 11월 패전한 북한군 및 중공군 포로들이 급증, 전국 곳곳에 수용했으나 감당불능인지라 11월 27일부터 유엔군이 현재의 거제시 일대에 수용소를 설치, 이듬해 6월경엔 북한군 15만여명, 중공군 2만여명 등 최대 17만 6천명의 포로를 관리해야 했다.

여기에 눈독을 들인 북한은 거제도 수용소에 ‘해방동맹’을 조직, 휴전협상 대표 남일과 이상조가 원격조종을 맡고, 정치위원 박상현(朴上鉉)이 포로를 위장 침투하여 수용소 지휘를 맡았다. 즉, 전선의 전투 + 판문점 협상 + 포로수용소=‘삼각전선’을 구축, 총력전을 벌였다. 말하자면 포로수용소를 남한의 북한 해방구로 만든 셈, 공산포로들이 ‘반공포로’들을 색출하여, 막사마다 자고 나면 옆에 자던 포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공포의 날’이 막을 열었다. 대표적인 사건 몇 가지만 보자.

▶첫 집단투쟁 ‘하복사건’=1951년 7월 여름에 서둘러 만들어 제공한 십여만 벌의 여름옷을 공급받은 포로들은 투쟁의 실마리를 잡았다. 크기도 색깔도 단추도 제각각인지라 터져 나오는 불만들에 불을 당긴다. ‘해방동맹’의 지령에 따라 공산포로들은 하복수령을 거부, 집단 단식에 돌입했다. 북한기를 걸고 적기가를 부르고 인민재판을 개시, ‘이 놈은 예수쟁이“란 한마디가 떨어지자 ”죽여라“ 주먹질과 몽둥이질, 돌멩이 팔매질까지 쏟아진다. 그동안 밤사이 몰래 자행하던 살인은 드디어 이제 공개 학살로 작전을 바꾼 것이었다. 날이 밝자 공산포로들의 수용소 철조망엔 급조된 현수막이 줄줄이 내걸렸다. ’민족반역자 이승만을 때려죽여라‘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만세‘ 등등, 글씨는 때려죽인 반공포로들의 피로 쓴 것, 아직도 뜨거운 핏방울이 흘러내려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유엔군의 수용소 관리는 한마디로 ’나몰라라‘였다. 미군 지휘부는 제네바협정 규정만 들먹일 뿐, 실제 경비를 맡은 한국군들만 가슴을 친다.

▶2월 폭동=거제 포로수용소 가운데 공산당이 가장 많은 62수용소에서 1952년 일으킨 폭동이다. 남일의 ’포로 송환의사 심사‘ 제안에 응한 미군이 포로들에게 당한 첫 폭동, 2월18일 미군심사팀이 막사에 들어서자 1,500여명 포로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죽창, 쇠창, 칼, 사제 총 등 몰래만들어둔 무기들을 휘두르는 포로들의 기습에 미군은 발사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 77명이 죽고 140여명 부상, 미군도 1명사망 38명 중경상, 남일의 첫 작품은 기대이상의 수확을 얻었다. ’포로 의사존중‘이란 미명을 이용, 미국과 유엔을 공격할 선전자료를 만들어내는 공산당 수법, 판문점 협상 테이블에는 ’미군 만행 규탄‘이 주제, 남일은 수많은 사진과 증언들을 만들어 각국 기자들에게 뿌리며 열변을 토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의 언론은 ’미군 발포로 포로들 떼죽음‘만 대서특필하였다. 궁지에 몰린 유엔측은 포로심사를 일시 중단할뿐 속수무책, 이런 치욕적 망신을 당하고도 미국은 ’오로지 휴전 성공‘만을 향해 공산측에 ’기꺼이‘ 끌려가는 형편이었다.

▶거제수용소장 도드 장군 납치=대낮에 미군장성이 ’포로들의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952년 4월 판문점 남일로부터 새로운 비밀지령이 박상현에게 떨어지고 그 지령은 5월에 대성공을 거둔다.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준비한 공산 행동대가 ’공산당을 모르는 미군’ 수용소장 도드(Francis Townsend Dodd, 1899~1973) 준장을 유혹하여 기습, 대낮에 납치해버린 세계의 톱뉴스가 그것이다. 박상현은 소련공산당 출신, 김일성이 특명으로 거제도 특별공작대를 맡겼다.D-Day 5월7일 공산당이 장악한 76수용소에서 연좌데모 시작, 포로들은 ”수용소장 나와라“ 구호를 외친다. 이유는 ”흑인병들이 반지 등 포로들 물건을 훔쳐가니 방지책을 내놓으라“는 것. 미군 범죄이므로 수용소장의 직접 보장을 받아야겠다는 핑계가 바로 함정이다. 갓 부임하여 현장파악도 다 못한 도드 준장은 오후2시 주변의 만류도 뿌리치고 막사 정문 앞에 섰다. 철조망을 가운데 두고 공산포로들은 흑인문제 대신 일상생활 불평불만부터 떠벌인다. 그것은 영외로 나간 분뇨처리 작업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끌기 작전’이었다. 한시간도 넘는 지리한 대화와 통역, 3시15분쯤 수용소장이 시계를 보며 돌아가려 할 때. 분뇨 처리팀이 나타났다. ”잡아랏“ 20여명이 분뇨통을 던지며 도드 준장을 뒤에서 덮쳤다. 앞에서 기다리던 포로들이 덤볐다. 철조망 문이 잠겨지고 미군장성은 질질 끌려간다. 수행한 미군장교들은 구경꾼이다. ”발사해야지“ 누군가 소리쳤으나 말뿐, 수용소장이 죽으면 안될 일이다.

세계가 또 한 번 들끓었다. 때마침 교체된 리지웨이와 클라크가 임무교대, 밴플리트가 서둘러 수용소장을 콜슨 준장으로 바꾼다. 포로들과 협상에 들어간 콜슨은 포로들이 전해주는 전화속의 도드 울음소리에 맥이 풀린 듯, 협상원칙을 포기하고 공산포로들의 요구를 몽땅 들어주는 유명한 ‘콜슨 각서’를 써주고 말았다. 그런데도 온갖 구실로 도드의 석방을 미루던 공상포로 집단은 판문점 남일이 국제 선전전을 마음껏 펼친 뒤에야 지시를 내려, 도드는 피납 78시간 만에야 풀려난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기고만장 신나게 떠들었다. ”세계는 보았는가, 이제 미국인들이 히틀러보다 더 비인간적인 야만임을 알았다“

▶6월 폭동=수용소장 납치극을 성공시킨 포로들은 또 하나의 ‘작전’을 벌인다. 수용소 ‘해방동맹’ 주동이자 포로대표 이학구(李學九)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여러 막사에 흩어져있는 전투력을 집합시킨 음모, 미군과의 전투준비였다.이때 도쿄로 부임하여 태세를 갖춘 클라크가 칼을 빼들었다. 도드 소장 후임에 보트너 준장( (Haydon L. Boatner)을 임명하고 콜슨이 도드 석방을 위해 써준 ‘항복문서’ 콜슨 각서를 무효화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 그 사이 전투태세를 갖춘 공산포로들은 철조망에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초상화를 비롯, 각종 플패카드를 내걸며 밤낮으로 적기가 등 노래와 구호를 외치는 한편, 비밀리에 만든 사제무기들을 모으고 철조망 타고 넘기 등 특공대 폭동 훈련을 실시한다. 그 무렵, 미군 트럭이 수용소 앞길을 지나다가 빠진다. 알고 보니 포로들이 파놓은 지하 땅굴이 뻗어있었다.마침내 보트너 수용소장이 명령한다.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주자.“ 적기를 내거는 자들을 사살하고 이학구를 잡아 가둔다. 60-85-96-607 등 4개수용소에 전차와 공수부대를 투입, 모든 선전물들을 제거 불태우고, 두목급들이 모여 있는 76수용소 공격명령을 내린다. 10일 새벽 5시, 보트너는 방송한다. ”오늘부터 분산 수용할 것이니 협력하지 않으면 실력행사한다“ 그러자 포로들이 문을 박차고 나와 이미 파놓은 참호에 들어가 고함과 욕설로 공격을 시작했다. 30분쯤 참고 기다리던 보트너는 ”수용소 돌입!“을 외친다. 뻥뻥 폭발음과 함께 수용소 전체가 불길에 싸였다. 불을 지른 공산포로들은 도망가는 포로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며 미군에 달려들어 인해전술 육박전까지 벌인다. 반공포로들은 미군 쪽으로 탈출한다. 총과 대포의 발포를 금지하고 수류탄만 사용한 미군의 폭동 진압작전 2시간 반, 76수용소의 6천5백여명 공산포로들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미군 1명 사망, 14명 부상, 포로들은 31명 사망, 139명 부상이다. 수용소를 수색한 미군은 경악한다. 천막지주를 끊어 만든 쇠창 3천개, 칼 4천5백여개, 휘발유 수류탄 1천여개 등 수많은 사제무기들이 쏟아졌다. 지하땅굴은 막사와 막사사이에 연결되어있고 파묻은 시체들이 드러났다. 떼죽음 당한 반공포로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6월20일로 예정된 집단탈출, 미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전면 봉기를 일으키는 반란 계획서였다. 이때부터 포로들은 500명씩 나누어 전국에 분리수용하게 된다.

◆D-Day 새벽, 미군 눈에 고추가루 뿌리고 대탈출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특명을 받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은 처음에 D데이를 11일로 잡았다가 18일로 연기시켰다. 달빛이 없는 초순을 택한 것, 그동안 더욱 면밀한 작전이 완성되었다.그뿐이 아니다, 사실은 이승만이 D데이를 변경시킨 것은 포로송환협정이 18일 조인된다는 정보를 알기 때문에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려면 바로 직전에 폭탄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원용덕은 잠은 신당동집에서 자고 경무대 경찰서 뒤편 일본식 집 골방에서 작업을 진행했다..육군보좌관 김길수(金吉洙)대령과 헌병총사령부(이하 헌총사) 문종욱(文鍾郁대형을 불러 포로석방 작전명령을 짠 원장군은 6명의 헌총사 간부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이들 임기택(林奇澤) 중령, 김삼용(金三龍)중령, 김진호(金鎭浩)중령, 조용집 소령, 황동준(黃東俊)소령, 최세경(崔世卿)소령에게 담당지역을 배정하고, 사전 암행공작등 일체의 현장 지휘권을 부여하였다.각자 지역특성에 따라 부분적인 수칙을 달리했으나 석방작전 주요매뉴얼을 이렇다.1) H아워에 전면 소등, 미군 발전기를 끈다. 2) 수용소 막사로 탈출순서를 정한다. 3) 철조망은 미리 절단, 절단기는 포로들에게 주고 철조망을 덮을 가마니도 충분히 준비한다. 4) 탈출 포로들은 사복을 입혀 민가에 분산 피신시킨 뒤, 경찰에 알려 보호한다. 5) 미군과의 충돌은 최소화, 그날 밤 근무 때 여자 얘기 등으로 미군들을 안심 시키고, 불가피할 경우 고춧가루를 뿌려 무력화 결박함. 절대로 미군을 살상하는 사고는 피할 것.‘암행 지휘관’들은 포로 대표들에게 사소한 임무까지 반복주지 시켜 준비완료 보고를 받았다.마침내 그날 밤, 취침소등이 되자 그때서야 포로들에게 밀령을 소곤소곤 알려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유의 날이 왔소. 이승만 대통령께서 우리 석방명령을 내렸소. 지금부터 명심하시오. 철조망을 넘으면 적어도 30리는 벗어나시오. 경찰이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미군에 붙잡히자 "집단자살 위협"

D데이 6월18일 오전0시, 수용소내 포로들은 잠은커녕 창밖만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었다.초저녁부터 내리는 빗발 속에 칠흑 같은 어둠 저편에서 깜빡깜빡깜빡 손전등 신호 세 번!“나가자” 포로들은 일제히 막사를 뛰쳐나갔다. 철조망은 누군가 벌써 2미터쯤 끊어놓았다.수천명의 포로들이 밀려나가며 성급한 사람들은 철조망을 맨손으로 기어 넘어간다.탕 탕 탕...10분쯤 지났을 때 총소리와 함께 미군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들이 미군들을 덮치며 얼굴에 고춧가루를 쳐 바르고 무장해제를 시켜 두 팔을 묶어 무릎 꿇렸다.“멈추지 마! 30리 뛰어야해!” 탈출한 포로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막사 대장이 나누어준 사복과 며칠분의 비상식량을 움켜쥔 포로들은 무작정 뛰고 또 뛴다. 날이 밝기 전에 미리 지정된 장소 “30리 밖까지” 도망쳐야만 한다. 미군에게 다시 체포되면 절대 안 된다.논산(論山)지구 포로 1만1천38명 중에 탈출 성공 8천24명, 336명 재체포,, 3천여명이 탈출을 못했다. 미군 총격에 사망 1명, 부상 2명이다. 같은 시간 전국의 포로수용소에선 ‘반공포로 탈출 대작전’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었다.

대부분 수용소들이 미군 초병들을 제압하고 포로석방 작전에 성공하였으나 경북 영천(永川)지구와 경기 부평(富平)지구에선 예상 밖의 ‘교전’을 치루어 적잖은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부산일보사 [비화- 임시수도 1000일] 1984)▶영천지구= 헌총사 밀사 조용집 소령은 17일 영천에 내려와 경비중대장 김규진(金圭軫)소령과 작전계획을 짰다. *18일 새벽2시 석방 *17일밤 11시 절단기를 수용소에 투입 *정문 미군보초 납치 *철조망 밖 연락책임자들 지정 등을 결정한 얼마후 크게 낭패하였다. 김소령이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미군 수용소장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인간적인 협조’를 부탁한는 바람에 사태가 파탄난 것, 미군대령은 즉각 경비를 강화하고 포로간부들을 영창에 넣어버린 것이었다. 조소령과 김소령은 어쩔줄 몰라 금호강 모래밭에서 밤을 새우며 묘안을 찾던 중에 대구 육군헌병사 김병삼(金炳三) 중령이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김소령 앞에 검은 보자기를 풀렀다. 그 속에선 커다란 장도칼이 나왔다. 그것은 조금전 헌총사 김문호(金文豪)소령이 나타나 전해준 것, 그 뜻을 알아채린 김중령이 거사실패로 낙담한 김소령에게 보여준 것이다.“이 칼은 대통령 각하께서 보내오신 것이오. 오늘밤 안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지 못하면 우리 둘은 이 칼로 자결해야 하오.” 비장한 각오를 다진 그들은 조소령과 함께 새작전을 짠다.수용소는 이미 대구에서 동원한 미군장갑차 30대가 포위하고 엄중한 경비를 펴고 있었다.한판 붙을 수 밖에 없는 형편, 두 사람은 남전(南電: 지금 한전) 영천출장소를 찾아 소장에게 밤9시 단전시켜줄 것을 간청하였다. 소장이 “미군이 문책하면 안된다”며 거절할 때에 곁에 있던 젊은 전공이 말했다. “사고로 위장해서 제가 끊겠어요. 소장님이 허락하신다면...”구세주를 만난 두 소령은 미리 조직한 특공대 30명을 대기시키고 전공과 함께 밤9시를 기다렸다. “끊어라” 조소령의 명령에 영천 포로수용소는 암흑세계로 변했고 동시에 특공대 30명은 전광석화와 같이 행동 개시...포로복장으로 위장한 특공대원들은 포로들을 탈출시키면서 3명이 1개조로 미군 경비병들을 급습, 수갑을 채웠다. 동시에 장갑차 헤드라이트를 사격한 특공대원들은 장갑차에 뛰어올라 고춧가루 포대를 쏟아넣어 비명을 지르는 미군들을 일시에 붙잡앗다.수천명 포로들은 금호강쪽으로 탈출, 사복경찰과 반공청년대원들이 민가에 수용하였다.협조를 거부했던 미군 수용수장은 돌발사테를 당하자 미군병사들에게 “한국군과 싸우지 말라. 이것은 정치적 문제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뒤늦게 지시했다고 한다.▶부평지구= 이곳 포로수용소는 미국기지 내 미공병단 옆에 있어 처음부터 포기상태였다.미군은 18일 아침 방송으로 전국의 탈출사태를 접하자 포로들을 작업장에도 내보내지 않았다.이날 오후 3시쯤 철조망 밖에서 헌병장교가 수용소 헌병을 기합주는 듯 반복하여 호통치는 소리가 포로들에게 다 들려왔다. “다른 수용소는 다 탈출했는데 여긴 무얼 하느냐. 빨리 나오기만 하면 우리가 다 도와줄 텐데...” 이 말을 듣자 포로들은 그제야 상황을 알게되었다.미군측은 탈출방지를 위해 한국군 경비들을 철수 시키고 해병대를 출동시켜 겹겹이 경계망을 강화하였으나 밤 9시 수용소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조편성을 마친 포로들은 50명씩 스크램을 짜고 철조망에 담요를 뒤엎으며 탈출하기 시작했다.뒤늦게 미해병대가 착검한 총으로 저지에 나서자 후미에 따르던 포로들이 방향을 바꿔 뒤쪽으로 달리자 인근 헬기장 서치라이트가 켜지며 사격하는 바람이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사망포로 47명, 부상 60여명, 탈출한 538명은 분산 잠적, 군경 및 청년단원들이 보호하였다.이튿날 19일 오전 9시, 부평 초등학교 교정에서 수만명 시민 궐기대회가 열리고 인천까지 경인가도를 걸어가는 시민 행렬은 반공포로들의 은신처, 검문하는 미군들로부터 포로들을 숨겨 행진하는 인간 띠였다.이렇게 이틀 동안 탈출에 성공한 반공포로들은 전국에서 모두 2만 7천여명이다. 이승만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공 귀환을 거부한 중공군 포로들은 한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뒤집어진 세계 "이승만은 적보다 무서운 적이다"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서울발 아침 긴급뉴스는 강대국들을 무차별 강타하였다.런던 침실서 처칠이 뛰쳐나오고, 도쿄에서 아침 샤워하던 클라크는 면도칼을 떨어트렸다고 한다. 워싱턴 아아젠하워는 즉각 백악관 안보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흥분한 얼굴로 분노를 토하였다. “이승만은 우리의 적이다. 전쟁하는 적들보다 더 무서운 적이다.”수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공산측과 겨우 타결한 포로송환 협정, 그 최종서명이 오늘 18일로 예정되어있는 판에 이승만이 산통을 깨버렸으니 이승만에 대한 비상대책이 더 급하다고 말했다.“누가 적인지를 재규정하자. 이승만은 적보다 무서운 적이다.”“이승만을 더 이상 신뢰하면 안된다”“한국군 지원과 경제원조도까지 당장 끊어버리자” 백안관이 허둥지둥할 때 대서양 건너 런던의 처칠은 더 펄펄 뛴다. “유엔 권위를 파괴한 극히 심각한 중대범죄”라고 펄펄 뛰면서 아이젠하워에게 압박을 가한다. “이승만은 세계 평화의 적이다. 배신자 이승만이 존재하는 한 한국전쟁에 협조 못하겠다. 파병16개국 군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의 권한을 박탈해야 한다.” 백악관회의는 처칠과 똑 같이 ‘이승만 제거’작전 발동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한다. 휴전을 결사반대하고 단독북진 통일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승만, 그런 자살행위를 왜 고집하느냐고 말리면 “자살도 우리의 주권이다. 공산지배를 받느니 자살을 택하는 길 밖에 없다고 국민들이 앞장 서 싸운다”는 이승만, 아이크도 덜레스도 그의 ‘협박’이 말로만이 아니라 언젠가 행동할 인물이라 걱정했는데, 기어이 반공포로 전격 석방으로 실증해준 용단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미국 정부는 두 가지 난제에 봉착했다. 하나는 실제로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여 단독북진에 나서는 것, 둘은 이승만이 또 포로를 석방할 경우, 공산측이 반발로 미군포로를 돌려주지 않을 위험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이승만의 자유행동을 방치하면 안되는 상황이다.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우선 모든 포로수용소 경비 강화령을 내리고 한국군 경비병을 미군으로 교체하는 한편, 미군 2사단에게는 비상사태 대비 특명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자동발동’ 태세로 돌입하는 Operation Ever-Ready, 이승만 제거작전이 워싱턴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신호를 이승만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승만, 전세계에 발표 “내 명령 하에 석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8일 상오 11시 공보처를 통하여 포로석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중대담화를 발표하였다.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되었어야 할 터인데 유엔당국들과 또 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의 옳은 점으로 우리의 설명을 들은 분들은 동정상으로나 원칙상으로나 동감을 가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다. 그러나 국제상 관련으로 해서 불공평하게도 이 사람들을 너무 오래 구속해 왔던 것이다. 지금 와서는 유엔이 공산측과 협의한 조건이 국제적 관련을 더욱 복잡하게 해서 필경은 우리 원수에게 만족을 주고 우리 민족에게 오해를 주는 흠상을 일으킬 염려가 있게 되었다.그러므로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한인포로를 오늘 6월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엔사령관이나 관계당국들과 충분한 협의가 없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설명치 않아도 다 알 것이다. 각도지사와 경찰에게 지시해서 이 석방된 포로들을 아무쪼록 잘 지도 보호할 것이니 그 직책을 잘 행할 것을 믿는 바이다. 우리 모든 민중이나 친구들이 다 협조해서 어디서든지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줄 것을 믿는 바이다.”([조선일보] 1953.6.20일자. 호외 재록)이보다 앞서 원용덕 헌병총사령관도 담화를 냈다. “전국민은 이들 애국청년을 애호 선도하여 주기 바란다...본직은 조국의 신성한 주권의 존엄성 유지를 위하여 이를 명하였으며 한국민의 열화 같은 민족정기에 호응하여 이를 감히 실천한 바이다...석방된 애국청년을 자기의 허가 없이 불법 감금 또는 억류하는 여하한 부대나 개인을 막론하고 단호히 무력행사를 단행한다”이 ‘무력행사’란 말은 석방 포로들을 총력 검거하겠다고 발표한 미군과 동조세력을 경계하는 언명이다.([조선일보] 1953.6.20.일자, 호외 재록)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육해공 3군 참모총장들을 소집, 긴급국무회의를 열고 반공포로석방에 수반되는 제반문제를 논의 지시하였다. 부산 정계에서도 국회 의장단을 비롯하여 국회의원들이 “통쾌하고도 당연한 처리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한결같이 기뻐하였다.

◆이승만, 아이크에게 “미군 철수 반대 않겠다” 선언

아대통령은 17일에 지난6일자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서한에 대한 회한을 발송하였다. 19일 공보처를 통하여 공개된 동 서한에서 이대통령은 경제원조와 국군보강에 대한 아 대통령의 제의는 감사하는 바이나 “이것이 정전을 수락하는 대가로서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못 박았으며 “미군이 철수하는 상황이 오더라라도 한국은 반대하지 않겠다”고 서슴없이 선언한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나는 첫째 6월6일부 귀한에 대한 회담이 이같이 늦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사실인즉 편지 초를 잡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나 내 입장을 밝히려니...(중략)...처음부터 우리는 우방들에게 밝혀 고하기를 중공침략자가 한국에 남아있음을 용허하는 따위의 정전이 성립된다면 우리를 살아갈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인바, 이런 불안은 조금도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우방들은 중공의 철퇴와 한국의 통일이 정전 후에 개최한다는 정치회담에 의하여 문제없이 성취되리라고 보고 있는 듯 합니다.나는 이 점에 대하여 긴 논설을 하고 싶지는 않으나 우리는 이것이 가능하다고는 믿지 않는 것만은 말해두어야 되겠습니다. 지금 국제연합은 공산침략자들과 휴전협정을 맺으려고 하는 만큼 우리가 도대체 국가로 존속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우리생각에 끝없이 왕래하고 있습니다.세계 공산침략에 대한 이 투쟁에 있어 군사 경제 양면에 걸쳐 우리에게 막대한 원조를 준 사실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최후까지 미국에 우의를 가지기를 원합니다.만약 미군이 무슨 이유로 하여 이 이상 투쟁에 개입함을 중지하고 비켜서게 되거나 정전의 여파로서 한국에서 전부 철수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세 돐째 되는 이 전쟁의 첫해에서 미국과 국제연합이 이끌어가며 반복하여 전쟁목표로서 통일 독립의 민주한국의 건설과 침략자의 응징을 공연하게 밝혀왔습니다.그러나 요즘 와서는 한국통일이니 침략자처벌이니 하는 것은 말조차 사라지고 말아서, 마치 이 전쟁 목표들이 벌써 달성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연 방기된 감이 있습니다. 들리는 말은 정전뿐입니다.경제원조와 국군확장에 대한 귀하의 후하신 제의는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공이 우리가 아는 그런 정전을 수락하는 대가로서 온다면 우리는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정전 후 양국 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하겠다는 약속이 성의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상호방위조약이야말로 우리가 늘 추구해오던 바로서 만강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전에 한데 매어있다면 그 성과는 보나마나 거의 줄어들 것입니다.대통령 각하.우리가 얼마나 난국에 직면하고 있는지 상상하시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유엔은 틀림없이 우리 국가의 멸망을 의미하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침략자와 타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정전조건에 관하여는 유엔은 적과 부화뇌동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의 정전에 대한 태도를 변경시키는데 유화주의자의 주장이 주효하였다는 냉철한 사실을 우리는 안 보려야 안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바에는 이 위험한 경향(유화주의)이 만일 이 치명적 정전으로 말미암아 굳어진다면 미국을 포함한 자유세계를 구극적(究極的)으로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자유세계의 흥망을 좌우하는 이 순간에 응당한 대책을 귀하의 현명한 영도에 기대하여 마지않습니다.」

감언이설로 휴전 수락을 강요하며 ‘협박’하는 강대국 대통령에 대한 정면 도전 서신, 이승만은 아이크 편지를 열흘 넘게 주무르며 대응책을 고심하던 끝에 “한국의 운명‘을 걸기로 작정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하다.첫째, 미국이 멋대로 휴전하고 철군한다 해도 반대 않겠다. 한국은 독자적으로 통일전쟁을 계속한다. 둘째, 휴전후 정치회의에서 통일해준다는 말은 하지도 말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군사-경제 원조 제공은 휴전과 별개이며 휴전수락의 조건이 아니다. 넷째, 침략세력 공산권과 휴전에 타협한다면, 미국과 자유세계는 결국 유화주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멀리 보고 넓게 알고 깊이 꿰뚫는 이승만의 전략적 통찰력이 돋보이는 편지, 오로지 휴전에 눈먼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의 글로벌 전략적 안목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클라크에게 솔직한 고백...’국군의 전작권 회수‘ 위협

반공포로 석방에 놀라 이승만에게 강한 항의전문을 보냈던 클라크가 22일 도쿄에서 날아와 경무대로 직행, 이승만을 직접 만난다. 이승만이 보낸 답신에 ‘한국군의 전시작전권 철수’ 경고 등 더 큰 충격적 발언이 명문화되어있기 때문이었다.“지난번 약속을 어기고 본관 휘하의 국군을 빼내 마음대로 포로석방을 하다니요?” 짐짓 포커페이스(poker-face)로 꾸민 이승만은 딴청 부리듯 사무적으로 응수한다.“내가 왜 당신에게 미리 통보 안했는지 자명하지 않소.”(It must be obvious why I could not notify you in advance). 알려주면 사령관으로서 사전 예방조치를 해야 할 테니 당신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말이다. 동지끼리만 통하는 대화였다. 클라크는 뒷날 그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서 “예언자 같은 제1의 애국자이고 한국에 없어선 안될 인물”이라며 이승만을 존경했지만, 휴전의 데드라인에 몰려서까지 국제정세를 이토록 요리하는 신출귀몰의 전략전술에 새삼 감격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휴전협상 완수의 책임자로서 클라크는 이승만에게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한 시간 가량 만나고 나온 클라크는 “휴전 수락을 전제로 한 한미양국 방위조약 협상은 유효하다”고 기자들에게 확인해주었다. 반공포로석방으로 미국이 격분하여 한미관계가 깨질까봐 온 국민이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크가 돌아간 이틀 뒤 이승만은 클라크에게 보냈던 자신의 답장도 공개하였다. ‘사사로운 편지’란 단서를 붙여 보낸 것을 한국국민과 세계가 알게 하여 미국을 흔들어 놓음로써 강대국을 자신의 프레임에 끌어들여 요리하는 ‘밀당 외교전술’이다.

▶클라크 사령관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이대통령은 24일 지난 6월20일부로 휴전협상 책임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을 공보처가 번역하여 공표하게 했다. ([동아일보]1953.6.26일자)

“클라크 장군 귀하귀하의 서한은 1953년 6월18일 저녁에 본인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때 나는 오랜 기일을 두고 부당하게 억류되어있는 충량(忠良)한 한국인 포로들을 왜 석방치 않으면 안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는 서한을 귀하에게 보내고자 준비 중에 있었습니다. 본인은 이 서한과 함께 공식문서로서 상기 포로들에 관한 정부의 견해를 전반적으로 설명한 외무장관 변영태 박사의 서한을 귀하에게 보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변 박사의 서한을 공식적인 것으로, 그리고 본인의 것은 사사로운 것으로 보아주기 바랍니다.6월18일부의 귀 서한에 관련하여 그중의 한두가지 점에 관하여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유엔군은 우리를 구원하러 왔으며 귀하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그에 대하여 감사히 여기는 바이요. 앞으로 여하한 일이 야기되든 간에 우리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가 국련군의 사령관으로서 우리들의 공공의 적에 대한 전쟁을 지도하는 만치 우리는 우리의 군대를 귀하의 통수 하에 두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귀하가 한국군의 장병과 한국정부 및 국민들의 과거에 귀하에 베풀어준 충실한 지지에 전적으로 만족하실 줄 믿는 바입니다.귀하가 양지하다시피 사태는 최근에 전적으로 변하여 버렸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귀하나 본인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것이 아니요 국제연합 정치가들로 인하여 야기된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적들이 주도해오던 휴전조건을 수락하였으며 우리를 보고 이 조건을 수락하라고 강요하였던 것입니다.우리들은 이러한 휴전조건은 너무나 부당함으로 그것을 수락하는 것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부언할 필요도 없이 백만 이상의 중공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는 한 한국이 살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일입니다. 혹자는 한국의 통일은 정치회의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승리하고 있는 이때 전쟁에서 실현되지 않는 통일이 회의에서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미국정부당국자와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이 (해방후) 수년을 요하여 평화적 회담으로 한국을 통일하려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정치협상이란 그것이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무용한 것이라는 쓰라린 경험에서 울어난 우리의 확신을 지울 수 없는 것입니다.국련의 몇몇 가입국은 친공적이며 혹은 공산 대 민주의 이 세계적인 투쟁에 자기입장이 명확치 못하며 혹은 그것이 반미적인 것입니다.이러한 국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미국은 그 동안 한국통일정책과 공산침략자를 응징하는 정책을 변경함으로써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침략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한국은 기로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인들은 국가적 사멸로 인도하는 국련의 지시에 따르거나 우방 국가들과 결별하여 자기 자신이 본래의 공통된 목적달성을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한국인들은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자는 우리의 본래의 결심에 충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미국과 우리들이 심대한 희생을 내면서도 지켜오는 근본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유엔이라는 것을 상기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충량한 동맹자가 한국이겠느냐 국제연합이겠느냐 하는 것은 미국민 스스로가 판단하는데 맡깁니다.이러한 까닭에 현재 휴전조건대로 휴전이 조인된다면 우리들이 지금까지 지향해 오던 우호관계에 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최후적이며 공식적 표시라고 인정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유감스럽게도 한국군이 귀하의 통수 하에 있게 되리라고 보지 않습니다.그러나 귀하도 아는바와 같이 본인은 본인이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로부터 철수케 하기로 결정할 적에는 본인이 귀하에게 친구와 친구로서 알려주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귀하에게 보낸 요전의 서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약속은 아직 유효한 것입니다.그 서한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아직도 이 철수 명령을 안 내려도 무관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포로문제와 이 문제를 혼동하여서는 아니 됩니다.이 두 가지는 관련성이 없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귀하가 말하는 그 약속을 했던 당시에는 내가 충량한 한국포로를 석방하리라고 예견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은 본인이 단독행동으로 낸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적에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귀하와 사전에 협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 특수한 경우에 처하여 이러한 조치를 왜 안 취했는지를 알 것입니다. 본인은 귀하가 적어도 본인의 의도하였던 바를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포로문제는 전투조치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이문제 처리 역시 과거에는 귀하에게 일임하였던 것입니다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하여 특히 이 문제가 한국시민(북한포로)의 처리문제에 관련되었으니 만치 그가 발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본인이 사전에 귀하에게 협의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귀하를 곤경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귀하는 본인의 결정을 본인이 우리들의 협정을 위반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공산당이 우리 포로를 여하히 처리하였느냐 하는 점에 의문을 품을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 포로를 여하히 처리하였던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앞에 말한 것을 되풀이 하자면 반공포로를 그와 같이 석방하는 것이야말로 귀국이 데려오려는 친공적인 외국군대(중립국 인도)와 한국인 사이에 충돌이 생길 위험성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귀국의 청년들과 어깨를 겨누며 공산군과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우리가 끊임없이 반대하여 왔고 또한 귀측이 늘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친공적인 또 하나의 외국군대를 우리 집안에 데려와서 우리의 충량한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나아가서는 공산 측의 소위 교양원들이 우리 시민(반공포로)들을 세뇌하여 공산주의로 개조토록 만들 것을 계획 진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자칭 평화를 제창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힘이나 강압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하지만 반공포로들이 친공국가 군대로 포위되어 버리는 이상의 강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유엔당국자들이 만들려는 사태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귀하가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본인이 반공포로를 해방함으로써 취한 해결책을 귀하가 그렇게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본인은 어디까지나 우리 한국민이나 또는 기타 아시아의 반공자유민들이 반미적으로 나가게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은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협조를 제공하여 왔으나 이상하게도 이들은 대개 끝에 가서는 미국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슬픈 사실이며 우리는 이것을 막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여야 합니다.만약 미국이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면 떠나도 좋으나 적어도 미국이 우리 한국인을 우리들의 공동의 적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은 태도는 취하지 말아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열렬한 소원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본인이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무모하게 취한 것이 나이요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결과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귀하의 18일부 서한의 최종항이나 또는 그와 성질이 비슷한 전에 발표되었던 여러가지 성명을 협박이나 강압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오직 우리가 정전문제에 있어서 우방과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자발적인 과오를 범할지도 모른다는데 대한 하나의 우호적인 충고라고 생각합니다.최근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성실한 서한 역시 본인은 똑 같은 마음으로 받은 것이며 이 점은 적어도 우리 한국인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본인은 또한 귀하가 본인의 행동을 반항적 태도라고는 생각지 말아주기 바랍니다.본인은 하루 온종일 낮과 밤을 밀실에 칩거하여 나 자신과 토론하고 여론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본인은 또한 본인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본인의 깨끗한 양심과 의무감은 나의 길을 인도하고 있으며 그 길이야말로 본인이 꼭 걸어야할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장군, 본인이 쓸데없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종용을 거부하고 있다는 바, 이처럼 본인의 진정한 말은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우리 우방에 요청안 것은 한국을 위해서만 아니라 전자유아시아를 위해서인데, 부당한 강요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반대하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길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우방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참으로 깊은 겸손한 마음에서 거부하는 것이며 결코 반항적 태도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승만」

아이크보다 말이 통하는 클라크에게 이승만은 보다 솔직하게 마음속 전략전술을 털어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태가 변했으니 한국군 전시작전권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대목이다. 둘째 이대로 휴전한다면 미국과의 우호관계는 끝장이다. 미군 철수도 마음대로 하라. 셋째 ‘정치회의’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미국의 얕은 속임수를 찌르는 말--”전쟁으로도 이루지 못한 통일을 회의로 이룰 수 없다“는 송곳은 아무도 반론을 찾지 못할 직격탄이다. 넷째, 반공포로를 친공 중립국에 넘기는 것이 ‘가장 무서운 강압’임을 지적한다.이러면서도 이승만은 ”미국과의 우정은 변함없다“며 ‘반항’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 공산권 충격...“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구나”

반공포로 석방 쇼크는 공산측도 마찬가지였으나 뜻밖에 판문점에선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북경방송이 19일 중국어방송에서 [신화사] 개성특파원 보도를 통해 미국을 물고 늘어졌다.“이승만 대통령은 무력을 행사하여 포로들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탈출시켰다. 미국은 이대통령에게 동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전가시키고 있으나 사실은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휴전협상에 있어서 미국 측의 성의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로 될 것이다.”공산측 선전꾼들은 “미국은 꼭두각시 한명도 통제하지 못하나? 이승만이 휴전협정을 지킬 것이라고 무엇으로 보증하나? 이승만을 끌어와 협정에 서명을 시켜라”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어렵사리 타결된 포로송환협정문도 책상서랍에 다시 넣어둔 채 양측은 이제 상대방이 아니라 “이승만과 협상해야 하는 제2의 협상 국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인도를 비롯한 스웨덴과 스위스 등 중립국들도 “우리 3개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준수 보장을 하지 않는다면 휴전 및 포로감시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을 것임을 명백히 선언한다”고 했다.이제 와서야 세계는 이승만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결코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올리버, 앞의 책)미국만 믿고 있다가 이승만의 한방에 휴전은 물 건너가게 생겼잖은가. 언제 또 무슨 방식으로 휴전을 방해할지 예측 불능 상황이다. 이 ‘예측불능’이야말로 뒷날 미국부통령 닉슨이 고백하는 ‘위대한 외교가 이승만의 독자적 전술‘임을 당시 그 누가 알았으랴.’예측불능‘ 불안감에 당황한 영국 처칠과 참전국들도 미국을 붙잡고 “이승만을 없애든지 무릎을 꿇리든지” 휴전을 마무리하라고 다그치며 흔들었다.

◆이승만 “정치회의 실패하면 휴전 무효화, 통일전쟁 할 것“

아이젠하워가 또 편지를 보내왔다. 공산측의 압박에 눈치를 살피듯이 이승만에게 요구한다.“휴전이 성립되었을 때 한국군이 휴전조항에 순종할 것을 보장하라”는 통고문이다. ’국군의 전작권 회수‘ 위협에 아이크도 안절부절이다. 이승만은 이 편지도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승만은 23일 클라크 장군에 대하여 한국이 휴전을 수락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3개 조건을 재확인,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 1953.6.25.일자)1) 중공군의 철퇴, 불연이면 중공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퇴. 이것은 휴전협정 조인 전이라야 한다. 2)휴전 전에 한미상호방위협정의 체결이 필수 조건. 3) 휴전후 개최될 정치회의에 3개월 제한을 부여하여 한국 통일을 실현케 할 것. 3개월이 지나도 평화적 해결을 보지 못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휴전협정은 무효화 되고 무력에 의한 통일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상 3개 조건은 현재 정세로 보아 유엔측도 공산측도 수락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휴전을 서두르고 있는 미국 측의 대응이 주목된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하였다.

◆“자살도 우리 주권이다” 이승만 ’미국과의 결별‘ 각오

미국 언론들이 “단독북진을 열창”하는 이승만을 ‘자살폭탄을 안고 적진에 투신하는 만화‘로 그리기 시작한지 한 달, 만화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다. ’단독북진‘ 대책을 논의하는 백악관 안보회의에서는 “이승만이 미국 등 뒤에 칼을 꽂을 지 모른다”며 ’이승만 제거‘를 주장하는 군부를 덜레스 국무장관이 대안을 제시하며 달랜다. 덜레스는 부산정치파동 때 애치슨이 그랬던 것처럼 “이승만을 제거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담판하여 이용하자”고 주장하며, “공산측과 이승만을 한꺼번에 밀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휴전 강행뿐”이라고 협상에 자신감을 보였다. 이승만과 덜레스는 프린스턴대학 선후배이기도 하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달래보자“며 미국 공식방문 초청 카드를 꺼낸다. 이승만은 그러나 “바쁘다”는 한마디로 거부, “미국이 할 말 있거든 덜레스국무장관을 보내라”고 차버린다. 덜레스는 국회 회기라서 떠날 수 없다며 자기대신 동아시아-태평양지역 담당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1893~1970)을 대통령 특사로 보내겠다고 답한다.이승만은 “좋다‘고 답전을 보낸다. 이것이 바로 17일 밤, 그길로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린 것이었다. 휴전수락을 강요하는 미국의 얼굴에 어퍼컷 강타! 열흘전쯤 클라크는 아이크의 지시를 따라 ”휴전을 수락안하면 미국이 모든 원조를 끊어도 좋으냐? 단독 북진은 자살행위와 같다“고 협박반 애원반 이승만에 매달렸다. 그때 “자살도 우리 주권이다. 자살전쟁은 내가 지휘한다”고 고함친 이승만은 마침내 미국과의 결별을 각오한 뒤 ‘자살 기도’를 감행했던 것이 반공포로 석방이다.

★로버트슨, 이승만 제거 반대...“우리가 침략자와 다를 게 뭐냐?”백악관은 앞에서 본대로 경악, 격분에 떨려 ‘에버레디작전’을 들먹이다가 결국 또 주저앉는다.이번엔 로버트슨 특사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외국 원수를 체포하며 한국정부를 강제 인수하느냐? 침략자와 싸우는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침략자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냐?" 이렇게 이승만은 또 한 번 살아남았다. (남시욱, 앞의 책)

“내가 또 미치광이가 돼야지” 독립운동시절 ‘독립 미치광이’로 불렸던 이승만이 휴전협상론이 나올 때 결심했던 말이다. 휴전협상을 파괴하고 단독북진으로라도 끝내 통일을 이루고야 마는 ‘통일 미치광이’로 변신한지 3년째. 또 한명의 통일방해자 미국대통령 앞에 1대1로 맞섰다. 6월25일 중앙청 광장에서 6.25 동란 3주년 ‘멸공통일’ 행사가 열렸다. 이승만은 휴전필수조건 3개항을 역설하며 또 단독북진을 역설한다. “중공군 철퇴 우선, 한미동맹 우선, 정치협상 무용론”을 외치는 그날, 도쿄로 날아온 로버트슨 특사는 클라크와 회담을 마치고 밤비행기로 서울에 들어온다. <계속>◆필자 인보길(印輔吉)=뉴데일리 회장, 조선일보 이사 편집국장 역임. 2010년부터 '이승만 포럼' 운영 대표. 2023년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위원. *저서: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외. YouTube '인보길의 우남이야기' 뉴데일리TV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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