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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세계를 이끄는 반공지도자 이승만 박사는 ‘반공철학’의 일단을 이렇게 말한다.“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아서 친부형자질(親父兄子姪)이라도 격리시키지 않으면 모두 파멸하게 된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자유독립 번영을 위해 힘을 합쳐나갈 것이다.”해방후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남로당 박헌영의 ‘인민공화국 주석’ 요청을 거절하고서 “다 함께 뭉치자”고 호소한 연설에서다. ‘콜레라 환자라도 반성하면 포용한다’는 선언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본보기를 보여준 사례중 하나가 바로 ‘조봉암 포용’이다. 일제때 골수 공산당이 해방후 두목 박헌영을 비판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그를 건국내각의 초대 농림부장관에 기용한다. 계급투쟁 전문가 조봉암을 활용하여 농지개혁을 반대하는 지주계급을 다루기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조봉암의 개혁안은 극좌적 방법이라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지주계급에게 약점을 되잡힌 그는 짐을 싸야했다.
10년후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만난 조봉암은 방대한 수사기록 보고서 속에 있었다. ‘진보당사건’의 주역 ‘간첩 조봉암’...이럴 수가...아니 결국 이렇게 럴 줄 알았던 이승만이다. 1958년 1월14일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검거’를 보고하는 홍진기 법무장관에게 말한다.“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어야 할 인물이오.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두영 기록 [대한민국 국무회의록 1958] 국학자료원, 2018)이승만의 ‘반공철학’은 부모형제라도 가차없다.6개월 후 ‘진보당사건’ 2심공판 결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말한다.“법관들에 무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이런 판사들을 처리할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오죽 답답하면 이런 말까지 나왔을까. 마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윤석렬대통령 탄핵재판을 주무르고 있는 헌법재판소 판사들을 향하여 탄핵반대 국민들이 던지는 질문같이 들린다. 잠시후 홍진기가 답하였다. “(판사에 대한) 탄핵소추가 있으나 참의원(參議院)이 없어서 안되고, 법관 징계위가 있어도 법관들끼리 하는 것이니 소용이 없고, 임기만료자를 그때그때 정리하는 도리 밖에...”이승만의 음성이 높아졌다. “조봉암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된다, 그때의 판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여러가지 점을 생각하여서 중지하였다. 같은 법을 가지고 한 나라 사람이 판이한 판결을 내리게 되면 국민이 이해가 안될 것이고, 나부터도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해야 한다” ([대한민국 국무회의록 1958] 앞의 책)진보당사건 1심에서 검찰은 조봉암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사형을 구형하였으나 재판부가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2심 재판에서는 검찰 구형대로 조봉암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처럼 재판부에 따라 형량이 오락가락함에 대하여 이승만이 비판한 것이다. 당시 ‘탄핵’은 국회의 민의원이 아닌 참의원이 결의하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좌우대결과 빼닮은 ‘체제전쟁’의 본보기 역사이기에 해묵은 기록의 내막을 다시 더듬어보자. 야권통합에서 제외된 조봉암이 ‘진보당’을 만들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5년간은 휴전직후 분단국가 대한민국이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와 좌우 강대국들의 농단에 몸부림치던 국가존폐의 위기, 내우외환의 사건들이 넘쳐난다.
◆3대 대통령 선거의 돌발사—신익희 쓰러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V “갈아봤자 더 못산다”이것은 1956년 5월 제3대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때 야당 민주당과 여당 자유당이 대결한 걸작 슬로건들이다. 창당 1년도 안되어 ‘정권교체’ 선거를 노리는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을 내세웠다.건국 초대대통령과 직선제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2차개헌을 통해 3선의 길을 열어놓은지라 일찌감치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정해 유세에 돌입한다.
한편, 야권 통합에서 배척당한 국회부의장 조봉암은 혁신계를 통합하는 본격적인 진보정당을 조직하려 애썼지만 권력갈등 때문에 진통 중에 선거를 맞았다. 창당준비팀이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徐相日)로 정했으나 서상일이 이탈하며 거부하므로 박기출(朴己出)로 바꿔야 했다.
★유세중 신익희,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급서대선 투표일은 5월 15일,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외치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그 호소력이 커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국민의 인기를 끌었다. 특히 유명한 ‘한강 백사장 유세’는 당시로는 엄청난 30만 인파로 뒤덮여 신익희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야당후보 단일화를 내세우고 혁신계 조봉암 후보와 협상을 벌인다. 신익희가 양자회담을 통하여 마침내 조봉암의 후보사퇴 합의까지 끌어내고 이를 발표하기로 했으나 이게 웬일인가. 그 발표 하루 전 5일 새벽4시 뜻밖의 사건이 터진다.유세를 강행하던 신익희 후보가 놀랍게도 호남선 열차에서 뇌일혈로 쓰러진 것이다. 전북 이리(裡里) 호남병원에 급송하였으나 그는 끝내 숨지고 만다. 향년 63세. 유해는 조치원까지 앰뷸런스로 운구하여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 인왕산 아래 효자동 자택에 안치된다. 민주당은 망연자실, 전국 당사에서는 통곡이 터지고 선거 정국은 돌풍에 휩쓸린다.◉“경무대로 모시자“ 난동=이날 오후 6시경, 유해 호송을 따르던 인파가 경무대 입구에서 폭력사태를 벌였다. 신익희의 죽음에 분격한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통의동 파출소를 습격, 무차별 파괴하며 칼빈 소총을 강탈하여 경무대로 진격하였다. ”해공 선생을 경무대에 모시자“고 울부짖는 이들은 대통령 관저에 집입하려고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며 카빈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춘천 사람 1명이 죽었다. 이튿날 서울 시경은 경찰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며 사망1명 등 사상자 27명이고 400여명을 연행 조사중인데, ”난동의 배후는 민주당의 지령“이라고 발표하였다. 정부도 성명을 내고, 야당의 반정부 선동이 폭력사태의 원인이며 북한의 불순분자가 날뛰는 시국에서 정체불명의 일당이 무차별 파괴행위를 자행했다고 경고하였다. ◉민주당 성명 ”노선 불명 후보와 단일화 협상도 않겠다“신익희의 급서 다음날 6일 민주당은 짧막한 성명을 낸다. “다시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여 싸우고 싶으나 법적 불비로 그 길이 막혔고 본당 이외의 대통령 후보자(조봉암)는 그 정치적 행적이나 노선으로 보아 지지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정권교체로써 우리 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하려던 초지의 관철은 후일로 미룬다”고 했다.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는 “야당연합은 이미 불가능하므로 후보단일화는 포기”하기로 결정, 성명을 발표하였다. 조봉암 후보와의 연대를 가장 격하게 반대해 온 장면 부통령 후보는 “나로서는 당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며 논평조차 거부하였다. 역시 조봉암을 반대하는 김준연은 “이제 민주당도 대통령으로는 이승만 박사를 지지해야 한다”고 개인성명을 냈다.
◉‘부통령 선거’로 변질=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운명, 대통령 당선 가능성에 부풀었던 야당 제1후보는 세상을 떠났고, 후보 사퇴 직전에 몰렸던 조봉암은 하루 밤새 야권의 유력 후보로 급부상한다. 신익희가 사라진 대통령 선거판은 자유당 이승만 후보의 당선이 투표 하나마나 확정적이란 예측이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제3대 정-부통령 (正-副統領) 선거는 그 초점이 ‘부통령 선거’로 변해 버렸다. 민주당은 부통령 장면의 당선에 올인하였고, 자유당 역시 이기붕의 당선에 혈안이 된다. 이런 현상은 미국 대선처럼 ‘러닝 메이트’제도가 법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4년 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때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놀라운 선거결과...신익희 추모표 200만, 조봉암도 대량득표
5월15일 투표 결과는 놀라운 것으로 새로운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승만 5,046,437표; 제2대때 득표보다 약 20만표 감소조봉암 2,163,808표; 제2대때 득표보다 약 2.5배 증가무효표 1,856,818표; 대부분 신익희 후보에 던진 추모표첫째, 선거에서 전에 없던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이 처음 나타났다. 즉, 여당지지표는 농촌, 야당은 대도시 중심,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지방 농촌지역에서 두드러졌고 서울, 대구 등 대도시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야당세가 크게 올랐다. 6.25전쟁의 정전 3년째 북한과 DMZ로 접경한 강원도에선 이승만 지지표가 99%를 넘기는 지역들이 나와 자유당도 놀랄 정도였다. 둘째 혁신계 조봉암의 약진이다. 지난 대선에선 76만여표를 얻었으나 이번엔 2백만표를 넘기는 승리를 거둔다. 일본 경찰이 ‘조선의 모스크바’로 부를 정도로 좌익이 강했던 영남을 비롯하여 호남에서도 큰 지지를 받았는데. 이것보다도 신익희 지지 표들이 조봉암에게 몰린 덕분이 가장 컸다고 언론들이 분석하고 있다. 셋째 사망한 후보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2백만명에 육박한 진기록이 나왔다. 민주당은 신익희가 타계하자 “무효표를 던지라”는 선거운동을 펼쳤으며, 자유당이나 혁신계를 싫어하는 표들이 그대로 신익희를 찍은 것으로 밝혀졌다. 장례를 미루고 미룬 신익희 유해는 빈소에 누워 열흘 넘게 추모행렬을 끌어들이며 ‘무언의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들이 나왔다. 그때 말대로 ‘시체장사’ 대박이다. 민주당은 신익희의 장례를 투표 일주일이 지난 23일에야 국민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한다. ◆이승만, 부통령선거 개표부정에 “장면 당선” 담화
대통령 선거 개표작업은 순조롭게 끝났는데 부통령 투표지 개표에서 ‘사고’가 터졌다.대구 제3개표구에서 부정이 적발되어 개표가 중단된 것이다. 개표를 맡은 대구시청 직원 일부가 장면 표와 이기붕 표를 바꿔치다가 들키고 말았다. 즉각 폭발한 개표장은 극렬히 맞선 양측의 충돌로 온갖 시비에 휩싸여 선관위와 양당은 투표함 지키기에 밤을 새운다. 그 시각 현재 개표 상황으로는 장면 후보가 16만표나 앞서있었다. 그러니 민주당에서는 “더 개표해 봐야 또 부정이 생길 것”이므로 이대로 “장면 후보 당선을 발표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수습 불가능, 대통령 후보 신익희를 잃고 당선 유력한 부통령 득표까지 잃게 된 민주당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진통 나흘째 19일 오후,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나서서 담화를 발표한다..이승만 대통령 당선자는 3회 연속 대통령으로 뽑아준 국민에게 감사 인사로 입을 열었다.“이번 선거에 남녀 유권자들의 많은 수가 나를 도와서 투표를 한 결과로 내가 다시 대통령에 피선된 것을 국민에게 감사하게 여기는 바이다. 부통령 선거에 대한 투표가 어떤 지방에서는 불분명하다는 말도 있고 또 어떤 지방에서는 선거위원들이 사퇴한 사람도 있다고 하며, 또 어떤 정당에서는 어떤 지방의 투표를 다시 검토하자는 데도 있어서 문제가 된다고 하나, 이런 문제들은 다 선거위원들이 공평히 조사해서 그 결과를 공문으로 발표할 것이므로 내가 지금 이번 선거에 대해 공식으로 발표할 수는 없으나, 나의 관찰로는 선거 결과가 대체로는 귀정이 나서 투표를 많이 받은 장면씨가 부통령으로 피선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몇가지 문제가 된다는 것은 종래 선거법칙대로 조사해서 판결될 것이나 나 개인의 관찰로는 이번 선거가 다 결말이 난 줄로 생각하는 바이다. 만일 이번 선거의 투표를 다시 검표하게 된다면 유엔 한국통일위원단이 우리나라 선거에 많은 협력을 해주고 있으므로 이 위원단이 이것을 감시하도록 해서 우리의 선거가 민주주의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세계에 널리 알려 주어야 될 것이다.”
이승만은 격분했다. 선거부정이야말로 후진국 정치에서 결정적인 국가치욕이다. 그 동안에도 지역선거나 보궐선거에서 부정이 적발되면 내무장관부터 가차없이 처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통령 선거에 개표부정이 드러나자 벌떡 일어났다. ‘장면 후보 당선’을 단언한 이승만은 국제망신을 면하기 위해 “유엔한국위원단에게 검표를 맡기라”는 당부까지 지시하고 있다.
▶이승만, 반대당에서 대통령-부통령 분리 당선에 “낙망” 토로개표부정 소동을 끝내라는 지시와 함께, 이어지는 담화에서 이승만은 부통령선거 결과에 ‘낙망‘이라는 심정을 솔직히 토해내고 있다. 무엇이 그러한가?
“나의 사사로운 감상으로는 부통령 선거에 대해 낙망으로 생각하노니, 이것은 두 반대 정당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는 것이 보통 전례도 없는 것이거니와, 또 우리 형편을 보아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이번 선거결과로 국민의 사명이 발표되었은즉 나로서는 그 사명을 따라서 어디까지든지 직책을 행하도록 힘쓸 것이다. 국민 전체로는 우리나라의 위험한 형편이 어디 있는지를 다 아는 바이고 또 나의 입장이 어떤지를 다 아는 바이니만큼 끝까지 지지해 주기 바라며 관민간에 정신통일과 정치를 한길로 진전해서 국권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기만을 바라는 바이다.”
대통령은 집권당 출신, 부통령은 야당 출신,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조합이다.이승만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을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국민의 의사표시인고로 충실히 따르겠다면서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 왜냐하면 상대가 장면이란 인물이기 때문이다. 건국초기 주미대사로 기용하였을 때나, 부산 피난정부 국무총리로 임명했을 때나 장면의 능력과 행태에 대하여 이승만이 너무나 실망했다는 이야기는 앞선 연재(83)에서 소개하였다.24세 연하에다 정권교체를 갈구하는 야당의 부통령 장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승만도 그 4년후 3.15 부정선거와 4.19사태까지 내다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민주당이 만세를 불렀다. “과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과 격이 다르구나” 독재자로 몰아 규탄했던 야권은 “장면이 당선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이대통령의 담화에 환호하였다. 임시대표최고위원 곽상훈은 “이대통령이 민심의 소재를 바로 안 것”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최고위원 조병옥은 이대통령의 담화를 환영하며 “앞으로 장면씨의 건설적인 진언을 행정에 반영시켜 민주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조선일보] 1956.5.20.)이승만의 한마디로 난장판 정국이 질서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날 밤으로 즉각 미개표 투표함이 열렸고 서둘러 개표가 완료된다. 최종득표 수치는 이러하다. 장면 4,012,654, 이기붕 3,805,502. 약 20만표 차이로 당락이 확정되었다. ’바꿔치기‘ 부정행위를 저지른 대구시청 직원 4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소동은 일단 마무리 짓는다.
◆ 조봉암, ’평화통일‘ 깃발 ’진보당‘ 창당
신익희의 급서후 한참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조봉암이 나타났다. 이 무렵, 조봉암의 대량 득표에 고무된 혁신계는 ’대동단결‘ 바람이 불었다. 일약 혁신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조봉암도 대선전 이루지 못했던 ’혁신계 통합정당‘ 설립을 위해 뛰었다.친분 깊은 장택상 등 우파세력의 의사를 타진하며, 지난해 9월 포섭했던 ’광릉회의‘ 멤버들을 기초로 하여 여러갈래 좌파세력의 영입을 광범하게 시도하였지만 쉽지 않았다.다양한 이념성향 때문에 일부에선 ’진보당‘이란 당명 수정을 요구하고 다른 쪽에선 조봉암의 급진적 전력을 문제 삼아 2선후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진보‘라는 용어가 ’좌익‘과 동일시 되던 시절의 자연스런 진통이다. 공산주의세력이 ’진보‘라는 용어를 독점, 악용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조봉암은 혁신세력의 대통합이란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의 계열만으로 ’진보당 추진위‘를 구성해 창당작업을 서두른다.▶’평화통일‘ 노선 채택에 충격=대선이 끝난 6개월후 마침내 ’진보당‘이 출범한다. 1956년 11월10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발표한 정강정책은 ’한국적 진보주의‘를 내걸었다. 그리고 모두가 꺼려하던 용어 ’평화통일‘이 명문화 되었다. 진작부터 논란이 뜨거웠던 ’평화통일‘이 당의 노선으로 등장한 데 대하여 당내에서도 충격과 놀라움이 컸다.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뒷이야기가 있다.2년후 1958년 3월 진보당사건 2회공판에서 ’평화통일론‘을 재판할 때 나온 피고인들의 진술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조봉암은 기소장에 나온 혐의사실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문제의 [중앙정치] 잡지는 진보당 기관지가 아니며, 평화통일론은 나 개인적으로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 당시 사정으로 보아 그것을 발표할 단계는 아니어서 당론으로 결정한 바는 없었다“라고 공소사실을 부인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김기철 등 피고인들도 일제히 동조하였다. 그런데 진보당의 선언문과 강령기초를 직접 담당했던 민혁당의 정책심의회장 이동화(李東華) 피고인만은 다른 말을 진술하고 있어 충격을 불렀다. ”56년 가을 서상일씨 집에서 당강령 및 선언문 기초를 조봉암씨로부터 의뢰받았으나 그 당시 나는 ’평화적통일‘이란 용어를 일체 쓰지않았고 그 대신 ’민주적 통일‘이란 문구를 썼던 것인데 나중에 그것이 인쇄된 것을 본 즉 ’평화적 통일‘이란 용어로 바뀌어져 있었다...“ ([조선일보] 1958.3.28.)누구 말이 진실일까. 혁신세력의 단합을 주장하며 진보당에 합류한 민혁당 지도자 이동화는 당시 대표적 좌파 이론가였다.
◆조봉암 등 21명 검거...간첩-국보법위반 혐의
1958년 1월12일부터 사흘간, 서울지방검찰청 정보부는 진보당위원장 조봉암과 당 선전부장 조규희(曺圭熙,), 그리고 민혁당 지도자 이동화 등 거물급 3명 등 21명을 연행한다. 진보당 창당이후 지난 1년 남짓 육군특무대를 중심으로 합동수사한 결과라고 했다. 조인구(趙寅九) 정보부장검사는 간첩 박정호(朴正鎬)등 10명에 대한 수사결과 공소사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통일이란 구호는 남한의 적화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책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국법에 위반된다. ’북진 없는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는 정당조직이란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진보당 확대공작에 귀착되는 것”이라고 단정하며 “여하한 적화통일의 구호도 국시에 위반되는 것이며, 진보당, 민혁당 등이 박정호 간첩사건에 관련되어 수사대상에 오르게 됨은 당연하다“고 잘라 말했다. 즉, 조봉암 일파의 검거는 간첩사건 때문이며 진보당의 ’평화통일‘은 적화통일의 다른 말이라는 설명이다. ([조선일보] 앞의 기사)여기에 나오는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은 40년 후 90년대 제2의 민혁당사건으로 또 나온다. ★검찰이 발표한 조봉암-진보당의 혐의사실 일부그러면 조봉암과 진보당은 무슨 죄를 지었던가. 검찰이 발표한 공소장엔 ’간첩죄, 간첩방조죄, 국가보안법 위반‘이 조봉암의 기소사실로 적시되어있다. 요약해 살펴보자.(당국 발표 및 [동아일보]-[조선일보] 보도내용 종합)
▶간첩죄◀◉1955년 10월 조봉암은 당기관지 [중앙정치] 10월호에 “진보당의 주장을 만천하에 천명한다”면서 ’평화통일에의 길‘이란 논문을 게재함. 평화통일 방안으로는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유엔 감시하에 북한만의 총선거, *남북한 전국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연립정부 구성 협상 통일. *중립화 통일 *국가연합에 의한 방안 등을 제시한다.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은 북한과 소련이 반대하고 있으므로 북한-소련이 동의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면서 “남북이 동등한 위치에서 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사항은 현행 정부와 정면충돌하게 될 것이므로 공개를 미룬다고 하였다.◉1956년 5월6일 김일성이 남파한 간첩 박정호와 밀회,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통일‘ 방안과 조봉암이 주장하는 평화통일 방안이 동일함으로 연대투쟁에 합의함. ◉국회프락치사건후 월북하여 북한조국통일구국투쟁위원회를 담당한 김약수에게 밀사를 파견, 밀봉교육을 받은 밀사가 7월20일경 서부 휴전선 루트로 남하하여 조봉암에게 김일성의 지령을 전달, 조봉암이 북한의 ’목적사항‘들을 실행에 옮김.◉북한합작을 반대하는 서상일과 결별, 11월10일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진보당‘ 창당.정부의 감시를 피하기위해 당을 2중조직으로 만들고, 의심받지 않는 인사들을 다수 앞세움.◉12월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 노선 확정. 남북 군경해산, 유엔감시 아닌 중립국감시단의 감시하에 총선거 실시, ’남북연립정부 수립‘ 등 평화통일방안 마련. ◉1957년 8월 재일교포 간첩 정우갑(鄭禹甲)을 입당시켜 북한과의 접점을 일본까지 확대.◉조봉암은 신당동에서 운전기사를 시켜 미제 45구경 권총과 실탄 50발을 구입.◉9월 노선을 같이 하는 근민당(勤民黨) 잔류파들과 합세, 평화통일준비위원회 설립.◉같은 무렵, 진보당 통일문제연구원장 김기철에게 평화통일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작성하라고 지시, 김이 내놓은 문안을 보자 “내 생각과 가장 근접한 통일안”이라며 당 간부회의에서 통과시켜 채택하였음.
◆조봉암, 간첩 양명산에게 거액을 요구, 제공 받다
1958년 2월18일 검찰이 진보당 일파를 기소한 사흘 뒤, 국방부는 놀라운 새 사실을 발표한다. 육군특무대에서 대남간첩 양명산(가명 梁明山, 김동호, 梁壯宇, 본명 梁利涉, 나이 불명)을 수사한 결과, 거액의 공작금을 조봉암에게 제공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평안북도 강계 출신 양명산은 신의주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할 때 우편행랑에서 거액의 중국 돈을 훔쳐내 상해로 도주하여 무역업을 하던 상인이다. 해방후 돌아와 무역회사를 차렸다가 6.25후 월남, 북한과 밀무역을 하면서 한때 ’이중간첩‘ 노릇도 하였는데 조봉암과의 인연은 상하이 시절부터였다. 남한에서 조봉암과 재회한 그는 5.10총선때와 56년 대통령 선거때 선거자금을 대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제 피차에 필요한 관계로 맺어졌다. 남북을 왕래하는 밀수를 통하여 거금을 버는 양명산의 행각이 육군정보당국의 수사로 급기야 들통이 나고 말았다.
◉조봉암에 4만 달러 제공=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일당(여성2명 포함) 8명을 수사하였는데 “양명산은 앞서 검거한 박정호 정도는 문제도 되지않을 만큼 거물급 간첩”이라고 했다. 군-검-경 사찰팀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검찰 측이 공개한 바에 의하면, 양은 이번에만 공작금 4만불을 갖고 월남하여 진보당에 침투, 조봉암에게 세공하였다. 국방부와 검찰이 날마다 발표하는 수사내용은 엄청난 것이었다.◉남북한 수십차례 왕복...북한, “조봉암을 무제한 지원하라“양명산은 교역을 빙자하여 수시로 북한을 내왕하고 ”조봉암의 평화통일 노선을 각당에 침투시키도록 무제한 원조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조봉암은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양에게 선거자금 2억환을 요구하여 받은 사실도 있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여 서울 교외 명승지를 돌며 돈을 받았으며, 가족으로 위장하기 위해 을지로 소재 모 요정의 기생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암달러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양명산은 모두 미화로 바꿔 전달했다.◉조봉암, 북한에 ’신문사 설립-운영‘ 자금을 요구=육군특무대 수사결과 ”조봉암은 북한 조선노동당중앙당연락부장 임해(林海)에게 연락문과 고급만년필을 보냈는데, 만년필은 임해로부터 인삼 녹용을 받은 답례로서 조씨가 딸과 함께 서울 종로 신신백화점에서 구입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때 조봉암은 연락문에서 임해에게 서울의 [대동신문] 판권을 획득하는데 2천만환이 필요하며 운영 자금도 보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양명산은 남하시에 약 500개의 순금덩이, 인삼, 사향 등을 가져와 현금으로 바꿔서 여러차례 조봉암의 집 근처와 우이동 음식점 산호장과 시내 중국요리집 등에서 직접 수교하였으며, 금액은 도합 4천여만환에 달한다.“
◆조봉암, 양명산과 대질서 모두 시인...’간첩행위‘는 부인
육군툭무대에서 양명산과 조봉암을 대질 신문한 결과, 여러차례의 접선 밀회와 거액의 자금 수수사실이 확인되었다. 조봉암은 그 자금을 받아 모두 조카나 운전기사 등 다른 사람 영의로 시중 은행에 분산 예금, 진보당 확장자금으로 사용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개인적 정치자금으로 받아 썼을 뿐, 간첩행위는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서울지방검찰청 조완구(趙完求) 부장검사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조봉암은 북한공산당 제3차전당대회 공작내용 문건 등을 받고서 진보당의 창당 경위, 당헌, 선언문,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 명단등 문건을 북한괴뢰에게 보냄으로써 괴뢰의 지령에 대한 실행결과를 보고한 일이 있음도 밝혀졌다. 또한 북한괴뢰는 양명산으로 하여금 진보당 확대강화와 정치공작 및 자금 비선을 확보하는 한편, 비밀조직에 경험많은 자를 골라 북한괴뢰와 진보당 간에 상호 대사격(大使格)으로 교환하자는 방안도 세웠던 사실까지 부인하지 못하였다.양명산은 체념한 듯 솔직해졌다. 양은 특무부대에서 자백한 범죄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나서 “이왕 죽을 바에야 깨끗이 죽는 것이 시원하기 때문에 모두 사실대로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고 부언하였다. 조 부장검사는 이어 ”양은 53년 7월부터 작년(57년) 9월까지 무려 12차 24회에 걸쳐 남북을 왕래하는 동안, 조봉암에게 북에서 받은 자금 2만7천불 미화(美貨)와 1천5백만환의 한화를 전달하였고 특히 금년 2월에는 ’진보당 선거계획서‘를 가지고 월북할 예정이던 것이 미리 검거되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라고 골자만을 설명하였다.◆조봉암 ”북한-소련이 반대하지 않는 평화통일 방안“ 제시
휴전후 2년 밖에 안된 1955년 조봉암이 들고 나온 ’편화통일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첫째, 대한민국의 <유엔감시하 북한만 선거>라는 통일정책은 북한과 소련이 반대하므로 ”북 과 소련이 반대하지 않는 통일정책“이라야 한다는 주장이다.둘째, 그러기 위해서는 ’유엔감시‘가 아니라 ’중립국감시단‘이 선거를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휴전협정 조인과 함께 설치된 중립국감시단은 소련 위성국 체코와 폴란드, 그리고 중립국 스위스. 인도로 구성되었는데, 그 적성국들로 기울어진 감시단에 이승만은 처음부터 반대하였고, 친소국가 인도군이 들어오면 ’발포하겠다”는 성명도 냈다. 게다가 남한전역의 군사시설까지 뒤지는 적성국들의 행태가 간첩행위에 해당하므로 중립국감시단은 해체-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즉각 철수하라“는 국민적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셋째, 조봉암의 평화통일방안은 남북한이 ’동등한 자격‘으로 중립국감시단 관리 선거에 임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즉,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헌법하의 선거’가 아니라. 기존 체제는 무시하고 새로 선출되는 남북대표들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야한다는 요지가 핵심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휴전후 1954년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에서 북한과 소련이 내놓은 ‘평화통일’ 선전과 너무나 똑같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해마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정전회의에서나, 유엔의 연례행사 한국통일문제 논의에서도 공산측이 애무새처럼 되풀이 떠들어 온 ‘남북동등 총선거 통일론’을 찍어낸 복사판이었던 것이다.그러기에 정부는 지난 2월25일 ‘진보당 불법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정부의 진보당 불법화 이유◀1.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의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법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천명된 바 ”한국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유엔감시하에 민주주의적 선거를 실시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는 우리 민국과 유엔의 입장을 무시하고 북한괴뢰집단과 소련 및 중공이 주장하고 있는 적성국가를 주로하여 구성되는 ’중립국 감시단‘의 감시하에 남북통일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식으로 선언하고 있다.2. 진보당 간부들은 북한괴뢰집단이 밀파한 간첩과 밀사와 파괴공작대들과 항상 접선하여왔다. 진보당은 북한공산당과 접선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한민국의 합법적인 정당으로 서 인정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3. 진보당은 목적 달성의 전단계로서 공산당 비밀당원과 공산당 방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 시켜 그들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기도하여 왔다.
◆중공-북한 ’평화통일‘ 선전공세...KNA 여객기 납치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 검거한 나흘 뒤 2월16일 한국 여객기가 납치되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대한국민항공사(KNA) DC-8형 비행기에는 어린이 등 29명 승객과 승무원 4명이 타고 있었는데 간첩 4명이 조종사를 위협, 평양으로 날아간 사건이다. 미국인 승무원 2명과 독일인승객 2명도 있어 외국 수사기관에도 도움을 요청한 정부는 유엔 안보리에 제소하고 여객기와 탑슬자들의 즉각 송환을 촉구하였다. 공산측은 물론 거부였다.
다음 주 24일 공산측의 요청으로 열린 판문점 제81차 군사정전회의에서는 북한-중공 대표가 중공군이 금년 말까지 북한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했다는 지난 20일의 평양방송 발표를 되풀이 하며 ”이에 맞춰 한국에 있는 미군 및 외국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한 동시에 “전 조선적인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평화통일을 실현하며 남북한의 경제 및 문화교류를 제안한다“고 하였다. 이에 유엔측 수석대표 키스타 미군소장은 공산측의 이러한 제안 이면에는 불순한 동기가 있으며 선전적인 목적을 조성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라고 통박하고 이러한 문제는 군사정전위에서 논의할 성질이 아니라고 일축하였다.공산측 강상호는 ”만약 유엔군이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시종일관 저해하는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이어서 KNA 여객기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들은 척도 아니하였다. ([조선일보] 1958.2.25일자)
★주은래 “미군 철수, ’중립국 감시‘하의 남북한 통일선거 요구정부는 4월3일 미국무성에 각서를 전달한다. ”대한민국은 한국통일을 위하여 실시될지 모르는 유엔감시하에 남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하려는 여하한 제안도 거절한다“는 통고였다. 중공의 주은해가 유엔과 미국에 보낸 각서에서 ”남북한으로부터의 군데 철수와 ’중립국‘ 감시하의 남북통일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한국 각서는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에 유엔 감시하의 선거에 의하여 한반도에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말하고 “대한민국은 이미 유엔의 모든 명령과 규정을 준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다시 유엔 감시하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부언하였다. 대한민국은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통하여 이미 서울에 수립된 입법부에 “북한측 의원들을 위해 비워놓은 의석만 채우는 북한만의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미국 등 한국전 참가 유엔 16개국은 주은래의 각서에 답서를 준비중이었다. 증재자는 이번에도 영국이다.
★중공군, 대만 금문도 포격...이승만, 한-중-월 3국동맹 주창, 파병 제의여름이 되자 중공이 대만 영유 금문도(金門島)와 마조열도(馬祖列島)에 침략 공세를 강화한다. 날마다 포격을 가하면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장세스 대만총통 군은 격렬한 반격을 벌여 국지전이 일어난다. 중공군의 한반도 재침략을 우려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연합참모본부장 유재흥 장군을 대만에 급파하고 ”한국군 파병 용의“를 발표하였다. 동시에 이승만은 ”금문-마조도를 잃게 된다면 그 결과는 공산주의자들이 한국과 베트남을 정복하기 위한 음모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중-월 3국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자유제국의 군사력을 결집, 공산주의를 뿌리뽑을 자유의 십자군을 창설하자고 부르짖었다.”중공군의 북한 철수라는 말은 단지 그들의 목적만을 위한 술책이며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의 민주통일을 고려할 리가 만무하다. 우리의 인방(대만)이 공산화된다면 우리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국가로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육체와 정신으로써 통일을 원하나 타인의 노예가 되는 대가로서는 원치 않는다. 한국통일은 자유세계와 공산주의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투쟁에 직결되어 있다.“ ◆이승만 ”멸공 결의만이 평화유지“ 자유세계에 경고휴전 5주년을 맞은 7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UPI 기자회견에서 말한다.”지금 중동에서 전쟁날까 걱정할 때가 아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지 간에 공산주의와 싸워 멸공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는 공산제국주의 문제인 북한 해방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해야할 필요성을 운명이 결정해 줄 때에는 언제라도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해방을 위하여 싸울 2준비가 되어있다. 다시는 휴전을 맺지않고 적을 압도할 것이다.“이대통령은 우리나에서 과거 5년간 계속되는 휴전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이 휴전협정을 가리켜 ”세계를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만약 한국전쟁이 승리로 귀결되었더라면 동남아와 중동은 더욱 안정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며 우리는 새로운 세계전쟁의 가능성에 당면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이승만 대통령은 중동문제를 맡게 된다면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나의 견해는 이렇다. 자유세계는 그 입장이 무엇인지를 먼저 결정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행하는 것뿐“이라면서 말했다. ”결과를 걱정하는 편이 공산주의자들이 되게 하라. 인류역사를 통하여 이것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선일보] 1958.7.28.일자)
◉잇따른 간첩 침투 교전사건...간첩들 사형도 잇따라그칠 줄 모르는 내우외환에 몸살을 앓는 1958년, 북한이 남파하는 간첩들의 침투-검거사건도 잇따라 일어났다. 신문 사회면에는 동서해안에서 벌어진 간첩선 격침과 사살, 생포 등 뉴스사진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각종 지령을 수행하러 숨어드는 간첩들 중에는 ”신분증 절도전문“ 간첩도 있었다. ”간첩 XXX 사형“이란 제목이 심심찮게 보도되었다. 연말이 다가오는 12월 16일, ‘진보당 사건’의 증거를 제공했다는 박정호 간첩단의 두목 박정호에 대한 사형도 확정되었다. 대법원의 최종심 공판에서 혁신계 근민당 관련자들에겐 모두 무죄가 났다. ”박정호가 간첩인줄 몰랐다“는 진술을 인정한다고 했다. 6.25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포성은 멈췄지만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북한은 판문점에서 소련은 유엔에서 중공은 북경에서 '평화통일' 포탄을 쏘아대고 있으며, 사면초가 대한민국은 김일성의 간첩부대와 싸우면서 '내부의 적'들과 몸싸움을 벌여야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법원, 조봉암에 ”간첩죄 사형” 선고
마침내 진보당사건의 결말이 났다. 해가 바뀐 1959년 2월27일 대법원이 마무리한 것이다.검거로부터 13개월, ‘극좌경력 조봉암 내사’부터 치면 10년을 넘긴 것으로서 6.25후 최대의 국가반역사건이다. <진보당사건 재판진행 경과>◎1958.2.25.=정부, 진보당 등록 취소 불법화. 진보당 불복 소송.◎3.13=진보당사건 첫 공판, 방청객 쇄도 대혼잡에 오후로 연기.◎3.27=진보당사건 2회 공판. 평화통일론 집중 심문. 조봉암 “당론 아니다“ 부인.◎4.3=진보당사건 3회 공판. 조봉암 ’평화통일론은 개인의견‘ 고수.◎6.19=조봉암 최후진술...”정치적 음모이니 할 말 없다“◎7,2=진보당사건 1심 선고. 검찰이 사형 구형한 조봉암-양명산에 징역5년, 17명은 무죄.◎9.4=진보당사건 2심 서울고등법원 첫 공판. 조봉암, 북한과 비밀교류 부인. 양명산, 진술 번복 ”특무대 조작이다“...특무대 ”사형구형 받자 변심“ 반박.◎9.26=진보당사건 변호인들, 재판부 기피 신청. 구형공판 연기.◎10.14=진보당사건, 2심 구형. 조봉암-양명산에 1심과 동일한 사형 구형.◎10.25=진보당사건, 2심 언도공판. 조봉암-양명산 사형 선고. 19명은 무죄.◎12.16=대법원, 간첩 박정호에 사형 확정 선고.◉1959.2.27.=대법원. 진보당사건을 자체 판결. 조봉암-양명산에 사형 선고. ”간첩-국가보안법 위반“ 유죄 대법원 판결문이 밝힌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 이유를 조선일보가 이렇게 보도하였다.”간첩 양명산을 통하여 괴뢰집단의 정보책임자에게 자기 의사를 전달케 하여 정치자금으로 미화 2만7천 달라를 받았고, 괴뢰집단의 지령에 의하여 그 정을 모르는 기타 피고와 진보당을 기망하여 평화통일을 선전함으로써 괴뢰와 야합하였다.“ 그리고 진보당 정강정책에 대하여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며 간부들의 ’평화통일‘ 논의 문제도 조봉암과 달리 언론자유의 한계 내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판결, 박기출 등 15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당내의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 논의는 북한괴뢰집단과의 관련이 인정되지 아니한다. 이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다. 언론의 자유는 성질상 제한은 있을 수 없고 법에 의한 제한만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조봉암 피고인을 제외한 진보당 관계 피고인들은 정부를 잠칭할 목적으로 동당을 구성한 것이라고 인정한 증거가 없으므로...‘ (판결문 인용),요컨대, 대법원은 ’북한과 야합한 주모자‘ 조봉암에게만 사형을 선고하고, 간부들은 조봉암에 기만당한 것으로 보아 정치자유-언론자유를 위해 처벌을 최소한으로 축소한 것이란 취지였다.
★”담배 한 대...막걸리 한잔만 주시오“1959년 7월29일 간첩 양명산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이틀후 31일 오전 11시 서대문 서울형무소 교수대에 또 한 명의 사형수가 올라섰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한다. ”담배 한 대와 막걸리 한잔 만 주시오“ 조봉암의 마지막 말이다.’덜커덩‘ 바닥이 열리자 추락하는 육체, 목을 조르는 오랏줄에 촛불처럼 꺼진 허망한 생명! 20대 청춘에 중독된 공산주의 오랏줄에서 한때 벗어나려 했는지 모르지만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인간의 최후였다. 대한민국은 당시 가장 위험한 반역의 폭탄을 이렇게 제거하였다.사형집행을 보고 받은 이승만이 한마디 했다, ”법대로 잘 처리했군.“
’사법살인‘이라고? 사회민주주의자였다고? 반(反)이승만 세력의 주장들이다.노무현정부때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원회)’의 재심 권고로 대법원의 ‘무죄’를 이끌어내 복권 수순을 밟으면서, ”이승만이 정적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또 다른 ‘누명’을 이승만과 역사의 진실 위에 덮어씌워 왔다. 하기야 대한민국 건국을 파괴하려는 제주4.3폭동을 폭동이 아니라고 기념하고, 그 조종자 박헌영의 처 주세죽까지 상을 주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못하랴. 자, 그러면 뒤늦게나마 김일성의 육성 증언을 들어보자.
◆ 김일성의 증언 ”그의 요청으로 우리가 지원했다“
조봉암이 사형된지 10년후, 북한 김일성이 ”남조선 선거때 우리가 그를 지원했다“고 실토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선거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이고, 그는 조봉암을 가리킨다. 소련서 해제된 이 극비문서는 국민대 선임연구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이 발굴하여 2020년 [주간조선]에 제공한 것이다. 문서내용이 보도되자 1958년 진보당사건 수사당국이 밝힌 혐의사실을 뒷받침하는 중대한 증거가 추가됨으로써, 2011년 대법원이 52년만에 판결을 뒤집은 ’무죄 선고‘를 무효화하고 재심해야 한다는 반응이 나왔다. 문서의 요점만 간추린다.([주간조선] 2020.5.18.)
★김일성 "조봉암이 편지...자금보내 대선 출마-진보당 창당"
1968년 9월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 부의장 드미트리 폴랸스키(1917~2001)가 평양 김일성을 방문했다. 이 대화에서 남한 정세 이야기가 나오자 김일성이 당시 10년 지난 남한의 진보당에 관한 비화를 털어놓는다. 김일성의 회고 요지는 ”북한이 남한에 ‘진보당’이란 ‘합법 정당’의 설립을 지원했고 1956년 남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측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언했다“는 것인데, 모두 ”조봉암의 요청에 의해“ 그렇게 했다고 확언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폴랸스키에게 “그(조봉암)는 해당 임무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정치국에서 이 편지를 토론했고, 다른 동지들을 통하여 그에게 연결체가 될 수 있는 합법 정당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에 맞서 출마한 조봉암 후보가 북한 김일성에게 조언과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북한이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진보당 설립과 조봉암 당선 지원을 결정하여 공작금을 내려보냈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 기록에서 김일성은 “조봉암이 이승만에 맞서 출마하는 데 대하여 의견을 물었다. 우리는 그가 이승만 정권의 장관(농림부 장관)이라면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선거자금을 내려보냈다는 사실도 분명히 기억했다. “남조선 선거 한두 달쯤 지나서, 어쩌면 그 이전에 미국이 우리의 자금제공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수사기록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금 액수는 밝히지 않는다. 김일성은 “그 당(진보당)의 당원이 1만여명”이라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 당원 숫자는 조봉암이 옥중에서 북한 자금책 간첩 양명산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비밀쪽지에서 확인된다. 즉, 조봉암은 “당신의 말 한마디가 나와 우리 1만여명 당원동지들의 생명에 관계되니 결사적으로 부인하시오”라고 쪽지에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문서에서 김일성은 조봉암의 낙선에 이은 사형까지 언급하면서 실망을 드러내고 있다.“보시다시피 우리와 가까운 남조선 사람들을 높은 직위에 출마시켰던 경험은 결국에는 부정적으로 끝나고 말았다”고 한탄하는 대목이다. 이에 소련 폴랸스키는 “이 분야에 당신들의 행동은 완전히 옳았다. 이렇게 큰 사업에 실패가 있을 수도 있잖으냐”고 위로하기도 한다.
▶2011년 대법원은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그 잘못을 바로 잡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무엇을 근거로 ‘무죄로 밝혀졌다’는 것일까. 대한민국 건국전후 지금까지 남한에서 조직된 좌익정당(공산당)들은 반드시 소련과 북한의 ‘민주주의통일전선’ 공산화용 그물망이 아닌 것이 없다. 공산주의도 모르고 공산주의 역사도 모르고 남북한 이념전쟁 체제전쟁에도 눈감은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 존재이유가 무엇인가.죽어서 반세기만에 ‘무죄’가 된 조봉암의 망우리 묘역은 즉시 대대적인 개보수를 진행, 어느 대통령 묘역 못지 않다고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당선 직후부터 내리 3년간 조봉암 기일마다 조화를 보냈다. ([주간조선] 앞의 기사).대한민국 국민들은 과연 사법부를 최후의 수호자로 믿고 살수 있겠는가. 법의 정의는커녕 역사의 파괴자로, 정치의 시녀로 농락당하기 싫거든 지금 ‘진보당사건’만이라도 진실의 모습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무덤 속의 김일성이 웃고 있지 않는가. <계속>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5/02/19/20250219002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