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들 담은 군소리
한나라 정신 핑계로 권세‧재물만 추구한 팽양
결국 내부총질 끝 저세상… 팽양 교훈 깨닫길
수틀리자 내부총질하다 삭발형
예나 지금이나 “망해가는 세력‧가치를 되살리자”며 의기투합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대의(大義)를 외치면서 이를 오로지 제 사리사욕(私利私慾)에만 이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로 잘 알려진 촉한(蜀漢)은 한(漢)나라를 계승한 국가다. 많은 사람이 유비(劉備)를 따라 죽을 고생하며 파촉(巴蜀‧익주) 땅까지 이르러 세운 나라다.
유비 휘하 일동은 400년 전 일개 촌부로 시작해 지존(至尊)의 자리에 오른 한고조(漢高祖)의 애민(愛民)정신 계승을 주장했다. 또 겉으론 왕도(王道)를 따르는 척 하면서 서주대학살 등을 일으킨 조조(曹操) 일가의 위(魏)나라를 척살하자 촉구했다.
촉한 구성원 중에는 팽양(彭羕‧생몰연도 ?~?)이란 인물이 있었다. 정사삼국지 촉서(蜀書)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등에 따르면 그는 한나라 황족으로서 유비에 앞서 파촉에 둥지 틀었던 유장(劉璋)을 따랐다. 그러나 중용되지 못하고 말단 9급 공무원 쯤에 머물렀다.
이에 팽양은 유장을 공공연히 비방하다가 고발당해 상투가 잘리는 형을 받았다. 고대~근세 유교(儒敎)사회에서 양인(良人) 이상 신분이 바리깡으로 머리에 고속도로 닦인다는 건 중형에 속했다. 팽양이 겉으론 한나라를 찬양하는 척하면서 얼마나 사리사욕에만, 그것도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의 방식으로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한나라 정신은 곧 십상시 정신” 제멋대로 왜곡
유장에게 앙심 품은 팽양은 유비 측과 은밀히 접촉했다. 그는 유비가 유장 지원을 위해 군사 끌고 오자 유비의 참모 방통(龐統) 막사를 찾아갔다. 말이 유장을 도와 오두미교(五斗米敎) 교주 장로(張魯)를 치러 가는 것이지, 사실상 유장 안방 즉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셈이었던 방통은 팽양 등의 내응이 절실했기에 즉각 밀약 맺었다.
유비 측의 북벌(北伐) 대강은 다음과 같았다. 유비는 파촉에 들어앉아 병마(兵馬)를 기른다. 관우(關羽)는 형주(荊州)에서 마찬가지로 병마를 조련한다. 그러다가 명목상 한나라 충신 조조에게 억류돼 찍소리 못하는 한제(漢帝) 유협(劉協)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날 구하러 오라” 황명 떨어지면, 비로소 역적토벌 명분 얻은 유비‧관우가 동시에 출격해 두 서울인 장안(長安)‧낙양(洛陽)을 공략하고 한나라를 재건한다.
파촉에 도착한 유비는 장로를 공격하는 척만 하면서 현지 민심얻기에 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장을 무너뜨리고 익주(益州) 주도(州都) 성도(成都)에 입성했다. 팽양은 “내 비록 황족 유장을 저버렸으나 그래도 같은 황족 유비를 따랐으니 역시나 한나라의 충신이다” 취지로 주장했다.
허나 팽양은 유장 휘하 시기 때처럼 한고조의 애민정신 등이 아닌 잿밥 즉 후한(後漢) 말의 권력암투‧부정부패에만 관심 있었던 듯하다. “자고로 우리 한나라는 십상시(十常侍)처럼 조정을 주물럭거리고 은행통장이 빵빵해져야 제 맛이지. 그것이 한나라의 정신, 보수의 가치 아니겠니? 난 그 숭고한 이념 지키련다” 식으로 유비의 대의를 자의적(恣意的)으로 왜곡하면서 말이다.
팽양은 파촉 관리 임용권을 쥔 치중종사(治中從事)에 임명됐으나 하늘 찌르는 권세에도, 억대에 이르는 연봉에도 만족할 줄 몰랐다. 어떠한 월권‧비리를 저질렀는지 상세기록은 없지만 제갈량(諸葛亮)은 “야심이 큰 자이니 편히 쓸 수 없습니다” 유비에게 고언했다. 유비도 팽양을 두고 촉한을 내부에서 갉아먹을 위험분자라 여겼다. 결국 팽양은 강양태수(江陽太守)로 좌천됐다.
수틀리자 내부총질 2탄 하다 저승으로
그렇게 되자 팽양은 비로소 내부총질 그리고 탈당이라는 본색(本色) 또다시 드러냈다.
당시 유비 진영에는 서량(西凉)의 맹장 마초(馬超)가 몸담고 있었다. 마초를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중 하나로 묘사한 삼국지연의 영향으로 마초는 흔히 유비 직속부하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립군벌 출신이었던 마초는 실상 객장(客將)에 가까웠다.
유비의 입촉(入蜀) 과정에서 그에게 투항한 마초도 처음엔 자신을 유비와 동급으로 생각했다. 마초는 유비를 주공(主公) 또는 유황숙(劉皇叔)으로 호칭하는 대신 자(字)를 붙여 유현덕(劉玄德)으로 불렀다. 고대~중세 동아시아에서는 허물없는 친구 사이에서나 상대를 자로 부를 수 있었다.
노한 관우‧장비(張飛)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서역 오랑캐’를 참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어느 날 마초가 유비를 보러 오자 날이 시퍼런 칼을 찬 채 유비 좌우에 시립(侍立)했다. 놀라 자빠진 마초는 “주인의 자를 함부로 부르다가 하마터면 저들에게 죽을 뻔 했구나” 식은땀 흘리며 유비를 주인으로 대했다.
팽양은 이러한 마초도 자신처럼 유비에게 원한 품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나 이는 속 좁은 소인배 팽양의 착각이었다.
팽양이 “당신은 바깥(군사)을 맡고 나는 내부(내응)를 맡으면 (촉한의) 천하는 충분히 평정되지 않겠나” 폭탄제안 즉 반란제안 하자 마초는 그 길로 유비에게 고변(告變)했다. 즉각 투옥된 팽양은 제갈량에게 보낸 서한에서 “내 실언(失言)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뒤늦게 변명하며 눈물 짜다가 37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보수팔이 그만하고 나가서 유유상종하길
보수정당 정체성이 희미해진지 오래라는 지적이 많다. 제 의무가 뭔지는 망각한 채 보수의 이름 앞세워 오로지 제 사리사욕만 챙기려는 군상(群像)들, 제 뜻대로 안 돼 수틀리면 내부총질만 하는 종자(種子)들 난무한다는 비판이다.
정작 이들에겐 뚜렷한 정치철학이 없다. 직장이 어디인지 본업이 뭔지도 모를 이들에게 보수의 가치가 뭐냐 물어보면, 고급 외제차 어루만지며 “그야 계파싸움에 이기고 이미 많은 재산 더 많이 불리는 거지” 따위의 대답이나 돌아온다.
왜 대한민국은 보수이념을 필요로하는가에 대한 설득 노력, 어떻게 하면 보수이념이 보다 더 많은 소득계층·유권자 만족시킬 수 있을까 식의 고민‧연구라곤 개미 소변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니 중산층 이하 일반대중 민심(民心)은 보수정당으로부터 떠나간다. 비단 보수정당뿐만 아니라 자칭 진보정당도 비슷한 현상이긴 마찬가지다.
정치의 최대 궁극적 목표는 민생(民生)이다. 이념은 이를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 이념을 핑계로 목표를 망각하는 주객전도(主客顚倒)는 안 된다.
그러한 정체불명 객반위주(客反爲主) 사이비 사상가들은 하루빨리 인간이 되거나 소위 제3지대로 모여 (물론 모든 제3지대 인사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만의 리그, 이전투구(泥田鬪狗)나 즐기길 바란다. 차라리 그러한 투견으로나마 국민에게 구경거리 주는 역할이라도 하길, 최소한의 밥값은 하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