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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일생에 ‘두 번 즉위한’ 노예 황제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군소리

환관에 놀아나다 토목변으로 거듭난 주기진

용산, 정략 아닌 진심으로 혁신에 노력하길

 

아마추어 황제와 셀프분리의 환관

 

예나 지금이나 일국(一國)의 지도자가 적에게 목숨 잃거나 포로가 되는 사례는 흔치 않다. 현대 들어선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도가 있다. 중세에는 명(明)나라의 6대 황제 정통제(正統帝) 주기진(朱祁鎭‧생몰연도 서기 1427~1464)이 있다. 주기진은 내부의 간신들에게 농락당하다가 변을 겪었다는 점에서 특히 희귀한 케이스다.

 

주기진은 부황(父皇)이 일찍 사망하자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즉위했다. 당초 그는 할머니이자 섭정(攝政)이었던 태황태후(太皇太后) 장씨(張氏)의 보살핌을 받았다. 양명(楊榮)‧양사기(楊士奇)‧양부(楊溥) 등 이른바 삼양(三楊)이라 불린 노신(老臣)들도 어린 천자를 보필했다.

 

그러나 연로했던 조모(祖母)와 세 명의 충신이 숨 거두자 그간 숨 죽였던 간신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환관 왕진(王振)이 대표주자였다.

 

왕진은 당초 초야(草野)의 서생(書生)이었다.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立身揚名)하려 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자 진로를 바꿔 내시로서 출세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리곤 스스로의 심볼을 제 손으로 제거(!)해버렸다. 환관이 적성에 맞았는지 내시 공채에 합격한 그는 환관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프로페셔널 환관으로 이름 떨쳤다.

 

머나먼 한(漢)나라 때부터 역대 황제들은 외척(外戚)‧권신(權臣)세력 견제를 위해 환관무리의 힘을 키워주곤 했다.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황제들은 때로는 외척 등의 손 들어주고 때로는 환관들의 손 들어주며 양 세력 간 힘의 균형을 슬기롭게 도모했다.

 

허나 철부지 주기진에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1442년 태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왕진은 어린 천자에게 접근해 능수능란히 갖고 놀며 사례감태감(司禮監太監) 지위에 올랐다. 왕진은 15세로서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인 주기진에게 “폐하께선 만인지상(萬人之上)이시니 온 천하가 황상의 것이옵니다. 자고로 즐길 건 많고 생은 짧은 법. 내치(內治)는 소인에게 맡기시고 폐하께선 마음껏 향락을 누리시옵소서” 꼬드겼다. 주기진은 정말로 옥새(玉璽)를 떠넘기다시피 했다.

 

황제를 갖고 논 셀프제거 환관

 

스스로 남성성을 떼버린 울분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왕진의 전횡(專橫)은 어마어마했다. 그는 우선 무엄하게도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어딘가가 허전한 놈들은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고 써넣어 궁문(宮門)에 세웠던 철패(鐵牌)를 때려 부셔버렸다.

 

왕진의 농단에 걸림돌이 되는 충신들도 대부분 숙청됐다. 유구(劉球)란 이가 주기진에게 상소 올려 친정(親政)을 촉구하자, 왕진은 유구를 악명 높은 금의위(錦衣衛)에 보내 모진 고문 끝에 죽게 했다. 금의위는 주원장이 만든 황제 직속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다른 선비는 왕진에게 무릎 꿇는 걸 끝끝내 거부하다가 객사(客死)하라는 의미로 귀양에 처해졌다. 다른 선비는 왕진이 가노(家奴)처럼 부리던 한 환관을 꾸짖었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간신들은 중용됐다. 한 신하는 심볼이 건재함에도 수염이 빈약했다. 이에 왕진이 동질감 반 열등감 반으로 “왜 그 꼴이냐” 비웃자 해당 신하는 “옹부(翁父‧왕진)께서 수염이 없으신데 소인이 어찌 감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꼬리 치며 아첨했다.

 

부정축재(不正蓄財)도 빠질 수 없었다. 왕진은 이 범죄행각을 국제사회 단위로 거하게 해먹었다.

 

1449년 몽골계 부족 오이라트(Oirat)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Esen Taishi‧1407~1454)는 명나라에 조공(朝貢)하면서 그 양을 부풀렸다. 조공이라 하면 흔히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일방적으로 진상하는 걸 떠올린다. 허나 실상은 조공하는 측이 ‘남는 장사’였다. 조공 받는 쪽은 체면이 있기에 원칙상 몇 배의 보화(寶貨)로 화답해야 한다.

 

때문에 우리 고려‧조선 사절단도 각각 송(宋)‧명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반강제’로 진상하고 줄기차게 뜯어먹었다. 참다못한 서긍(徐兢)이란 송나라 사람은 “그만 좀 와 주세요” 눈물 터뜨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여진(女眞)‧류큐(琉球) 등도 조선에 열심히 진상해 조정이 뒤집어지게 했다고 한다.

 

아무튼 에센 타이시도 이러한 음흉한 목적으로 진상품 목록을 손질했다. 왕진은 그래도 국정(國政)책임자랍시고 이 간계를 알아챘다. 그리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우라질 놈” 훈계하며 국고(國庫)에서 소액만 꺼내 하사토록 했다. 기록에는 명확치 않으나 왕진 성격이라면 장부를 조작해 오이라트엔 100원 줬다고 써넣고 실제론 20원만 준 뒤 나머지 80원은 제 주머니에 착복(着服)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위기 닥치자 “무능한 황제 때문”

 

사달은 벌어졌다. 껌조차 못 사먹을 푼돈 받아든 공문서위조범 에센 타이시는 “내게 이런 건 네놈이 처음이야” 부들부들 떨며 군마(軍馬) 이끌고 명을 쳤다.

 

발등에 불 떨어진 왕진은 마치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듯 주기진에게 친정(親征)을 요구했다. “기진이가 패하면 그 놈 때문에 나라에 환란이 닥쳤다 몰아세우고 황제를 갈아치운 뒤 그 난리통에 내 국고횡령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덮어버리자”는 의도로 말이다.

 

당연히 조정엔 난리 난리 난리숑 벌어졌다. 이전에도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같이 친정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전군(全軍) 지휘관이 딴 마음 먹으면 끝이기에 황제가 직접 군을 이끌어 반란을 예방하고 나아가 장졸들 사기를 올리는 건 나쁠 것 없었다.

 

문제는 주기진은 음주가무에만 정통할 뿐 병학(兵學)이라곤 근처에도 안 가봤다는 것이었다. 황제라는 구심적 존재가 변고라도 당하면 명나라는 최악의 경우 망국(亡國) 위기까지 처할 수 있었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화들짝 놀라 “아니 되옵니다” 바짓가랑이 붙들었으나 죽을 귀신이라도 씐 건지 주기진은 말 등에 올랐다. 그가 소집한 병력은 ‘50만’에 달했으나 상당수는 장부상에만 존재하는 유령군대일 뿐이었다. 이에 창칼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는 문신(文臣)‧백성 등을 어거지로 끼워 넣어 머릿수를 맞췄다. 왕진의 천권(擅權) 아래 나라살림 넉넉할 리 없었기에 부족한 치중(輜重)으로 행군 도중 굶어 죽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당연히 오이라트군과 맞붙은 명군은 견(犬)박살이 났다. 모두가 우려한 대로 무려 황제 주기진이 에센 타이시에게 ‘사로잡히는’ 토목의변(土木之變)도 벌어졌다. 왕진은 “계획대로”를 외쳤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그간 조정 곳곳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샤이충신들은 “모든 건 폐하가 아닌 왕진 저 놈 때문이다” 이를 갈았다. 스스로 중요한 걸 분리시켜 버리기까지 했던 표독한 왕진은 번충(樊忠)이라는 장수의 철퇴세례 아래 그 간사한 생을 마감했다.

 

“두 번의 토목변은 없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랄까, 에센 타이시는 주기진을 죽이진 않았다. 죽이진 않고서 주기진에게 “우리가 더 진상한다는 이 문서에 도장 찍으쇼” 을렀다. 죽이진 않겠다는 약조에 주기진은 비로소 안도했다. 몽골 황금사(黃金史)에 의하면 물론 해치지만 않았을 뿐 명나라 황제인 주기진을 ‘노예’ 취급하는 등 엄청난 모독을 가했다.

 

그 사이 명 조정에선 병부시랑(兵部侍郞‧국방차관 격) 우겸(于謙) 주도 하에 생사불명 주기진 대신 그의 이복동생 주기옥(朱祁鈺)을 새 황제 경태제(景泰帝)로 옹립했다. 오이라트가 기대했던 대혼란은 없었다. 주기진이 서명한 문서도 무용지물이 됐다. 그러자 에센 타이시는 돌연 주기진을 석방했다. 명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병립(竝立)하게 함으로써 내전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주기옥은 살아 돌아온 못난 이복형을 태상황(太上皇)에 봉한 뒤 연금(軟禁)에 처했다. 이복조카도 폐태자(廢太子)하고 제 아들을 새 태자로 세웠다. 수년 뒤 주기옥이 중병에 걸리자 주기진은 1457년 친위세력 모아 탈문의변(奪門之變) 일으켜 이복동생을 퇴위시키고 새로이 천순제(天順帝)로 등극해 전무후무한 ‘중임(重任) 황제’가 됐다.

 

황제로서 아니 인간으로서도 어마어마한 치욕 겪었던 주기진은 늦게나마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는 탈문의변에서 공 세운 환관 조길상(曺吉祥)과 석형(石亨) 등이 제2의 왕진이 될 조짐 보이자 그대로 일족을 멸했다. 이현(李賢) 등 능신(能臣)들을 가까이 하는가 하면 밤낮으로 정무 돌봤다. 몽골족의 원(元)나라 때 부활해 자신의 치세(治世)까지 남아 있었던 순장(殉葬) 등 악습도 폐했다. 이후로 순장은 대륙에서 자취 감췄다.

 

‘용산’이 뒤늦게 자정(自淨) 노력에 나선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여당 내에서 나온다. 특정계파 등에 대한 ‘용퇴‧험지출마’ 요구가 권고로만 끝나고 여당 지도부도 이를 간단히 물리쳤다는 점에서 용산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또 의지는 어느 정도인지 더 지켜봐야겠으나, 주기진의 전례를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간 주변을 둘러쌌던 그릇된 인(人)의 장막을 걷어내야 혁신도 가능하다. 용산이 이를 깨닫고 있다면 환영할만한 일이다. 단순 의지로만 끝나선 안 된다. 이미 용산은 토목의변 전조(前兆) 연상케 하는 저조한 지지율 등 맞은 지 오래다. 실제 노력에 매진하는 한편 정략(政略)이 아닌 ‘진심’으로서 그간 소외됐던 이들에게 다가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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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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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영도위원회

    역사에는 대월(大越)의 두자평(杜子平)같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겨 주군인 예종황제(睿宗皇帝)를 적진에 나아가 죽게 만든 간신도 있었는데 이번 험지출마론을 두고 국민의힘이 두자평같은 인물들만 모아다가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본 바, 앞으로 당에 혁신의 바람이 불지, 그냥 그대로 정체된 당으로 남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이 듭니다.

  • 국가영도위원회
    오주한
    작성자
    2023.11.10
    @국가영도위원회 님에게 보내는 답글

    여의도에서 보고 듣고 한 게 있어 할 말은 많지만, 다른 의도는 없길 바라며 혹 있다 해도 중단하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