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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시진핑 김정은이 가장 놀랐을 것 … 대외 노출 대폭 줄일 듯

뉴데일리

■ AR-15에서 K-2 소총까지

[트럼프 신드롬]을 만든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을 보면 미국도 허점이 많은 나라란 것이 발견된다. 범인인 토머스 매튜 크룩스 가 사용한 총이 AR-15이다. 미군은 이 총을 제식용으로 선택해 M-16으로 명명했다. 사건을 분석하려면, 그 분야에 대한 상식부터 알아야 한다. AR-15와 M-16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의 엉성함을 살펴보자.

AR-15(M-16) 소총 특허권은 미국 <콜트>가 갖고 있었다. 이 특허권은 1979년에 만료됐다. 때문에 각국은 M-16을 모방한 소총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소총의 대표가 대한민국 남성이 군에 가면 소지하게 되는 K-2 이다. K-2는 라는 국내 기업이 양산하고 있다.

<콜트>는 1855년 미국의 새뮤얼 콜트(Samuel Colt, 1814~1862)가 세운 총기 회사다. 이 회사의 최고 명품이 AR-15 소총과 리볼버 권총이다. 리볼버 권총은 유럽에서 먼저 개발됐지만, 성능 좋은 리볼버는 새무얼 콜트가 만들었기에 [리볼버 권총=콜트 권총]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졌다. <콜트>는 소총에도 전문성이 강한 회사였지만, AR-15를 개발하진 못했다.

AR-15는 제2차 세계대전에 항공기 무장사로 참전했던 유진 스토너(Eugene Stoner, 1922~1997)가 항공기 제작사 <페어차일드>가 1954년 세운 <아말라이트(AmaLite)>에 들어가 개발한 것이다.

■ M-1 소총의 문제점

미군의 무기 발전사에서 6·25전쟁과 월남전쟁은 2차대전만큼이나 변곡점이 된다. 6·25전쟁 때 미 육군 장병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유진 스토너처럼 M-1 소총을 사용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노먼 히치맨이 중요한 통계를 잡아냈다.

소총에는 [유효사거리]와 [최대사거리]가 있다는 것은 잘 알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M-16(또는 K-2)의 최대 사거리는 2,500여m이고 유효사거리는 450여m란 것도 어슴프레 떠오를 것이다(정확하게 기억할 필요는 없다). 골프를 치는 이라면 450여m이면 [파 5] 거리이고, [파 5]의 티박스에서는 450여m 떨어진 그린의 [핀(깃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조준경을 달지 않은 소총으로는 450여m 떨어진 표적을 맞출 수 없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다.

소총의 탄알은 450여m를 똑바로(유효하게) 날아갈 수 있지만, 맨눈으로는 그 거리에 있는 표적을 찾아내지 못하니 유효사거리 450여m는 [사족(蛇足)]처럼 필요 없는, [넘치는 성능]이 된다.

■ AR-15의 탄생

M-1의 유효사거리와 최대사거리는 더 멀었다. 이렇게 필요 없는 성능을 갖고 있었으니, M-1은 크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때의 한국 남성은 크지 않았다. 작은 이들에게 M-1은 버거운 소총이었다. 그런 총을 들고 미군과 한국군은 북한공산군·중국공산군과 맞서 싸웠다.

교전 분석을 한 히치맨은 실전에서 병사가 소총으로 표적을 맞히는 거리는 [300야드(약 270m)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등이 아닌 일반 사수가 맨눈으로 소총을 쏴, 표적을 맞추는 것은 [100야드(약 91m) 정도]란 것도 밝혀냈다. 사격 훈련을 받은 병사라면 100 야드 이내의 표적은 얼추 맞추지만, 100 야드를 벗어나면 현저히 명중률이 떨어졌다. 300 야드부터는 홀인원처럼 [운(運)]으로 맞추니, 히치맨은 소총의 유효사거리를 길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에 주목한 유진 스토너는 유효사거리와 최대사거리는 물론이고 무게도 현저히 줄이는 대신 300 야드 이내에서는 명중률은 훨씬 더 높인 AR-15를 개발했다. <아말라이티>는 이 소총 마케팅에 실패했다. 그리고 회사 재정이 나빠지자, 1959년 이 소총에 대한 모든 권리를 <콜트>에 팔아버렸다.

■ M-16 국내생산을 주도한 박정희

<콜트>는 이 소총을 미 육군이 사용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전통적인 것, 무거운 것을 좋아하는 미국인 습성 탓인지 미 육군은 M-1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 것.

기회는 변화가 있을 때 뚝심 있는 인물이 등장해야 생긴다. 미 공군은 2차 대전을 끝낸 1947년 미 육군 항공대가 독립해서 만든 것이다. 공군 기지는 육군이 지켜주는 아군 지역에 있으니, 공군 장병은 굳이 무거운 소총을 들고 기지를 지킬 이유가 없다.

이에 주목한 이가 맥아더처럼 파이프를 물고 다녔고 [무쇠 엉덩이(Iron-ass)], [쇠바지 영감(Old Iron Pants)] [악마(The Demon)] 등으로 불렸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1906~1990) 공군 참모총장이었다. 르메이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강경 노선을 주장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과단성이 있었던 그가 1963년 미 육군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며, AR-15를 공군 제식용 소총으로 선택해 M-16으로 부르게 했다.

르메이가 공군 총장을 할 때의 미국 국방부장관은 냉철한 경영인 출신의 맥나마라였다. 맥나마라는 2차 대전 때 미군이 사용한 폭약량 대비 사살된 적군 수 비율을 월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약량 대비 사살된 적군 수 비율과 비교해, [월남전에서 훨씬 더 많은 폭약을 사용했는데 왜 전과는 적냐]고 따졌던 인물이다.

지금 말로 하면 [가성비]를 살폈던 것. 이러한 맥나마라가 공군의 선택에 주목해 육군도 M-16을 도입하게 했다. 미 육군은 월남전을 하며 M-16을 공급받았다. 가볍고 잘 맞고 자동으로 하면 연사(連射)도 가능한 M-16은 정글이 많은 월남에서 호평을 받았다. 이때부터 공산권에선 AK-47, 자유 진영에서는 M-16이 블록을 대표하는 총기가 됐다.

M-1을 들고 월남에 갔던 한국군도 미군으로부터 M-16을 받아 사용하면서, M-16 신드롬에 빠져들었다. 1964년 월남에 파병했던 우리는 1973년 철수했는데, 철수 직전인 1971년 박정희 정부가 [당차게] M-16 국내 생산을 추진했다. 1971년 4월 22일 정래혁 국방부장관으로 하여금 멜빈 레어드(Melvin Laird) 미 국방부장관을 만나 양해각서를 맺게 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병을 했으니 우리도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고 다그쳤기에, 국방부는 이런 결과를 받아낸 것이다. 이 각서에 [한국 정부는 자루당 7 달러의 로열티를 내고 M-16을 생산하게 한다, 한국은 이러한 M-16을 제3국에 수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다. 국방부는 부산조병창에서 M-16을 생산하게 했다.

1979년 AR-15 특허가 만료되자, 미국에서는 <콜트> 외에도 <부시마스터>, <올림픽 암스>, 사 등이 자기식으로 AR-15을 만들어 민간에 판매하게 됐다. 1981년 전두환 정부는 부산조병창을 민영화해 [세계의 대우]를 외치며 수출에 전력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에 넘겨 <대우정밀>을 만들게 했다.

■ 김우중 대우회장의 혜안

맥나마라의 예에서처럼 기업인은 생각하는 게 달랐다. <대우정밀>은 특허가 만료됐으니 <콜트>에 [더 이상 로열티 지급은 없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사달이 일어났다. 로열티는 부산조병창을 운영하는 한국 정부가 <콜트>가 아니라 미 정부(미 국방부)와 외교 문서(양해각서)로 약속한 것이었다. <콜트>는 외교적 약속은 특허 만료와 무관하니 <대우정밀>은 계속 로열티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우중 회장의 움직임은 그보다 빨랐다. 그는 M-16의 특허가 끝났으니 우리는 수출해도 된다고 보고, <대우정밀>이 생산한 M-16을 <콜트 >의 M-16보다 싸게 인도네시아로 수출하게 했다. 이것이 외교문제가 돼 미국 상원 국방위는 청문회를 열어, [왜 한국이 각서를 어기고 제3국에 M-16을 수출하게 됐느냐]고 따졌다.

<대우정밀>의 대응도 빨랐다. 그렇다면 한국형 M-16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채택한 것. 그리고 바로 K-2를 개발했다. K-2는 한국인 체형에 맞게 더 가벼웠다. 국산인 데다 <콜트>의 특허는 만료됐으니, K-2는 여러 나라에 수출돼 K-방산 수출의 효시가 됐다.

1997년 IMF외환 위기가 일어나자 대우그룹이 와해됐다. 2006년 <대우정밀>은 컨소시움에 인수되고, 2012년 방산 분야가 가 되었다. 는 대포가 아닌 총기에서는 지금 국내 최고 최대의 방산업체로 있다.

■ AR-15가 곧 M-16

그러는 사이 총기 소지가 자유인 미국에서는 많은 AR-15가 퍼져나갔다. 반면 <콜트>는 새로운 명품을 내놓지 못했기에 크게 쪼그라들었다. AR-15 보급이 많아진 만큼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2022년 하이랜드파크 총기난사 사건과 롭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2020년 위스콘신 흑인 총격 사건 등등이 그것인데, 2012년부터 2022년 사이 미국에서 AR-15 난사로 죽은 민간인은 163명, 부상자는 595명이었다.

사건 당시의 동영상 등을 보면 트럼프를 저격한 크룩스의 AR-15에는 홀로그램 조준경이 달려 있었다. 이 조준경은 대한민국산(産)일 가능성이 높다. E기업이 생산하는 홀로그램 조준경은 한때 인기를 끌어 수출도 많이 됐기 때문이다.

■ AP와 뉴욕타임스 기자의 기막힌 사진크룩스는 이 소총을 들고 트럼프가 연설한 연단에서 12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공장의 지붕으로 기어올라갔다. 문제는 이 공장이 경호작전 지역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누구든 공장에 접근할 수 있었고 무슨 짓을 해도 막지 않았다.

120여m면 사격훈련을 받은 병사가 충분히 표적을 맞출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크룩스의 AR-15에는 홀로그램 조준경까지 달려 있었으니, 지붕 위의 그는 저격수처럼 흔들림이 적은 엎드려 쏴로 정확한 사격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얼굴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트럼프는 정확히 얼굴이 피격돼 숨졌을 것이다. 얼굴을 돌린 덕에 오른쪽 귀로 탄을 맞은 것은 기적이었다.

사건 당일 AP 통신의 에반 부치(Evan Vucci) 기자는 성조기 아래에서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연단을 내려오기 직전의 트럼프가 핏줄기가 흐르는 얼굴로 주먹을 쥐고 [파이트(fight)]를 외치는 역동적인 장면을 찍었다. 2003년 이라크 항구적 자유 작전의 성공으로 아들 부시 대통령이 바그다드를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 이집트 국적의 한 기자가 부시 대통령을 향해 신발을 던졌다. 부치 기자는 그 장면을 찍어 유명해졌다. 그런데 또 역사적인 사진을 찍은 것이다.

반면 뉴욕타임스의 더그 밀(Doug Mills) 기자는 트럼프 귀를 찢고 트럼프 뒤로 날아가는 탄흔을 찍었다. 이 사진은 크룩스의 사격이 정확했음을 보여준다. 크룩스 사격 직후 경호 요원들은 서로 통신하며 바로 공장 지붕에서 쏘는 크룩스에 주목했다.

요인이 오는 현장에서 가장 높은 곳엔, 항상 저격수 팀이 올라가 있다. 이 저격수 팀이 크룩스를 향해 조준사격을 해 절명케 했다. 저격수 팀이 있는 곳과 트럼프가 있던 연단, 그리고 크룩스가 올라간 공장 지붕은 삼각형을 이뤘다. 크룩스는 트럼프만 집중해서 보고 있었고, 저격수팀은 그런 크룩스를 바로 겨냥할 수 있었다. 크룩수와 저격수 팀은 마주 보고 사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암살의 국제정치학 시대, 다시 열리는가트럼프 암살 미수로 드러난 가장 큰 허점은 [왜 미국 경호 기관은 소총 유효사거리 안쪽인 연단에서 120여m 떨어진 건물을 경호작전 지역에서 제외했나]이다. 이 문제는 경호실이 아니라 외곽 경호를 맡았을 그 지역 경찰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랬기에 크룩스는 AR-15를 숨길 수 있는 기는 자세로 지붕에 올라 엎드려 쏴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가 숨졌으면 국제정치는 춤췄을 것이다. 그가 작은 부상만 입고 살았기에 세계정치는 또 요동칠 것이다. 이 사건 직후 대한민국 방산 주가가 급등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스트롱맨인 푸틴과 시진핑, 그리고 김정은은 경호를 강화할 것이다. 그런만큼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 큰 대결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병합지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암살됨으로써 일어났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당시 유럽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 협상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암살로 두 세력이 동맹 의무 이행을 위해 참전함으로써 제1차 셰계대전이 일어났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은 나토와 러시아로 정확히 양분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담에 초청받고 푸틴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편가르기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나토를 이끄는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VIP가 암살되는 테러가 일어난다면, 블록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해야(Think the Unthinkable) 한다. 암살의 국제정치학을 생각하며 한반도 안보 지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다음에 계속>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7/16/20240716002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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