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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내가 끝낸다“ 아이젠하워 등장...”전쟁 끝내면 안돼“ 몸부림치던 스탈린 급사...베리야의 독살설...이승만, 30년 숙적에 고별사

뉴데일리

아이젠하워가 한국에 왔다.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당선자‘ 자격이다.1952년도 저무는 12월2일 저녁 7시57분, 영하12도의 찬바람이 부는 수원 공군기지에 미공군 4발기 2대가 착륙한다. 최고 극비의 방문이므로 환영객도 없고 기자들도 수행기자들 뿐이다.뉴욕을 출발, 하와이-미드웨이-웨이크-유황섬 등 1만7천3백여㎞를 날아온 검은 그림자들이 무장경호원들의 안내로 군용 세단에 올랐다. 갈색 털 코트 차림의 아이크(아이젠하워의 약칭)는 브래들리 합참의장, 국방장관 내정자 윌슨(Charles E. Willson) 등과 함께 얼어붙은 시골길을 달려 서울로 들어와 미8군사령부로 직행하였다. 현재 서울 대학로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와 학교건문들이 8군주둔지였다. 도쿄에서 날아온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밴플리트 주한 미8군사령관의 영접을 받은 아이크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장 “한국전쟁은 내가 끝낸다”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에 가겠다. 한국전쟁은 내가 끝낸다”아이젠하워의 대선 공약이다. 지리한 전쟁에 염증을 내던 미국민은 압도적 표를 던졌다. 아이크가 대통령 취임식 한 달 전에 서둘러 한국전선으로 날아온 까닭이다. 1952년 11월4일 치러진 미국 대선은 미국에도 한국에도 중요한 역사적 갈림길이 된다.유럽연합군사령관이던 세계2차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와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1994) 공화당 러닝메이트가 민주당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E. Stevenson II, 1900~1965)과 존 스파크먼을 꺾고 미국 제34대 대통령과 36대 부통령으로 등장한다. 이로써 1932년 이래 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은 막을 내렸으며 교착상태의 한국전쟁 휴전협상도 종막을 고할 인물을 만났다.

★아이크 외아들 참전...밴플리트도 ’외아들‘을 한국전선에 바치다이튿날 군복으로 갈아입은 아이크는 클라크와 밴플리트의 보고를 받고 전선으로 달려가 미군부대와 실전 현황을 살펴보았다. 클라크의 회고록엔 아이크 부자의 기록이 보인다. 첫날 밤 8군사령부에 도착한 아이크가 아들부터 찾았다고 썼다. “존은 지금 어디 있는가?” 존(John Sheldon Doud Eisenhower,1922~2013)은 육군소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여 대대장으로 복무 중,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와 아버지와 잠시 만났다. 오랜만에 부자의 정을 나눈 아이크는 “부대를 오래 비우면 안된다”며 아들의 귀대를 재촉했다고 한다. (클라크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From the Danube to the Yalu] 1954). 그러나 이날 존을 아이크와 면담시킨 밴플리트는 지난 봄 4월 자신의 외아들 제임스(James van Fleet Jr. 1925~1952)를 잃어버린 참이었다. 아버지가 미8군사령관이 되자 신혼의 아내를 두고 한국 참전을 자청한 아들 짐(Jim)은 대를 이은 육사출신 항공대 대위, 공군이 되어 아버지를 도우러 3월14일 한국에 왔다. 수영기록 보유자이기도 했던 2미터의 장신 26세 장교는 4월4일 B-26 폭격기를 몰고 북한 평북 선천지역 철도 폭격 중에 적의 포탄을 맞고 말았다. 참전 3주일만이다. 뉴욕 타임즈는 장문의 애도기사를 실었다.“짐의 아버지는 이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도 묵묵히 직무를 수행했다”(His father continuing to serve after receiving the tragic news)--이것은 유엔사령부의 기록이다. 실제로 밴플리트는 “다른 작전이 더 급하다”며 아들의 수색작전마저 중지시켰던 일화는 유명하다. 다행히 죽지 않고 북한군 포로가 된 짐은 중공군에 넘겨지고, 다시 소련 노동수용소에 끌려갔는데 거기서 숨진 것 같다는 증언이 있다. 이와 달리 존 아이젠하워는 살아남아서 본국에 돌아가 외교활동까지 펼치며 91세까지 살았다. 아이크와 밴플리트 말고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각국 고위층의 아들들이 많다. 교통사고로 전사한 워커 8군사령관의 아들 샘 워커, 2차대전 전차군단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의 아들 등 150명이 넘는다. 고위층일수록 병역기피에 습관적인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는 비교는커녕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다.

◆ “통일의 기회는 왔다” 전국에 “아이크 환영“ 열풍이승만 대통령이 ’아이크의 방한‘을 알게 된 것은 미국대사 무초가 아니라 클라크 사령관의 극비통보를 받고서였다. 11월21일 무렵, 이승만 두뇌속의 컴퓨터가 빛의 속도로 돌아간다.“한국정쟁을 끝내겠다”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다른 세계적 정통 전쟁전문가의 ’종전‘(終戰)카드에 어떤 카드로 응전할 것인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시간도 없다. 그것은 이승만의 ’남북통일 종전‘이외 다른 선택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대적 환영 준비...학생 시위 “남북통일” 외침 폭발

24일부터 부산과 서울은 물론 도시마다 새로운 미국대통령을 환영하는 열풍이 일어났다.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각료들과 청년 단체들이 발벗고 나서 뛴다. <환영 ’미국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방한>이란 대형 환영탑 들이 세워지고, 각종 현수막이 걸린 거리엔 태극기와 미국기가 줄 지어 휘날리며, 환영꽃다발을 장식한 꽃전차들이 달린다.임시수도 부산의 충무로 거리에 학생 4만명이 모였다. “아이크 만세” “중공군 철수” “남북통일” 등 구호를 외치는 시위가 날마다 행진한다.“언제 오지? 26일? 27일?” 극비사항이라 발표도 언론보도도 없으니 갈수록 행사는 뜨거워진다. 도착 날짜를 알수 없는 경찰은 미국대통령 비행기가 내릴 곳이 김포비행장 밖에 없을 줄 알고 서울시내까지 입경도로 주변과 하수구들을 샅샅이 뒤지는 검색을 날마다 해야 했다. 진두지휘는 부산에서 올라와 여관에서 밤낮으로 뛰는 내무장관 진헌식(陳憲植)이었다. (박실 [벼랑끝 외교의 승리] 청미디어, 2010)이때의 신문들이 볼만하다. 당시 2개 면을 발행하던 양대 신문 [동이일보]와 [조선일보]는 온통 아이크 방한을 둘러싼 각종 기사로 넘쳐난다. ‘남북통일과 국토재건 확보’등 희망사항을 담은 기획기사, 연재물을 비롯, 아이크에게 바라는 시민의 소리 등이 한면을 채우고, 여류 시인 모윤숙의 ‘웰컴 아이젠하워’ 환영시도 실었다.

클라크가 깜짝 놀라 급전을 보낸다. 극비사항을 엄수하기로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이승만은 혼자 웃는다. ‘극비’란 도착일시만 지켜주면 되는 것. ‘통일의 열쇠’를 쥔 새로운 미국대통령을 전국민이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 아이크에게 ‘통일열망’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클라크는 “아이크를 암살하려는 공산측 저격범들이 남파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므로 “제발 소동은 그만” 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승만, 아이크에게 “태극기는 두손으로 받으시오”

아이크가 전선시찰에서 돌아온 오후4시, 이승만은 백선엽 육참총장을 대동하고 8군사령부로 아이크를 방문한다. 이 첫 만남은 간단한 사교적 인사로만 끝나는데 아이크는 이승만의 환영행사 참석 요청에 ‘시간이 없어 유감“ 이라고 답했다. (클라크, 앞의 책)12월4일 방한 마지막날, 미1군단을 시찰하는 아이크는 한국군 1사단(사단장 박임항)에 이어, 오후엔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을 잇따라 찾았다. 수도사단에 미리 와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영접하고,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뒤 두 정상은 ’스탈린 고지‘를 공격하는 시범전투훈련도 직접 관찰하였다.아이크가 한국군을 집중 시찰한 것은 자신의 지론 때문이다. 미군을 감축하고 한국군으로 대체해야한다는 주장, 이것은 대선운동기간 미국민들에게 약속한 바이다. 과연 그럴만한 전력을 지녔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한국방문 목적의 하나였다. 참관을 끝낸 아이크는 ”한국군의 훈련이 매우 훌륭하며 증강해도 좋겠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미군과의 교체를 시사하는 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특별히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아이크에게 선물한다. 새하얀 한국 비단에 4괘와 태극을 일일이 수놓은 태극기를 건네자 아이크가 한손을 내밀었다. ”국기는 두 손으로 받는 것 아닙니까“ 이승만은 온화한 말로 아이크의 심장을 찔렀다.아이크는 금방 두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두겠습니다“이승만은 연타를 날린다. ”귀하가 약속한 한국군의 증강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말꼬리를 잡아 말뚝을 박는 다짐이다. 한미 양국 장성들과 국군사단 병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태극기를 아이크에게 선물한 것은 대한민국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한 남북통일을 완성해야한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였다. 미국인들의 국기의식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한 마지막 날 5일 오전 10시 8군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이크는 이번 여행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발표하였다.1) 이승만 대통령은 어느모로 보나 과연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다.2) 한국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한국에 더욱 적극적인 원조를 하겠다.3) 자유진영의 결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전전에서 싸우고 있는 유엔군의 전투모습을 보고 확실히 인식하였다. 4) 유엔군이 고난을 무릅쓰고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우리의 공동목표를 위한 것이다. 전선시찰에 앞서 150여명 내외기자들에게 13분간 연설한 아이크는 질문은 일체 받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조선일보] 1952년 12월8일자)

★ 이승만에게 붙잡힌 아이크, 경무대의 깜짝 환영행사

출국을 앞둔 아이크는 타이완 주둔 미군사령관 체이스(William C. Chase) 소장을 접견하고 8군 사령부를 떠난다. 클라크는 조마조마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아이크를 방문했으니 출국 전에 ’답방‘하는 것이 예의였으나 너무 촉박해졌다. 아이크가 경무대로 이승만에게 출국인사를 하러 가느냐 안가느냐가 문제다. 아이크를 밀착 수행한 클라크 사령관은 자기가 경무대로 미리 찾아가 아이크 방문 사실을 알려주었더니 화가 잔뜩 났던 이승만이 금방 표정을 풀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또 한사람 이승만의 오랜 정치외교 보좌관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당시 상황을 자기 저서에 이렇게 설명해놓았다.“아이크가 당선되자 이승만은 미국의 휴전정책 변경을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로 생각했다. 아이크에게 주려고 준비한 ‘정책방침서’(position paper)는 공산군을 지금 북한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세계자유평화를 가장 빠르고 효과있게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념을 설득력 있고 정성스럽게 작성한 브리핑 서류였다....(중략)....서울에 온 아이크는 낮에는 미군부대들을 사열하고 밤에는 브리지와 포커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서둘러 이승만과 만났으나 아무런 논의 없이 금방 헤어졌다.”(올리버, 앞의 책)

토요일 오후2시 김포공항 출발 예정의 아이크는 다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메시시를 경무대에 보내왔다. 이승만은 경악했다. 그리고 격노했다. 그는 국무회의를 소집해 놓고 아이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만약 장군이 오지 않는다면 부득이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할 수밖에 없노라”는 격한 메시지를 아이크에게 보냈다.한표욱(韓豹頊, 1916~2003) 대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이크가 그대로 가려하자 이대통령이 미국 측에 강한 불만을 토로해 김포로 달리던 아이크가 차를 돌렸다고 한다. (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마침내 아이크 일행 차가 경무대 앞뜰에 나타났다. 부인 프란체스카와 기다리던 이승만은 현관으로 나갔다. 차에서 내리는 아이크를 보자 반갑게 껴안고 말했다.”어려운 때 방한해주어 고맙소. 한국전쟁의 참모습을 똑똑히 보았을 줄 아오.“ 아이크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유일한 여성각료로서 아이크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다. 아이크는 그저 이 정도로 인사를 끝내려는 눈치였으나 이승만이 붙잡았다.”나의 각료들을 소개하고 싶소“ 이승만이 방문을 활짝 열자 정장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각료들은 물론,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달려들었다. 수많은 악수와 사진들이 찍혔다.다시 클라크의 증언이다. ”아이크는 그것만으로 몸을 빼낼 수 없었다. 경무대 밖은 불빛이 휘황하고 한국군 3군의장대와 밴드, 카메라맨들이 줄지어 기다렸다. 마치 헐리우드의 영화개봉 전야제 같았다. 이승만 박사가 직접 그렇게 연출한 무대였다.“(클라크, 앞의 책)어쩔 수 없이 약식 의장대 사열을 마쳤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언제 준비하였는지 이승만은 두툼한 보고서를 꺼내들고 ’정상회담‘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휴전협상과 남북통일, 그리고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재건 계획까지 설명을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몰랐다. 아이크는 그 보고서를 수행원에게 맡기고 차에 올라야했다.그야말로 ’짧고도 긴 방한‘ 71시간, 두 차례 만난 정상들은 핵심문제의 토의도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아이크는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정책방향을 확고히 간직한해 왔기 때문이다. 밤 8시, 김포공항을 이륙하는 아이크의 가슴에는 ”더 이상 이런 전쟁을 질질 끌 수는 없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져 ’휴전‘을 확정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란 느낌을 확인하였다. (아이젠하워 [The White House Years] Garden City, 1963)귀국한 아이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국을 방문하고 특히 각하와 친히 만날 기회를 가진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본인이 시찰한 한국군으로부터 본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군인들이며 실로 용감한 병사들입니다. 그들의 국가적인 긍지, 철저한 충성심, 그리고 공동의 적에게 싸움을 계속하려는 결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지난 2년반동안 자유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귀국민을 결속시킨 각하의 공훈을 역사는 마땅히 크게 평가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각하는 이 위업을 심히 곤란한 정세하에서 성취하였으며 실로 최고도의 지도자 아니고서는 견디지 못할 환경을 극복하신 것이었습니다. 각하의 서한을 받았는데 본인은 그 내용을 상세히 검토 고려하겠습니다.....12월5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이승만의 가슴에는 아이크가 무엇을 남겼을까. 번개처럼 지나간 71시간의 방한, 서로 해야 할 대화는 하나도 못했다. 슬프게도 결국 ’동상이몽의 71시간”이었음이 드러나기까지 역사는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1953년 ”통일의 해“ 선언...이승만 ”미국 새 대통령에 기대“

또 새해가 밝았다. 전쟁4년째 1953년은 이승만에게 “죽느냐, 사느냐” 운명의 갈림길이다.사상 처음 국민의 손으로 ’직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자신만만하다. 만약 이번 2대대통령으로 미국과 야당이 음모 옹립한 인물 ‘미국말 잘 듣는 장면’이 대통령으로 뽑혔다면? 벌써 미국의 뜻에 따라 나라도 휴전협상도 질질 끌려가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으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라는 권력의 정당성 ‘방패’를 확보했으니, 이제 국내외의 시비도 받지 않고 국민과 함께 미국과 세계를 상대할 리더십을 장악했다. 그만큼 글로벌 전략으로 무장된 이승만은 강대국들의 ‘협상 테이블“ 정면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년처럼 국민에게 보내는 신년사와 유엔군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한다.”...지난 1년 반을 소위 휴전이라는 것으로 세월을 허비해오는 중, 모든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데 지금은 미국 새 대통령이 전적으로 이에 대한 연구를 해서 속히 전쟁을 끝맺겠다는 목적으로 친히 우리나라에 와서 모든 사정을 다 살펴본 후.....우리 국군을 전적으로 확장하며 원조를 속히 증가시켜야 된다는 것을 표시하였으며 새해에는 남북통일을 완수할 시기가 가까워 온 것을 치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우리가 세계 반공전쟁의 최선봉이 되어서 오는 1년동안은 천심과 민심이 합해서 남북통일을 완수하고 재건설에 일심합력하여 새 나라의 만세기초를 세우기를 바랍니다. (신년사 [조선일보] 1953년1월1일자)

◉유엔장병에 메시지=“우리들과 같이 한국에서 새해를 지내게된 유엔 장병 각원에게 본인은 축하인사를 드리는 동시에 불행하게도 전 세계를 정복하려는 침략자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싸워서 그들을 이기지 않으면 장차 누구에게도 평화와 안전이라는 것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여러나라에서 여기까지 와서 우리들과 같이 싸우고 있는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집과 우리들의 집과 또는 우리 자유와 여러분의 자유와 또는 세계 자유를 위하여 자진해서 기꺼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한국민은 이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 전 한국민은 전인류에게 향상된 생활의 날이 오게 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각오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은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전우들입니다. 우리들이 계속하여 평화를 둘러싸고 동지로서 일하고 1953년에는 모든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로써 신년의 인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조선일보] 1953년 1월2일자)

◆ 아이크 만난 영국 처칠 “한국전쟁문제 앞으로 잘 풀릴 거요”

추위가 몰아치는 1월5일, 대서양을 횡단한 영국의 초호화 여객선 퀸 메리(Qeen Mary)호가 뉴욕 항에 서서히 닻을 내린다. 잠시 후 유난히 작은 키에 뚱뚱한 몸집의 노신사가 나타났다. 특유의 모자에 입에 문 시가,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이다. 이승만보다 한 살 위 79세가 된 그는 이번에 왜 또 미국에 왔을까.뉴욕의 상류층지역 5번가 친구의 저택에서 2~3일 머물며 쉬다 가겠다는 처칠의 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없다.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지금 세계 움직임의 중심은 한국이 아니고 서유럽이다. ’철의 장막‘과 접하고 있는 지역에 세계대전의 위험은 사라졌다. 미국과 유엔군이 한국에서 소련의 진출을 방지한 것은 지난 5년 내 거둔 가장 중대한 성과라 하겠다“ 과연, 처칠은 그날부터 8일까지 볼일을 다 끝냈다.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미국 최고수뇌부 인사들을 모두 만나고 난 다음 공식발표는 없었지만 이런 기사들이 흘러나왔다.’미-영, 한국문제 해결에 최종합의‘...어찌나 회담결과가 흡족했던지 처칠은 봄에 다시 방미하려던 계획마저 포기하였다는 정보까지 보도되었다. 한마디로, 아이크의 한국전쟁 ’종전책‘에 처칠이 만족한 것, 아니다. 지난 2년간 처칠이 주장해 온 ’즉각 휴전‘에 트루먼 대신 아이젠하워가 적극 호응한 결과였다.

1월20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아이크는 새로운 국무장관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1959) 등 새정부 조각을 마무리한 뒤, 30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원들과 1시간50분 비밀회의를 열었다. 대선공약 ’한국전쟁 종결‘을 새 정부 첫 출발부터 최우선 정책으로 밀어붙인다.런던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박수치는 처칠이 기자들에게 말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방문에 의하여 앞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오.”중공군 참전이래 미국에 휴전을 독촉하던 처칠은 이제 유럽에서 3차대전의 위험이 사라져가는 것만이 관심사이다. 이 술고래 유럽중심주의자는 기쁨의 술을 얼마나 마셨을까. 그 유럽평화의 대가는 한국군과 한국민의 생명과 대한민국의 황폐화였음을 알 까닭도 없다. 이때 이승만의 심정을 누가 알랴. 주미대사 양유찬의 보고들과 각종 보도들을 눈앞에 두고 급박하게 반전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며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을지, 그를 도울 수 있는 힘은 밤낮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뿐일 것인가.

◆김일성 “살려 달라” 휴전 간청...스탈린 "내가 죽을때까지 안된다"

판문점 휴전 협상은 파탄을 맞은 지 6개월을 넘기고 있다. 유엔측이 지난해 9월28일 제안한 ‘포로의 자유송환 3가지 선택지’를 공산측이 즉각 거부하고 10일간 휴회를 주장하자 유엔측 대표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이 “더 이상 회의는 무용지물이다. 내 제안을 당신들이 알아듣게 하는 방법은 이 자리를 떠나는 것 뿐”이라며 무기한 휴회를 선언했다. 회담중단 지시를 내린 클라크 사령관도 강력한 성명을 낸다. “공산군 측의 모욕적이고 선전적인 장광설을 듣기 위해 유엔군이 다시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10월8일 판문점이 문을 닫자 즉각 전투의 불길이 격화되었다. 공산군은 휴전기간 준비했다는 듯이 매일 4만~5만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클라크의 유엔군도 고지마다 육해공의 입체공격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런 전투는 이듬해 4월25일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6개월 반 동안 절정을 이룬다. 특히 철원의 281고지, 백마고지, 금성지구의 수도고지, 지형능선, 금화지구의 저격능선 등은 격전지중의 격전지로 한국군 전사에 빛나는 전공이 수두룩하다. 이때 전사한 국군이 전체 전사자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스탈린과 마오의 오월동주...'장기전'의 노림수는?

급기야 김일성이 두 손을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수천대 B-29 편대의 공습으로 지하에서 떨던 그는 평양을 비롯한 주요지역이 잿더미로 변하자 마오와 스탈린에게 SOS를 친다. “살려주시오. 무슨 양보를 해서라도 정전협정을 서둘러 주시오” 3년전 무력남침을 허락해달라며 스탈린을 졸랐던 김일성이 이제는 “전쟁 그만하자”고 매달려 애걸한다. 김일성에게 포로문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의 병력충원이 바닥 난 판인지라 그동안 국군포로들을 잡히는 대로 총알받이로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던 것. 전쟁만 끝난다면 그는 무슨 요구든 다 수용하고 싶은 참혹한 지경에 몰렸다.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간 중공2인자 저우언라이는 조심스레 김일성의 말을 전한다. “북조선은 하루 인명피해가 포로숫자보다 많기 때문에 전쟁이 조속히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은 전쟁을 지속시켜야 미국이 지쳐서 새 전쟁을 못하도록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마오 동지 말이 맞다”면서 스탈린은 완고한 주장을 되풀이한다. “북조선은 전쟁에서 크게 잃을 것이 없다. 지금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포로송환문제 협상에서 절대로 양보해선 안된다”라고 다짐하며 “내가 죽는 순간까지 양보를 허락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발맞추듯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6.25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소비에트의 이득”이라면서 “조선의 전쟁은 오래 할수록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에 도움이 된다”는 결정문을 채택하였다.(1952년 11월2일)

스탈린과 마오의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해야 할 ‘조선전쟁의 장기화’ 수렁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중공의 마오가 소련의 군사경제원조 극대화를 노린 반면에, 스탈린은 마오의 소련 의존도를 높여 ‘티토화(유고슬라비아 티토의 독자노선)’를 막으면서 미국을 극동에 붙잡아둠으로써 유럽의 위성권 확장과 핵무장 미국과 규형 맞출 시간을 벌려고 했다. “미국은 장사꾼이다. 보라, 조그만 조선조차 패배시키지 못하잖느냐. 미국을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 중국은 잘하면 타이완을 되찾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스탈린은 ‘조선전쟁’을 통하여 긴 국경을 맞댄 대국 중공을 구슬려 지배하려는 예속화 전술을 초지일관 늦추지 않았다. 이러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김일성은 클라크의 폭탄세례를 견뎌가며 살아날 구멍이 하루 속히 열리기를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했던 것이었다.

◆ 스탈린도 “휴전 반대” 왜?...‘크렘린 미스터리’ 푸는 비밀전문

6.25전쟁 연구가들이 봉착하는 ‘스탈린의 미스터리’가 몇 가지 있다.첫째, 전쟁 직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군파병을 결정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불참’한 사건이다. 둘째,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3일간이나 머물러 줌으로써 일본 주둔 미군이 한국에 진주할 시간을 벌어준 일이다. 셋째,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고 중공군을 끌어들이면서 약속한 무력지원에 소극적이고, 마오가 간청하는 공군 출격조차 극히 제한적이었던 사실이다.

왜 스탈린이 그랬을까? 혹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실수‘ 또는 ‘한국의 행운’을 말한다. 역사에 행운이 그리 쉽게 찾아오는가. 그것은 행운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물이 기어이 나타나 ‘스탈린의 미스터리’를 풀어주고 말았다. 그것도 당사자 스탈린이 직접 작성한 비밀고백 편지로써 말이다. 아래에 2012년 [월간조선] 8월호가 게재한 ’스탈린의 편지 전문‘과 기사일부를 요약 인용한다. (조갑제 ’체코 대통령에게 보낸 스탈린의 놀라운 편지 발견!‘)

★스탈린의 고백 “한반도를 美中 대결장으로 만들 것” 최근 소련의 안보리 불참과 관련한 중요 문서가 발견되었다. 2005년에, 러시아 3대 국립문서보관소 중 하나인 사회정치사(社會政治史) 문서보관소(RGASPI)에서 안드레 레도프스키라는 러시아 학자가 발견한 스탈린의 편지(문서번호 fond 558, opis 11, delo 62, listy 71∼72)가 그것이다. 이 문서에 대하여 베이징대 역사학부 김동길 교수(한국인)가 논문을 썼다. 편지의 전문(全文)은 이렇다. ▶필리포프(스탈린)가 프라하 주재 소련 대사에게 보낸 편지◀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메시지(1950년 8월 27일) -고트발트에게 아래 메시지를 구두(口頭)로 전달할 것. 요구한다면 필사하여 줄 것. 「우리는 지난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이 불참한 것과 그 뒤의 사태전개에 대하여 고트발트 동지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리는 안보리에 네 가지 이유로 불참하였다. 첫째, 새로운 중국과 소련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하여, 둘째, 미국이 안보리(상임이사국)에서 국민당 괴뢰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注-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진정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의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셋째, 두 강대국의 불참 때문에 안보리 결의는 정당성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프리 핸드’를 갖고 어리석은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도록 그렇게 하였다. 나는 우리가 이런 목적들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안보리에 불참한 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엮이어 들어가 군사적 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침략자와 폭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국이 한때 생각하였던 것만큼 군사적으로 강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이 극동에 묶여 현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의 세력 균형에 있어서 우리에게 득(得)이 되지 않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로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첫째, 미국은, 그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방대한 병력을 보유한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미국은 이 투쟁에서 (전선을) 지나치게 넓히게 될 것이다. 둘째,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가까운 장래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제3차 세계대전은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연기될 것이고, 이는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줄 것이며, 더구나 미국과 중국의 투쟁이 극동의 전(全)지역을 혁명화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세계의 세력균형에 있어서 우리를 유리하게 만들지 않는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렇다. 귀하도 이해하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 참여할 것이냐 아니냐는 피상적으로 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하여 우리는 “민주진영은 안보리에 불참해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참여할 것인가 불참할 것인가는 당시 상황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국제환경에 따라서 우리는 또 다시 안보리에 불참할 수도, 복귀할 수도 있다. 왜 우리가 지금 안보리에 복귀하였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간 것은, 미국 정부의 침략적 정책을 폭로하고, 그들이 안보리의 깃발을 이용하여 침략성을 은폐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한국에 침략적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안보리에 참여하여 이를 폭로하기가 매우 쉬워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므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포프(스탈린)

스탈린의 이 편지는 충격적인 고백이다. 6·25 전쟁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을 강요한다. 스탈린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에 불참한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면서 “넷째,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 멋대로 더 많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에 개입할 수 있도록 ‘프리 핸드(free hand)’를 주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미국이 유엔군의 기치하에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이 편지에서 스탈린은 자신이 기획하고 일으킨 이 전쟁의 목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데 하나 없는 게 있다. 김일성이 전쟁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이다. 스탈린의 전쟁 목표엔 ‘통일’ 같은 건 들어 있지도 않다. 미군이 한국전에 ‘묶여 유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려고 하는 스탈린에겐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기면 안 된다. 전쟁을 오래 끌어야 하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북진해야 하며 그래서 중국 군대가 들어와야 한다. 스탈린의 편지를 읽으면 그가 중공군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탈린이 이 편지를 썼던 1950년 8월 하순은,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가 절정에 달하고,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일 때였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거론되지 않을 때였다. (이상 [월간조선] 2012. 8월호)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로서 조갑제는 2000년에 조지워싱턴 대학의 리처드 C. 소턴(Richard C. Thorton) 교수가 쓴 [ODD MAN OUT(왕따):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의 기원]이란 책을 길게 인용하고 있다. 소턴의 결론은 “6·25 남침전쟁이 김일성 의 공산통일 야욕으로 일어난 듯이 보이지만 스탈린의 더 큰 전략구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킨 뒤 미군을 불러들이고, 중국을 끌어들여 한국을 미-중 대결장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미국과 적이 되면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스탈린의 악몽이던 미·중 접근은 차단된다. 이런 시나리오가 성공하려면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는 데 성공해선 안 된다. 그래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승리를 방해했다“고까지 주장한다.그 증거로 김일성의 ‘서울점령 3일간 지체’가 예거된다. 즉시 남진하였으면 끝날 수도 있었던 적화통일 기회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놓쳤다는 것인데, 그 까닭은 김일성이 뒷날 고백한다. ”3일간 스탈린이 보내준다는 무기를 기다리며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 무기를 끝내 보내지 않아 우리는 그때 망했다“ (탈북시인 장진성, 조갑제닷컴 기고문, 2009)

◆ 스탈린 급사...심복 베리야의 큰소리 "내가 해치웠어"

어느 날 갑자기 스탈린이 죽었다. 1953년 3월5일 전 세계는 ‘깜작 뉴스’에 충격을 받는다. 갖가지 소문이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미스터리를 싸고 수많은 추측과 의혹을 쏟아낸다. 철의 독재자 스탈린의 사망원인으로 그의 심복 베리야의 ‘독살설’이 유력해졌다. 요약하면 이렇다.그날 2월28일 75세 스탈린은 측근들과 함께 크렘린 궁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자신의 별장으로 옮겨 다음날 새벽 4시까지 먹고 마셨다. 베리야, 말렌코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동석하였다.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의하면 헤어질 때 스탈린은 매우 기분이 좋았고 흐루시초프의 배를 쿡쿡 찌르며 장난도 쳤다고 했다.다음날 일요일, 경호원들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늦잠 자는 날도 아침 10시면 불렀는데 오후가 되어도 기척이 없다. 스탈린이 부르지 않으면 방에 들어갈 수도 없다. 밤10시가 되자 경호원들이 꾀를 냈다. 우편물을 전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방문을 조심스레 연다.맙소사! 침대에서 떨어진 스탈린은 의식이 없다. 부서진 손목시계는 저녁 6시30분에 멈춘 채.경호원은 급히 국가안전부로 연락한다. 그 장관은 뭐가 두려운지 말렌코프와 베리야에게 알리라고 했다. 말렌코프가 전화했을 때 베리야는 아직도 여자들과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 베리야의 첫 마디였다. 그가 별장에 가보니 스탈린은 코를 골고 있었다. 술 취한 베리야는 의사를 부르지는 않고 명령부터 한다. ”모두들 여기서 나가! 잘 자고 있지 않나, 잠 깨지 않게 방해하지 말라!“의사들이 온 것은 12시간 뒤, 뇌일혈로 쓰러졌으니 ”사망은 시간문제“라고 진단했다.3월5일 밤 9시50분(한국시간 3월6일) 스탈린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졸도 5일만이다.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딸 스베틀라나는 그의 책에 마지막 순간을 적어놓았다. "얼굴 모양이 변하고 검은 색이 되었다. 입술이 검게 되었다. 갑자기 눈을 떴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분노한 눈초리였다. 아버지는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주하려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끊어졌다." 그 순간 베리야는 방을 뛰쳐나가면서 운전사를 불렀다.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는 듯 했다.베리야의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드러난다. 당시 스탈린은 고향 조지아의 후배 베리야에게 공안기관 총책을 맡겼는데 무소불위(無所不爲)인지라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므로 은밀히 ‘베리야 제거’ 계획을 진행시키던 참이었다. 몰로토프도 회고록에서 베리야의 말을 전한다. ”내가 그를 처치해 버렸어. 내가 당신들 모두를 구해냈단 말야.“ 이렇게 큰소리치면서 베리야가 실권자처럼 나섰다고 한다.다른 증언도 나왔다. 그날 스탈린 방에 못 들어가게 한 것은 스탈린이 아니고 수석경호원이었는데 그가 베리야의 비밀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즉 시키는 대로 의사 누군가 독극물을 주사했을 것이고 베리야는 스탈린이 숨질 때까지 고의로 ‘접근금지령’을 내려 방치 했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큰 설득력을 얻었다. 자업자득-스탈린의 공포정치의 유산,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후르시초프가 권력 장악...베리아 처형소련 각지에서 스탈린의 ‘우상숭배’를 따르던 국민들이 몰려왔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들은 초만원인지라 경찰은 인파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장례식은 레닌과 비슷한 방식이다. 이집트 파라오처럼 방부처리가 된 시신을 담은 유리관 옆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휘장이 쳐졌다. 3월 8일 그의 시신을 보려는 인파가 밀려들어 수백명이 깔려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디선가 ”살인마는 죽어서도 살인한다“는 논평이 나왔다.

스탈린 사후 24시간내 모스크바 방송은 새로운 수상에 말렌코프, 부수상 겸 외무상에 몰로토프가 선출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베리야는 내무상이 되어 전국 비밀공안기관을 한손에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는 3개월 뒤 소련 지도부 손에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운명을 맞는다. 1953년 6월 26일 각료회의로 위장한 정치국회의를 연 흐루시쵸프가 갑자기 ”베리야는 제국주의자이며 영국 간첩“이라는 연설을 한 것이다. 오래된 공산당 숙청방법, 놀란 베리야는 흐루시쵸프의 손에 매달려 "니키타, 이게 무슨 짓이오?" 울부짖었지만 말렌코프가 숨어있던 장군들을 불러내 베리야를 검거하고 재판에 보내버렸다. 사형이 선고되자 베리야는 재판장에게 무릎으로 기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통곡하는 바람에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그를 지하 처형장까지 끌고 가지 못해 계단에서 뒤통수를 쏘았다고 한다. 집단지도체제 수뇌들이 힘을 합쳐 ‘공포의 악마’를 제거하였지만 곧바로 그들은 권력투쟁에 돌입하였다. 최종 승리는 니키타 후르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에게 돌아갔다. 얼마 뒤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고, 북한 김일성도 이를 따라 박헌영 등 정적들을 일거에 처형한다.

★이승만, 30년 전쟁의 숙적에 고별사..."침략주의 포기하라"이승만 대통령은 3월 6일 공보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발표하였다.”소비에트 유니온의 큰 지도자 조셉 스탈린이 별세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매우 섭섭히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누구를 미워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살려는 까닭이다. 우리가 스탈린과 그 동료들에게 침략주의는 이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히틀러, 무소리니가 다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크렘린의 후임자들이 지혜롭게 되어서 약한 이웃을 정복하려는 주의를 다 포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러시아 대중과 평화로이 살기를 주장함이며 그들에게도 복리가 된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조선일보] 1953.3.8.)

”스탈린 별세 소식에 섭섭하다“? 국제정치가 이승만 다운 말이다. 적국 원수에 대한 국가원수의 고별사, 그러나 그 순간 이승만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상념이 회오리쳤으리라. 첫째는 한국전쟁 승리에 새로운 기회가 왔다는 직감이고, 둘째는 30년 싸운 숙적의 죽음이 불러오는 미묘한 감회가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스탈린과 30년 전쟁’---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만난 코민테른 국제공산당의 공격에서 출발한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1923년 발표한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을 쓴 이래 독립운동 내내 일본 제국주의와 스탈린 공산주의는 이승만이 극복해야 할 지상의 과제 아니었던가.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 온다“며 트루먼과 또 싸웠던 세월, 해방후 3년간 반공투쟁과 소련-중공-북한의 3국 공산주의 침략전쟁에 지금도 허덕이고 있다. 모두 ”미국이 내말을 안 들어서“ 이지경이다. ”원수여, 잘 가라. 이제 후임자들은 침략주의를 포기하라“ 그러나 스탈린이 죽었다고 공산주의도 죽을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번번이 공산주의를 살려주는 미국 때문이다. 앞으로는 아이젠하워와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전권독재자 스탈린이 사라진 적군을 단숨에 물리치고 통일을 이룰 절호의 기회가 왔건만 아이크는 내말을 들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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