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증오·극단 정치가 낳은 민주주의 붕괴, 왜곡된 팬덤과 작별할 때다

뉴데일리

약 30년 전의 일이다. 당시 호주에서 유학 중이던 필자는 인구 구성상 백인이 절대 다수인 지역에 살았다. 오늘날 K팝, K드라마와 같은 '한류 프리미엄'을 기댈 수 없는, 싸구려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만드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으로 인식되던 때다. 설상가상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각각 붕괴되고 무너지자 당시 호주인 사이에선 "한국인이 자랑하는 현대·대우자동차를 타다 갑자기 바퀴가 빠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했다.

신뢰받지 못하는 국가, 경쟁력이 뒤처지는 나라에서 온 한국의 청년은 인종차별이 '기본값'인 환경에 놓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눈을 찢으며 "냄새나는 아시아인,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차별 발언은 기본, 학교에 있는 사물함은 수없이 발로 차여 문이 개방되지 않아 수업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 같은 인종차별의 배경에는 한국의 국격 문제도 있었으나, 더 근본적인 진원지는 다름 아닌 '정치권'이었다. 당시 백호주의(白濠主義) 부활의 기치를 내건 극우정당 '원 네이션 파티'(One Nation Party)의 당수 폴린 핸슨(Pauline Hanson)이 백인우월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자 호주 사회 전체가 대혼란을 겪었다. 핸슨은 자신이 총리가 되면 아시아인의 이민을 제한하고, 거주 중인 아시아인은 호주에서 내쫓겠다는 극단적 공약을 내놓았다.

핸슨은 공개적 망언도 수시로 내뱉었다. 주로 "호주가 아시아인으로 뒤범벅이 되고 있다", "우리 일자리를 빼앗고 우리 생계를 위협하는 아시아인을 추방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현대판 'KKK'(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운 미국의 극우비밀결사)라는 평가마저 나왔다. 놀랍게도 핸슨의 극단적 정치에 합류하는 세력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변방의 무명 정치인이던 그는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호주 중앙정치로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호주 정부는 인구 부족으로 적극적인 이민 정책을 펼쳤다. 문제는 아시아인을 주축으로 한 이민자들이 피, 땀 흘려 이룬 부(富)로 호주 부동산을 취득하고, 고부가치 산업에 일자리를 차지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자 백인 사회에서 불만이 축적됐다. 지금은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전 세계적으로 문화 융합과 다양성 포용이란 진정한 지구촌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종차별의 수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으나,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만 해도 이민자들에게 사회·경제 주도권을 뺏긴 현실을 못마땅해 하는 현지인은 상당했고, 핸슨은 이를 가짜뉴스와 이분법적 논거를 앞세워 많은 백인 호주인에게 쾌감을 선사했다.

통합과 균형 잡힌 정책이란 정치의 기본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치적 야욕에 눈이 먼 핸슨은 나치 요제프 괴벨스처럼 현란한 언변과 언론 플레이로 사회에 축적된 불만을 자신의 선전도구로 악용했다. 핸슨의 강성 팬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호주에 사회 분열과 갈등을 부추겨 금전적으로 따질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경제적 손실을 봤으며, 사회 공동체마저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치는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극단주의자의 망발과 현실화하기 어려운 정책의 종착지는 자멸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왔다. 핸슨도 승승장구하다가 끝내 존재감 없는 '꼬마정당'의 당수로 전락한 채 오늘날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고 있다.

이번 미국 도널드 트럼프를 겨냥한 테러에서 보듯, 극단주의적 정치 분열은 비극적인 사건을 야기한다. 2022년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선거 유세 중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도 지난해 4월 와카야마현 유세 현장에서 폭발물 투척 테러를 당했다. 국내 상황도 결코 낫지 않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3개월 앞둔 지난 1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 방문 중 피습을 당했다.

민주주의가 폭력에 의해 짓밟히는 위기 앞에서 정치권부터 반성해야 한다. 극단적 지지층에 휘둘리는 팬덤 현상의 폐해는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팬덤을 통해 득을 보고 부화뇌동하는 정치인이 적지 않다. 아니면 말고식 가짜뉴스까지 더해져 상대를 악마화하는 정치 문화는 정치 테러를 낳았다. '민주'라는 말을 꺼내기가 점차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게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더욱이 '민주'라는 이름을 붙인 정당이 민주주의를 먼저 파괴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함을 넘어 자괴감이 드는 요즘이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지도자의 품격있는 언행을 강조한 경구다. 이제 정치 풍토를 바꾸는 것은 정치권의 몫이다. 만나기만 하면 정쟁하는 정치가 아니라, 반대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상대를 존중하는 '상생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비극을 마주하는 건 우리 국민이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7/15/2024071500260.html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