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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은 1848년 8월 15일 …《건국절》제정하라

뉴데일리

■ [건국]과 [광복]

이번 8·15엔 《광복회》 없는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이종찬 《광복회》회장이“(윤 대통령에게) 상당한 배신감을 갖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포기 선언을 하지 않아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와 《광복회》는 《독립기념관》 관장에 임명된 김형석 교수를 [뉴라이트]로 규정하고 그의 임명을 철회하라는 요구도 했다.

[건국]과 [광복]. [독립]과 [해방].

이는 어떻게 같고 다르기에,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 [광복]이란?

봉건 시절 한자문화권에는 [복국(復國)], [복위(復位)], [수복(收復)], [광복(光復)]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 복국(復國)

[복국]은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892년 견훤은 660년에 멸망한 《백제》를 다시 세웠다. 이것이 [복국]이다. 역사학계는 [견훤의 백제]를 [이전의 백제]와 구분해 《후백제》로 부른다.

※ 복위(復位) [복위]는 빼앗긴 군주직을 되찾는 것이다. 사육신과 금성대군 등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다 실패한 것을 [단종복위]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예다.

※ 수복(收復)[수복]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것이다. [복국]과 [복위]를 포함한 뜻으로, [복벽(復辟)]이라는 말도 쓰였다.

중국 역사에는 [복국] 사례가 아주 많았다. 유방이 세운 《한(漢)》은 왕망이 세운 《신(新)》으로 멸망했다가 유수(광무제)의 [복국]으로 다시 이어졌다. 역사학계는 유방이 세운 漢을 《전한(前漢)》, 유수가 [복국]한 漢을 《후한(後漢)》으로 구분한다.

후한 말 중국은 조조의 《위》, 손권의 《오》, 유비의 《촉》으로 나눠 대립했다.이러한 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진(晉)》이였다. 《진》은 조조의 책사였던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조조의 손자인 조예를 밀어내고 세운 나라다. 《진》이 317년 무너지자, 사마의의 증손인 사마예가 양자강을 건너가 동남쪽에 [복국]했다. 역사학자들은 [복국한 진]을 《동진(東晉)》, [이전의 진]을 《서진(西晉)》으로 부르고 있다.

※ 광복(光復)

《동진》에 환온이라는 실력자가 있었다. 흔히 어릴 적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하는데, 이는 환온이 정적을 치면서 “그는 내 죽마고우였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 환온은 서진의 도읍지인 장안(낙양)을 되찾자는 [북벌(北伐)]을 주도하며, [광복구경(光復舊京)]을 내세웠다. 이것이 [광복]이 처음 등장한 경우다.

그리고 수백 년이 뒤 출간된 『자치통감』이 후한의 유수를 거론하며, 옛 나라를 다시 세웠다는 뜻으로 [광복구물(光復舊物)]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후 [광복]은 잃어버린 도읍지를 되찾는 [수복]보다는,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복국]의 의미로 더 자주 쓰이게 됐다.

※ 독립(獨立)

[독립(獨立)]은 개화기 일본의 학자들이 영어 [independence]를 그 개념에 맞춰 만들어낸 새로운 한자 단어다.

[독립]은 나 혼자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주변국들이 인정해줘야 된다. 주변국들이 쳐들어오거나 간섭하지 않아야 이루는 것.이를 위해서는 주변국으로부터 독립국임을 인정받아야 한다.

1636년 삼전도에서 항복해 신하국이 되겠다고 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있었다. 때문에 개화기 선각자들은 《청》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했다.《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 1 조를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청》과 1895년에 맺었다.

[독립]을 자신하게 된 우리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1896), 《대청제국》과 동급의 나라가 됐다며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1897), 《독립문》을 완공했다(1898).

그런데 1910년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상대로 《대한제국》을 병합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때문에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새로운 과제가 됐다. 이 조약 발효로 해체된 《대한제국》 군과 독립을 바라는 세력이 《일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연해주나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청산리전투, 홍범도를 중추로 한 봉오동전투를 치렀다(1920).

《대한제국》은 군주가 주권을 갖고 있었으니, 그의 결정으로 《일본》에 병합된 경우였다. 이 전투를 치르기 직전 일단의 선각자들은 [군주국 체제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국(=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보고,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를 세웠다.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표방한 것은 《대한제국》을 [복국]하자는 게 아니었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이어 받지만,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국]을 새로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헌법]으로 부르는 것을 임정은 [헌법-약헌-헌장] 등으로 바꿔 불렀다.임정은 이러한 [헌법]을 다섯 번 개정했다.

이 시기 임정은 [건국]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4차 개헌을 한 다음은 1941년 《건국강령》을 만들었다.여기에 "[복국]을 한 후 [건국]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이는 《후(後)대한제국》을 세운 후 《대한민국》을 건국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 《건국강령》은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을 [복국]으로 표현했다.

※ 해방(解放)

속박된 상태에서 풀려나는 [해방]도 한자문화권에선 없던 단어다. [해방]은 [독립]처럼, 개화기 일본 학자들이 [liberation]을 그 뜻에 맞는 한자를 골라 만들어낸 단어다.

[독립]은 주변이 인정이 있어야 현실화한다.하지만, [해방]은 [노예해방]에서처럼 상대로부터 풀려나면 바로 이룰 수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유산계급에 지배당한 무산계급이 권력을 쥐는 것도 [해방]이라고 했다. 《중국》이 자국군을 《인민해방군》으로 부르는 것은 무산자인 인민을 [해방]한 무력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6·25를 남조선을 해방한 것이라며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해방]과 [독립]은 다른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가 맞은 것은 [해방]이었지 [독립]은 아니었다.

■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

1940년을 전후해 [복국]을 아름답게 표현한 [광복]이 [독립]을 뜻하는 단어로 회자됐다. 만주의 [독립]군은 실패했으니, [광복]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은 이 전투에 참여하고자 했다.그러나, 《중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일제에 병합된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봤다.그래서《중국》으로부터도 [독립]을 추구할 임정에 무력을 주지 않으려 했다.

때문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등 좌파 계열만 《일본》군을 상대로 소규모 무력투쟁을 했다. 《일본》의 공세로 전세가 불리해진 1940년, 《중국》은 중국군 내에 조선인 부대를 둔다는 조건으로 임정의 요구를 허락했다. 중국군이 무기와 장비를 제공하고 작전통제도 하게 된 이 부대를 임정은 《광복군》으로 불렀다.

■ [독립군]인가 [광복군]인가

그리고 큰 사건이 일어났다. 1943년 11월 《영국》의 처칠 총리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카이로로 불러 대일전(對日戰) 연합에 합의하고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 《일본》을 항복시키면 《일본》에 병합된 《조선》을 일정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있었다. [일정한 과정]은 [신탁통치] 를 뜻하는 것이었다.

일정한 과정을 거기기는 하지만 [독립]시킨다는 것은 《조선》을 《중국》에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때문에 장개석은 이 합의에 반대했으나, 대일전 수행을 위해서는 미·영의 지원이 절실했기에 동의했다.

이러한 《카이로선언》으로 《광복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하지만,《중국》은 《광복군》을 단 한번도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중국》군의 일부로도 대일전을 수행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 [해방] 대신 사용한 [광복]

1945년 [해방]을 맞은 우리는 이 《카이로선언》 때문에 [군정]을 끝내면 [신탁통치] 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미국》의 군정을 받은 남쪽의 민족진영이 [신탁] 에 강력히 반대하고, 《소련》의 군정을 받은 북쪽의 공산진영은 찬성하면서 분단으로 치달았다.

1948년 남쪽에 정부를 세운 우리는 이듬해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이룬 것은 [해방]이 아니라 [광복]으로 결정했다. 이 날을 《광복절》로 지정한 것이다.

그런데 《광복절》을 영어로는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로 표기했다.이는 《한국해방절》이라는 뜻이다. 1965년 설립된 《광복회》는 영어로 《한국 독립회》가 되는 《Heritage of Korean Independence》로 적고 있다. 이는 [복국]이어야 하는 [광복]을 우리가 [해방]이나 [독립]의 의미로 쓰게 됐다는 뜻이다. 공산주의가 자주 쓰는 [해방]과 구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이러니 [복국(광복)]과 [해방] [독립]에 대한 혼동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 [건국]과 [독립]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참여했던 동유럽 6개국은 1989~1990년 민주화혁명으로 공산 체제를 끝내고 민주 체제의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동독은 서독에 흡수됐으니 제외). [건국]을 한 것이다. 이러한 나라들이 《러시아》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유지하려면 주변국은 물론이고 강국인 《미국》과 《영국》 등으로부터 독립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들이 주변국과 강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은 《미국》이 만든 《NATO》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방해를 뚫고 줄기차게 노력한 이들은 1999년과 2004년엔 《NATO》에 가입하는데 성공했다.

《소련》은 《러시아》 등 15개 국가로 이뤄진 국가연합이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지만 《러시아》는 《소련》을 이뤘던 나라를 계속 영향권에 두고자 했다. 동아시아식으로 말하면 [속국]으로 두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CIS(독립국가연합)》을 만들어 놓고 《소련》을 해체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틱 3국은 《CIS》 잔류를 강력히 거부했다. 이들도 줄기차게 노력해 2004년 《NATO》 가입에 성공했다.

어정쩡 했던 것이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CIS》에 참여한다고 해놓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NATO》나 《EU》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을 이뤘던 나라 중에선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였으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22년 《러시아》가 특별군사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CIS》 체제 유지를 위해서였다.

■ 이승만, [건국]과 [독립] 모두 쟁취하다

1945년 [해방]돼 군정을 거쳐 정부를 세우게 된 우리에게 가장 큰 숙제는 누구로부터도 침략받지 않는 [독립]의 확보였다. 우리는 [신탁통지] 를 강력히 반대한 덕분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우리의 [반탁] 의지를 확인한 《미국》이 《미국》이 주도해 만든 《유엔》에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넘겨준 것이 계기였다. 《유엔》은 총회를 열어 [신탁통치] 없이 바로 [독립] 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 결정을 《소련》과 《소련》의 군정을 받은 북한이 거부했다. 때문에 남한에서만 독립국가를 만드는 선거(제헌의회 선거)를 하고 헌법을 만들어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 만든 것이니, 모든 《유엔》 회원국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 된다. 때문에 1950년 북한이 침공하자, 《유엔》은 "《유엔》을 무시했다"며 《유엔》군을 결성해 《대한민국》을 지키게 했다.

1948년 북한의 거부로 남한에서만 정부를 세우게 된 것을 우리는 [단정(單政)]이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북한과도 같이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는데, 국제정치에 밝았던 이승만은 단호히 [단정]을 지지했다.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북한의 김일성 이 주최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함으로써 남한이 북한 주도의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는 빌미만 줬다. 임정 외무부장이었던 조소앙도 이 《연석회의》에 참석했지만, 돌아온 뒤 북한에 속았다며 김일성 을 강력히 비판했다. 김구는 조소앙만큼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대로 [단정]으로 갔기에 우리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 정부를 만들 수 있었고, 《6·25전쟁》을 당했을 때는 《유엔》군 파병이라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은 정전 후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안보를 확실히 했다. 때문에 《대한민국》에 있는 《유엔》군 사령부와 주한《미국》군사령부는 서유럽을 지키는 《NATO》군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박정희는 《유엔》 회원국이기에 우리의 [독립]을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본》을 상대로 1965년 기본조약을 맺어 독립을 인정받고, 산업화를 추진해 G7 수준의 국가가 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미연합사》를 추가해, 또 한 번 안보를 강화했다(1978). 이승만이 닦은 길을 잘 달려 선진국이 되는 기틀을 만든 것이다.

■ 한반도 최초의 [민국(民國)]

1910년까지 우리 땅에 존재한 나라는 하나같이 [군주국] 이었다. 1948년 우리는 [주권재민의 공화국]을 처음으로 만들어 성공을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는 《건국절》을 갖지 못했다. 좌파가 선점한 [해방]을 대체한 용어로 [광복]을 쓰다 보니 ,《대한민국》이 아니라 《후(後)대한제국》 [복국]을 축하하는 나라가 됐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 광화문에 《조선》의 영웅인 세종과 이순신 동상만 있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대한민국》 화폐에 《조선》시대 영웅인 이황과 이이, 세종이 있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들도 좋지만 [건국] 76년 만에 G10 수준의 나라를 만들어준 [건국]의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 그 시작이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는 《건국절》 제정이다.

이승만의 약점은 《4·19》로 하야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젊은 학생들이 자기희생을 하며 하야를 요구하자, 이를 수용해 흔쾌히 물러났다.

젊은이의 희생을 추앙하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만든 이승만을 [독재] 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기만 하는 모순에 빠져버렸다. [독재를 하지 말라]는 요구를 수용해 물러난 이승만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북한과 좌파가 바라는 바이다. 김정은 과 주사파 는 《대한민국》이 실패한 나라로 있어야 그들이 존재할 수가 있다.

민주화 운동을 평가하는 만큼 [건국]과 [산업화]를 이룬 지도자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해야 한다. 그 시작이 《대한민국》이 이날 이렇게 출범했다고 밝히는 《건국절》 제정이다. 이제는 [독립투쟁]과 [광복운동]은 새로운 [건국]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인정을 해야 할 때이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8/15/20240815000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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