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칼럼] 간난험조 끝에 웃은 진문공

오주한

19년 와신상담 후 마침내 진국군으로
與 당권주자들 ‘대세론’ 깰 수 있을까

 

중이(重耳)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24대 국군(國君)이다. 주류 세력들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으나 끝내 군위(君位)에 올라 춘추오패(春秋五覇) 위업까지 이룬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다.

 

중이에게는 형 신생(申生)과 동생 이오(夷吾)가 있었다. 세 형제의 계모 여희(驪姬)는 제 아들 해제(奚齊)를 새 국군으로 세우려 음모를 꾸몄다. 신생은 극단적 선택을 했고 중이·이오는 해외로 망명했다.

 

해제는 머잖아 이극(里克)이란 자에게 허무하게 목숨 잃었다. 이번에는 혜공(惠公)으로 즉위해 새 대세가 된 이오가 친형 중이를 제거하려 했다. 중이는 19년이나 각지를 떠돌며 자객의 칼끝을 피해야 했다.

 

방랑길은 고단했다. 첫 망명지 적(狄)나라를 떠나면서는 아내에게 “나를 25년만 기다려주오” 말했다. 기약 없는 이별이란 뜻이었으나 아내는 “기다리겠소” 답했다. 위(衛)나라에선 저자에서 구걸하는 처지가 됐으며 제(齊)나라에선 궁궐암투에 휘말려 죽을 뻔했다. 조(曹)나라에선 쫓겨나다시피 했으며 송(宋)나라는 중이의 귀국을 좀처럼 돕지 않았다.

 

중이는 초(楚)나라에서 비로소 두 발 뻗을 수 있었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국군이 된다면 내게 뭘 해줄 수 있소?” 물었다. 중이는 대담하게도 “훗날 대왕과 싸우더라도 몇 수 양보하겠소” 답했다. 초나라 대부 자옥(子玉)은 발끈해 중이를 베려 했다. 그러나 성왕은 중이의 솔직함을 높이 사 후대했다.

 

기원전 637년 이오가 죽고 때마침 기적도 벌어지면서 중이의 간난험조(艱難險阻)는 끝을 맺었다. 진(晉)은 진(秦)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공자 어(圉)를 회공(懷公)으로 추대했다. 인질이 도주하자 분노한 진(秦)은 중이를 진(晉)의 새 국군으로 세우려 했다. 진(秦)의 도움으로 문공(文公)에 즉위한 중이는 허나 외세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송을 침략한 초를 패퇴시켜 주천자(周天子)를 대리하는 패자(霸者) 지위에 올랐다. 중이는 예전 약조대로 퇴피삼사(退避三舍)했음에도 자옥에게 대승을 거뒀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갖은 계교와 이합집산(離合集散)이 펼쳐지는 속에 혹자는 ‘어차피 당대표는 OOO’ 식으로 주장한다. 반대로 혹자는 2600년 전 중이의 전설이 재현되리라 기대한다. 약 한달 뒤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 주목된다.

 

오주한

 

6.24 스카이데일리 지면 포털 발행 예정 칼럼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