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공이 그토록 고토수복에 집착한 까닭
국력확장은 그에 걸맞은 영토 있어야 가능
일본에서 태어나 대륙으로
국성야(國姓爺) 정성공(鄭成功‧생몰연도 서기 1624~1662)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군인이다. 만주족(滿洲族)에게 빼앗긴 본토 수복에 노력했으며 타이완섬을 점령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축출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선 조선 중기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 등장하는 ‘정도령’ 이야기에 영향을 줬다는 설로 유명하다.
정성공은 지금의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히라도(平戶)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해적 정지룡(鄭芝龍), 모친은 하급 사무라이 다가와 시치자에몬(田川七左衛門)의 딸로 추정되는 다가와 마츠(田川松)였다. 마츠가 유녀(遊女)였다는 말도 있다. 정성공의 아명(兒名)은 후쿠마츠(福松)였다.
어느날 히라도번(平戸藩)을 찾은 정지룡은 번주(藩主) 마츠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잔치에 참석한 뒤 마츠와 동침해 정성공을 낳았다. 그러나 애초 정지룡은 부정(父情)이라곤 없었다. 그는 명나라로 훌쩍 떠나 거상(巨商)의 딸과 결혼했으며 정성공은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지닌 채 자라났다. 이 때 정성공이 겪은 일본문화는 훗날 그의 군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해적질로 부를 쌓은 정지룡은 거금을 들여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사들였다. 부패한 명말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미천하고 무식한 정지룡을 멸시했다. 주색잡기로 하루하루 지내다가 뒤늦게 자식 귀한 줄 깨달은 정지룡은 동생을 보내 장남을 데려오게 했다. 이미 재혼했던 모친과 헤어져 7살 무렵 대륙으로 향한 정성공은 히라도의 길거리가 아닌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은 대저택에서 살게 됐다.
태학(太學)에 입학해 당대의 학자로부터 사사(師事)받은 정성공은 가문의 명예를 원하는 부친 뜻에 부응했다. 모범생이었던 장남이 정지룡 눈에 얼마나 예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진실을 알고 난 뒤의 아들의 눈빛을 두려워한 정지룡은 해적출신임을 숨겼다. 정성공은 부친을 그저 명나라 수군(水軍)제독으로만 알고 지냈다.
필사적인 영토 확장의 집념
그렇게 학자의 길을 걷던 어느날 정성공에게 역사적인 일대 대사건이 닥친다. 이자성(李自成)의 난이 발발해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이 1644년 멸망한 것이었다. 설상가상 멀리 요동(遼東)에서 만주족을 막던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본국(本國)이 사라졌다는 충격적 소식에 자포자기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 산해관(山海關)의 문을 열고 말았다.
본토가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유린되고 만주족 팔기군(八旗軍)까지 홍수처럼 밀고 들어오자 도처에서 백성들의 비명소리가 솟구쳤다. 붓을 내던진 채 결연히 떨쳐 일어난 정성공은 피로 얼룩진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깃발 아래 검을 빼들었다.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새 황제로 옹립한 정성공은 남명(南明)정권을 수립하고서 강산 수복에 몸을 내던졌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다. 부친마저 글렀다고 생각하고서 만주족의 청(淸)나라에 투항했다. 북경(北京)에 입성해 이자성을 단칼에 베어버린 청나라의 섭정(攝政) 아이신기오로 도르곤(愛新覺羅多爾袞)은 정성공에게 3개 성(省) 도독(都督)자리를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실패했다. 이제는 청의 관모(冠帽)를 쓴 정지룡도 아들을 달랬으나 실패한 뒤 처형됐다. 정성공은 충효(忠孝)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유교(儒敎)적 가르침에 충실했다.
남명의 영토는 대륙 남부 해안가의 하문(厦门)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성공은 열세에도 불구하고 만인적(萬人敵)의 기세를 발휘했다. 1659년에는 강남의 여러 요충지를 되찾은 뒤 남경(南京)을 포위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아직 수전(水戰)에 취약했던 만주족은 청야(淸野)작전으로 맞섰다. 병역자원을 상실하고 군수물자 조달까지 어렵게 된 정성공은 새 근거지 마련을 위해 남쪽의 타이완섬(포르모사‧Formosa)으로 눈길을 돌렸다.
1661년 섬에 상륙한 정성공은 프로빈티아(Provintia)‧질란디아(Zeelandia)요새 등을 잇달아 함락하면서 네덜란드 측 항복을 받아냈다. 이 때 남명군의 무장은 마치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듯 대륙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안면부 전부와 신체 대부분을 투구‧갑옷으로 감싼 군사들은 포병 엄호사격 아래 방패‧대도(大刀) 등을 들고서 돌격했다.
이들 도수(刀手)는 현대인으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쌀가마니를 들고서 장거리를 능히 행군할 수 있어야 합격 가능했다고 한다. 상세한 모습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일설에는 섬에 정착한 정성공이 네덜란드 여인과 풋풋한 사랑을 나눴다고도 한다. 본토수복에 대한 집념, 외세축출 등의 공로로 정성공은 국성(國姓)을 하사받아 ‘국성야 주성공’이 됐다.
국력은 (C+E+M)x(S+W)
비록 정성공의 반천복명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정성공 사후(死後) 반청복명은 형식적인 기치로 전락했다. 융무제(隆武帝) 주율건 등의 뒤를 이어 남명의 새 황제가 됐던 영력제(永曆帝) 주유랑(朱禮宗)이 청군(淸軍)에게 살해되자 명나라 황실 명맥은 끊어지다시피 했다. 정성공의 손자들은 왕위를 두고 내분을 일으켰다. 결국 동녕국(東寧國‧또는 정씨왕국)은 정성공의 부하였던 청나라 해군제독 시랑(施琅)과의 대규모 해전(海戰) 끝에 1683년 쓸쓸이 멸망했다.
대륙의 새 주인은 만주족이 됐지만 정성공의 전설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안겼다. ‘청나라’마저도 정성공에게 충절(忠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꺾이지 않는 고토(故土)수복‧역적타도의 정신을 기렸다. 상술한대로 조선에서도 정도령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중국공산당에게 쫓겨나 핍박받는 대만도 타이난(臺南)의 정성공 사당에서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 중이다. 이에 질세라 중국도 2004년 샤먼(하문)시에 높이 수십m의 정성공 동상을 세웠다. 일본 일부지역에서도 정성공의 모계(母系)혈통 등을 매개체로 해서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오는 25일의 6‧25 발발 73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미국 참전용사‧유족 방한 등 여러 프로그램이 준비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남북통일 여부를 두고선 찬반이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올해 1월 통일과나눔재단‧조선일보‧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20‧30대 100명 중 59명(토론회 종료 후 33명)은 “통일은 축복이 아니다”고 밝혔다.
어느 게 옳다는 정답은 없다. 그러나 과거 다년간 민간 대북(對北)방송 단체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던 필자 개인적 생각에는, 통일은 필요하다. 인권 등의 문제도 그 근거가 되지만, 보다 현실적이고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국력은 곧 국토(國土) 크기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요7개국(G7),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등 국제사회 주도 국가들은 상당수가 영토대국이거나, 과거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운 나라다.
월남전 후 미국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정치학자였던 레이 클라인(Ray S. Cline)은 국력의 크기를 유형(有形)요소인 국토‧인구‧경제력‧군사력에다 무형(無形)요소인 국가전략‧국민의지를 곱한 값으로 측정(국력=(C+E+M)x(S+W))했다. 많은 인구도, 천연자원 등 경제력도, 경제력에 의한 국민사기도, 경제력‧국민의지에 따른 군사력 등도 모두 그에 적합한 영토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6‧25 73주년을 앞두고 정성공의 강력했던 국토수복 의지가 불현듯 떠오르는 까닭이다.
3대세습동안 세뇌된 저들을 교회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일각에서 주장하는 방법들은 제가 생각하기엔 현실성이 없거나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는 주장들이였는데 좋은 의견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수십년간 나이테 불려온 썩은나무를 한 순간에 잘라내긴 어렵겠지요. 저뿐만 아니라 대북업계 종사자 상당수가 같은 생각입니다만.. 기본부터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적 사상으로 굳건히 무장하고, 북한 사이비독재 사상은 대북방송·USB반입 등을 통해 무너뜨려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유도해야겠지요. 당정군 간부, 보위부원 등 김정은 빼고 상당수가 사상적으로 전향한다면 통일도 이뤄지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우리 육해공군 특전부대부터 보내 북핵 통제권을 시급히 확보해야겠죠.
90년대 중후반에 장마당(시장)이 세워지는 등 이미 북한에선 오래 전부터 변화가 있어온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일성의 오른팔로서 활동했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수년 동안 들려준 전략입니다. 물론 북한 중국 러시아 등에 대한 핵억지력을 위한 (예를 들어) 대한민국 핵무장 또는 한미군사동맹 강화와 같은 무장력 제고도 필수라 생각합니다. 소견이었습니다.
감시합니다.
별말씀을요
이상 만으로 하나 되기엔 멀리까지 헤어진 두 체제
잃어버린 5년 때문에 한참 더 멀어진 듯합니다. 저도 통일이 우리들 살아생전에 과연 가능할지...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