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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솥단지를 든 대통령

오주한

‘힘자랑 날벼락’ ‘민심경청 부흥’ 엇갈린 두 임금

尹, 與 모두의 미래 위해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고대 왕권의 심벌(Symbol)’ 구정

 

나라마다 왕권(王權)상징물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는 천부인(天符印)‧천사옥대(天賜玉帶) 등이 있다. 동쪽으로 가자면 일본은 삼종신기(三種神器)가 대표적이다. 서쪽으로 가면 전국옥새(傳國玉璽)‧구정(九鼎) 등이 있다.

 

구정은 진시황(秦始皇)에 의해 전국옥새가 등장하기 이전 시기 천자(天子)의 상징물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楚)나라 사람이었던 변화(卞和)는 어느날 산중에서 천하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캐냈다. 변화는 옥을 임금에게 바쳤으나 ‘사기꾼’이라는 거듭된 누명 아래 두 다리가 잘리고 말았다.

 

폐인이 돼 통곡하던 변화 소식을 접한 초나라 새 국왕 문왕(文王)이 옥을 다듬자 영롱한 빛깔이 드러났다. 화씨지벽은 각지 여러 군왕(君王)들을 거치다가 천하통일 위업을 완수한 진시황 손에 들어갔다. 진시황은 이 옥으로 전국옥새를 만들게 하고서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명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하리라)’ 여덟 글자를 새겨 넣었다.

 

옥새가 완성되자 구정은 상징성을 완전히 잃어 진나라 말~초한(楚漢)전쟁 무렵 종적을 감췄다. ‘신세대 임금들’로서는 크고 번거로운 구닥다리 상징물보다는 보다 세련되고 휴대하기 편한 옥새를 더 선호했을 것이다. 옥새는 이후 약 ‘1000년’ 동안 천자의 위엄을 보좌했다.

 

옥새 등장 이전까지 왕권의 심벌이었던 구정은 9개의 큰 솥으로 이뤄졌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쓸 제물을 삶는 용도였다. 고대에는 소‧돼지 등 오축(五畜)을 바칠 뿐 아니라 ‘인신공양’도 빈번했다. 전설에 의하면, 아직 실존국가였는지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하(夏)나라 시조 우왕(禹王)이 9개 지방 제후(諸侯)들이 바친 청동을 모아 주조(鑄造)했다고 한다. 구정은 하나라에서 상(商‧은)나라로, 다시 주(周)나라로 소유권이 바뀌었다고 한다.

 

‘권력의 쓴맛’ 알았던 초장왕

 

주 천자가 권위를 잃고 춘추전국시대가 개막하자 구정은 각 군웅(群雄)들 표적이 됐다. 특히 초나라가 그러했다.

 

한족(漢族)의 원류가 된 종족이 주류였던 중원국가들과 달리 묘족(苗族)이 주축이었던 초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와중에 첫 칭왕(稱王)한 나라다. 당시엔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주 천자만이 ‘왕’이라는 칭호를 쓸 수 있었다. 나머지는 오등작(五等爵)에 따라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 등에 임명됐다. 때문에 칭왕은 곧 “나는 주 천자와 동등하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그러나 만인(萬人)의 술안주감이 된 주 천자의 바닥을 기는 초라한 위엄, 초나라의 높은 국력 등에 상당수 주나라 제후들은 쉬쉬했다.

 

첫 칭왕한 초무왕(楚武王)의 후손 초장왕(楚莊王‧생몰연도 기원전 ?~591년)은 노골적으로 구정을 차지코자 했다. 이민족을 물리친 그는 소국(小國)으로 전락한 동주(東周)의 수도 낙양(洛陽) 근처에 이르자 군(軍)을 사열하며 한바탕 무력시위를 벌였다. 위협을 느낀 주나라 정왕(定王)은 왕손(王孫)을 보내 장왕을 대접토록 했다.

 

주나라 사신이 오자 장왕은 대뜸 “구정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고”라고 물었다. 이는 곧 ‘무게가 궁금할 정도로 과인(寡人)은 구정에 대단한 관심이 있다’ 즉 ‘갖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눈치 챈 사신은 “(임금에게는) 덕이 중요하지 솥이 중요한 건 아니다(헛소리 들을 시간 없다)”고 맞받았다. 그러자 장왕은 “우리 초나라는 (모든 군사들의) 창끝만 떼어내도 구정 몇 개쯤은 금방 만들 수 있다(한 줌도 안 되는 게 시끄럽다)”고 협박했다.

 

실제로 장왕으로선 주나라를 밀어버리고 강제로 구정을 취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후대의 전국시대와는 달리 아직 존왕양이(尊王攘夷‧천자를 받들고 외세를 물리친다)가, 천자를 비웃는 것과는 별개로, 주나라 제후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삼국지(三國志) 군웅들이 천자를 해치는 대신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임금을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하려고 서로 아귀다툼 벌이는 걸 생각하면 쉽다.

 

춘추시대 군웅들도 춘추오패(春秋五霸)에 올라 여러 제후 우두머리가 되려고 천자에게 충성하는 척 경쟁했다. 이는 곧 주나라를 쳤다가는 주나라 봉건(封建)제후들의 반초(反楚)연합군 형성 명분을 제공하기 십상이라는 걸 뜻했다. 칭왕과 침략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오거(伍擧)와 같은 초나라 충신들은 이를 적극 강조했다. 장왕도 이러한 민심(民心) 흐름을 깨닫고서 무력시위를 중단한 뒤 선뜻 귀국했다. 초나라는 전국시대 말기까지 살아남아 진(秦)나라와 천하패권을 다투고, 통일위업의 진제국(帝國)이 멸망하자 부활해 진의 위치를 일시적이나마 대신했다.

 

‘권력의 쓴맛’ 몰랐던 진무왕

 

장왕과 달리 눈치 없는 신하를 중용한 탓에 천벌이라도 받았는지 힘자랑 하다가 목숨까지 잃은 인물이 있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 진무왕(秦武王‧기원전 329~307)이 주인공이다.

 

거구에 힘이 장사였던 진무왕은 저리질(樗里疾)‧감무(甘茂) 등 충신들을 기용하는 등 나라를 무난하게 경영했다. 최초로 승상(丞相‧재상)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였다고 한다. 능력은 있을지언정 간사한 혓바닥으로 악명 높았던 종횡가(縱橫家)의 장의(張儀)를 경계했고, 출병(出兵) 후 의도적으로 공세를 늦춘 신하에게 죄를 묻는 대신 입장을 존중했다. 해당 신하는 끝내 적진을 함락했다.

 

하지만 진무왕에게는 더욱 총애하는 측근들이 있었으니 이름난 역사(力士)였던 맹열(孟說)‧임비(任鄙)‧오획(烏獲) 세 사람이었다. 그 때까지도 존재했던 주나라 수도 낙양을 찾은 진무왕은 세 명과 ‘구정 들기 시합’을 했다. 한 때 천자의 귀한 보물이었던 구정은 그 무렵 각 국 임금들의 ‘구경거리’ ‘관광상품’ ‘현존하는 골동품’ ‘장난감’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임비‧오획은 혹 옥체(玉體)가 상할까봐 “무능한 저희가 어찌 감히 주상(主上)께 견줄 수 있겠나이까”라며 엎드렸다. 차마 어마어마한 무게의 구정을 들 자신이 없었던 진무왕이 내심 안도하며 엄지척을 할 찰나, 눈치 없던 맹열은 “제가 들어 보이겠습니다”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는 실제로 가뿐히 구정을 들어올렸다. 진무왕‧임비‧오획 등은 속으로 “저 미친놈이 기어이 일을 냈구나”라며 경악했다.

 

‘천하제일 인간기중기’를 자처했던 진무왕은 임금의 체면이 있기에 발끈해서 구정에 덤벼들었다. 초롱초롱 순진무구한 눈망울의 맹열 빼고 모두가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겨우겨우 구정을 떠받친 진무왕은 맹열에게 이기기 위해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전진했다. 얼마나 용을 썼는지 기록에는 “두 눈에서 피가 흘렀다”는 내용이 있다.

 

사람 몸이 무쇠가 아닌 이상에야 버틸 리 없었다. 한순간에 다리 힘이 풀린 진무왕은 구정을 놓치고 말았다. 중력에 의해 자유낙하(自由落下)한 구정은 진무왕의 ‘정강이’를 강타했다. 정강이가 깔끔히 사라져버린 진무왕은 과다출혈 끝에 당일을 넘기지 못하고 23세 젊은 나이에 심정지(心停止) 상태가 됐다. 임금을 그릇된 길로 가자 부추겼던 맹열은 거열(車裂)에 처해졌으며 삼족(三族)이 멸족(滅族)됐다. 훗날 진나라는 천하를 합병(合倂)했으나 공교롭게도 2대만에 멸망했다.

 

제 아무리 노련해도 집 무너지면 끝

 

윤석열 대통령을 둘러싸고 ‘수능 킬러문항(초고난도 문항)’ 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각계에선, 물론 지지 목소리도 있지만, 그릇된 정책이라는 비판에서부터 발표시기를 잘못 택했다는 등의 지적이 이어진다. 22일 발표된 한 국가원수(元首) 직무수행 평가조사에서도 윤 대통령 지지율은 30%대에 그쳤다(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지지율은 대상인물의 정치적 위상 현 주소를 나타내는 지표다. 한 두 개도 아닌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임기 초부터 30%대 안팎 지지율을 줄곧 기록한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단순히 ‘여론조사 왜곡’ 의혹 제기로 넘어갈 게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왜곡됐다” “우리 편 빼고 다 왜곡됐다”는 건, 감히 단언컨대, 더불어민주당과 다를 바 없는 음모론 숭배행위이자 견강부회(牽強附會)다.

 

대통령 지지율은 비단 대통령 자신의 문제만으로 끝날 수도 없다. 특정정당 소속 전임(前任) 대통령에 실망한 국민은 차기 대선에서 해당정당 소속 후보에게도 고개 돌리기 일쑤다. 멀리 갈 것 없이 윤 대통령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실망한 유권자들 선택으로 인해 0.7%p 차이로 신승(辛勝)할 수 있었다.

 

언론계를 떠난 상태인 필자가 자연인(自然人)으로서 고언(苦言)한다. 윤 대통령 정책설계자들은 맹열의 자세를 지양(止揚)하고 오거 등의 자세를 지향(志向)하면서 두 번 세 번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구정이나 수능 같이 민감한 건 신중히 다뤄야 한다. 윤 대통령 또한 무의미한 힘자랑에 나섰던 진무왕이 아닌 민심을 읽은 초장왕의 태도를 견지(堅持)해야 한다. 바라건대 온갖 정치공학적 이유를 떠나 차기 총‧대선에서 패하면 윤 대통령을 포함해 여권 모두의 미래는 없다는 점을 망각하지 말길 바란다. 권력은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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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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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6.23

    사교육 끄집어낸거보면 분명 표심생각해서 한 행동인거같은데 그것마저 헛발질을 하니 기가찰 노릇입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6.23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홍 시장님 말씀대로 정치는 종합예술인 것으로 압니다. 또한 살얼음판인 것으로 압니다. 한신처럼 신중 또 신중을 기해서 승부수 끝에 승리를 거두는, 다시 말해 5000만 국민 대다수를 만족시키는, 그 성취감이 사라진 현 정치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여연에 한 때 몸 담았던 섬노예(여의도)로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 위하여
    2023.08.02

    한 사람의 독선과 오만과 독주가 극심하다 보니 어떠한 고언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귀 자체를 닫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

    이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베개송사를 이겨내지 못하니 더 힘들죠.

     

    언제나 명석한 분석으로 임의 글을 읽으면 더위를 잠시 잊게 됩니다.

    늘 감사드리고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