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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세상에 믿을 놈 없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믿고 맡겼더니 흉노와 내통한 漢 황족

 

기원전 202년 진시황(秦始皇)에 이어 천하를 재통일한 한고조(漢高祖)는 병권(兵權)을 지닌 이성왕(異姓王)들에 의한 변고, 천하가 재차 외침(外侵)에 직면할 가능성을 늘 두려워했다.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의하면 한고조는 사망 한 달 전 문무백관(文武百官)과 부인 여후(呂后)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백마(白馬)를 하늘에 바치고서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을 남겼다. “국성(國姓‧유씨)이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힘을 합쳐 그를 죽여야 한다!” 백관과 여후는 엎드려 명을 받들었다. 바로 백마지맹(白馬之盟)의 고사다.

 

이같은 유언은 여씨(呂氏)천하를 꿈꿨던 여후 관련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 의하면 한고조 사후(死後)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한 여후는 기원전 187년 개국공신인 우승상(右丞相) 왕릉(王陵) 등을 불러들였다. 제 친족을 왕위(王位)에 올리고 싶다는 여후의 말에 왕릉은 단호히 답했다. “고조께서 백마를 잡아 ‘국성이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런데 또다른 개국공신인 주발(周勃)‧진평(陳平)은 “지금 태후(太后‧여후)께서 황권(皇權)을 대행하시니 여씨를 왕으로 삼지 못할 거 뭐 있습니까?” 말했다. 조회가 끝나자 왕릉은 “그대들도 고조와 (백마의) 피를 바르며 맹세하지 않았나? 무슨 낯으로 지하의 고조를 뵈려 하는가?” 꾸짖었다. 주발 등은 “조정에서 논쟁하는 건 우리가 승상보다 못하나 사직(社稷)을 보존하는 건 승상이 우리보다 못할 것이오” 답했다.

 

실제로 주발 등은 머잖아 여씨 일족을 처단하고 천하를 안정시키게 된다. 여후가 기원전 180년 눈 감자 주발 등은 우선 여후의 조카인 상장군(上將軍) 여록(呂祿)의 병권을 뺏으려 했다. 여록은 “자기 봉지(封地)도 있는 사람이 언제까지 장안(長安)에 있으려 하나? 이제 슬슬 내려가 편하게 살아야지”라는 말에 처음엔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여후의 여동생인 여수(呂嬃)가 “네가 군권(軍權)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다 죽는다!”고 화를 내자 망설였다.

 

주발은 이판사판으로 북군(北軍) 진영에 쳐들어가 황명(皇命)을 사칭한 뒤 여록에게 “네 병마(兵馬)를 모두 내게 맡기라고 하신다”고 했다. 여록이 엉겁결에 인장(印章)을 넘기자 순식간에 병권을 장악한 주발은 “여씨를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한나라를 따를 자는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좌단‧左袒)!” 외쳤다. 모든 병사가 좌단하자 여씨 일가는 그 날로 척살됐다.

 

이후 한나라는 문경지치(文景之治)의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상하가 합심하는 듯했다. 그런데 기원전 154년 한나라는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之亂)이라는 대위기를 또다시 맞았다. 조정이 군국제(郡國制)를 사실상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려 하자 여러 제후왕들은 크게 반발했다. 오왕(吳王) 유비(劉濞‧훗날 삼국지의 유비와는 동명이인)를 중심으로 벌떼처럼 일어난 일곱 명의 제후왕은, 덩달아 봉기하려던 일부 왕은 국상(國相‧재상)에 의해 감금되는 등 몸개그 벌이긴 했으나, 봉건(封建)세습 유지를 요구하면서 거병(擧兵)했다.

 

여기까지는 같은 황족(皇族)끼리의 그저 그렇고 그런 내전으로 볼 수 있다. 누가 이기든 같은 국성이기에 한나라는 존속될 수 있었다. 헌데 믿기지 않는 음모가 꾸며졌다가 재깍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고조와 만백성이 “그래도 나라를 팔아먹진 않겠지” 철석같이 믿었던 황족이, 유비에 호응했던 조왕(趙王) 유수(劉遂‧생몰연도 ?~기원전 154)가 오직 제 ‘권력욕’ 하나 때문에 북방의 이민족 ‘흉노(匈奴)’와 ‘내통’하고서 한나라 일부 또는 전체를 ‘들어 바치려’ 했던 것이다. 한 때 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흉노와 말이다.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은 이 대경실색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흉노의) 군신선우(軍臣單于)는 즉위 4년 만에 (한나라와의) 화친을 끊고 상군(上郡) 등으로 군사를 보내 무수한 (한나라) 백성을 죽이고 약탈한 뒤 물러났다. (중략) 문제(文帝)가 붕어(崩御)하고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조왕 유수가 몰래 사신을 (강대한) 흉노로 보내 내통했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흉노는 (유수의 제안에 따라) 조나라와 짜고 한나라 변방을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중앙군이 조나라를 포위해 함락시키자 흉노는 작전을 단념했다”

 

오로지 제 부귀영화에만 눈이 멀어 외적(外賊)과 사통(私通)했던 역적의 말로는 비참했다. 천우신조로 이 ‘호로x끼’의 암계(暗計)를 알아챈 한나라 조정은 선수 쳐서 곡주후(曲周侯) 역기(酈寄)를 보내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치게 했다. 흉노가 채 오기도 전에 날벼락 맞은 유수는 일곱 달을 항전(抗戰)했다.

 

그러나 제(齊)나라를 도우러 갔던 난포(欒布)가 임무를 끝내고 역기를 지원하러 옴에 따라 성곽은 그대로 무너졌다. 역기‧난포가 수공(水攻)을 펼쳐 성내가 온통 물바다가 되고 곡식‧병장기는 썩으며 역병이 돌자 흉노를 끌어들여 제왕(帝王)을 꿈꿨던 유수는 극단적 선택으로 어리석은 삶을 마감했다.

 

최근 전직 광역단체 부지사가 ‘대북송금’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년에 가까운 실형(實刑)을 선고받는 일이 있었다. 이제 수사당국 칼날은 해당 부지사 재임 당시 상관이었던, 대북송금을 재가(裁可)했을 가능성이 있는 전직 광역단체장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전직 단체장을 지지해온 이들 상당수는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아마도 크게 놀랐으리라 생각한다.

 

아직 전직 단체장의 해당 혐의에 관한 재판이 실시되지는 않았으나, 만에 하나 후일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다면 우리나라 안보(安保)실태에 큰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앞에선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입에 발린 사탕 같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공인(公人)이라 해도 가면 뒤의 진짜 얼굴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자칭 진보란 사람들 상당수가 “요즘 세상에 간첩이 어딨나”고 대(對)국민 세뇌를 해온 게 최소 십 수년째다. 이제는 국민 모두 미몽(迷夢)에서 깨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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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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