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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대북전단 살포 환영한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조폭’ 흉노, ‘셔틀’ 漢에 고개 숙이다

 

흉노(匈奴)는 기원전 4세기 무렵 아시아대륙 북방 오르도스(Ordos)에 등장한 민족이다. 흉노‧험윤(玁狁) 등은 문명세계가 붙인 민족명으로서 그들이 스스로를 뭐라 일컬었는지는 알 수 없다.

 

흉노란 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원(發源)한 유목(遊牧)민족 또는 그들의 습성이 동아시아에 흘러들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단일 인종‧문화권은 아니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산 것으로 여겨진다. 흉노와 동시대 인물인 사마천(司馬遷)이 기원전 2~1세기 사이에 편찬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기(史記) 등은 이 북방민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흉노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서 순유(淳維)라 불린다. 도당씨(陶唐氏)‧유우씨(有虞氏) 이전엔 산융(山戎)‧험윤‧훈육(薰粥) 등 여러 종족이 북쪽 변경에 살면서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가축을 길렀다. 기르는 짐승은 대다수가 말(馬)‧양‧소인데 낙타‧나귀‧노새‧버새(駃騠‧수말과 암나귀의 교잡물로 출생 이레 만에 어미를 능가함) 등도 키운다.

 

물(水)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기에 정주지(定住地)나 성곽‧농지(農地)는 없으나 각자 가진 땅은 있다. 문자가 없기에 오로지 말로서 (구두로) 서로 약속한다. 어린아이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어려서는 활을 당겨 새‧쥐를 잡고 점점 자라면서는 여우‧토끼를 사냥해 그 고기를 먹는다. 남성들은 활을 잘 다루며 전원 무장기병(騎兵)이 된다.

 

급하면 싸워 공격하는 걸 익혀 (주변 부락이나 문명세계를) 침공하는 게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다. (적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땐 활과 화살을 쓰고 가까이 붙으면 창칼을 휘두른다. 싸움에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나는데 달아나는 걸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이익이 있는 곳에 있고자 할 뿐 예의를 알지 못한다.

 

임금부터 아랫사람까지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고서 그 가죽과 털로 옷을 지어 입는다. 젊은이들이 기름지고 맛있는 부위를 먹고 나면 늙은이들이 나머지를 먹는다. 젊고 건장한 자를 중히 여기고 노약자(老弱者)는 경시(輕視)한다. 아비가 사망하면 그 첩들을 (후계자가)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나머지 형제가 그 아내들을 취한다(형사취수‧兄死娶嫂). 이들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 꺼리지 않으며 자(字)가 없다”

 

흉노는 진(秦)나라 시기에는 호(胡) 등으로 불렸다. 이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합종연횡(合從連橫)에 관여해 종종 진나라를 쳤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221년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건 호다” 단언하며 몽염(蒙恬)을 보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연결하게 했다.

 

사분오열 상태이던 흉노는 기원전 209년 묵돌(冒頓)이 아버지 두만(頭曼)을 죽이고 선우(單于‧황제)에 즉위하면서 급속도로 통합됐다. 이때부터 북방 유목민족과 남방 문명세계의 길고 긴 악연이 시작됐다.

 

진나라에 이어 대륙을 차지한 한(漢)나라는 기원전 201년 한신(韓信‧배수진의 한신과는 동명이인)을 한왕(韓王)에 봉해 흉노를 막게 했다. 바로 그해에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한신의 봉지(封地)로 진격했다. 한신은 힘 대신 협상으로 사태를 마무리 짓고자 묵돌에게 자주 사신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고조(漢高祖)는 한신이 흉노와 내통하는 걸로 덜컥 의심해버렸다. 역으로 이 소식을 접한 한신은 지레 겁먹고서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졸지에 전진기지가 적 수중에 넘어가게 된 한고조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는 기원전 200년 대군을 이끌고 북방전선(戰線)으로 향했다. 묵돌도 지지 않고 군사를 이끈 채 남진(南進)했다. 한고조는 처음에는 승전보를 올렸다. 묵돌이 보낸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의 2만 유목기병을 격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묵돌의 미끼였다. 한고조가 2만과 맞서 싸울 사이에 겨울이 찾아왔다. 살을 에는 북방의 조드(Dzud‧혹한)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중원병사들이 얼어 죽거나 탈영했다. 한고조는 신속히 승부를 내기 위해 묵돌이 있는 곳으로 진격했으나 도리어 백등산(白登山)이란 곳에서 흉노의 포위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남은 건 ‘구걸에 의한 평화’였다. 한고조는 매년 막대한 공물(貢物)을 바치겠다 약조하고서, 또 묵돌의 연지(閼支‧황후)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패하면 묵돌은 한나라 미녀들을 얻을 거고 그럼 넌 뒷방신세다” 설득하고서 겨우 풀려났다.

 

이후 약 반세기 동안 한나라는 흉노의 ‘아우국(國)’이 돼 갖은 설움을 겪었다. 흉노는 한나라 백성들이 등골 휘게 마련한 공물은 그것대로 받아먹으면서 수시로 “너무 적잖아” 시비 걸고 장성을 넘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란 사자성어도 원래는 “가을이 되면 말이 살찌고 (북방 가축들 상당수가 얼어 죽는) 겨울이 되면 흉노가 온다”는 의미로 쓰였다.

 

묵돌은 나아가 한고조의 아내 여후(呂后)에게 사람을 보내 “서로 가진 걸로 서로 없는 걸 메워봄세”라는 성희롱을 가하기도 했다. 폭발한 여후는 즉각 군대를 소집해 묵돌을 치려했으나 절대적 힘의 열세라는 현실 앞에 포기했다. 여후와 인척관계였던 번쾌(樊噲)가 북벌(北伐)에 찬성하자 강직한 계포(季布)는 “마땅히 번쾌를 참해야 한다. 수십만을 이끈 고조께서도 흉노를 어찌하지 못했는데 번쾌는 10만으로 오랑캐를 토벌할 수 있다 장담하고 있다. 이는 태후(太后‧여후)를 기망하는 행위다!” 외치며 말렸다.

 

겉으로는 굴복하는 척하고 안으로는 문경지치(文景之治)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던 한나라는 ‘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기원전 141년 즉위한 7대 황제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생몰연도 기원전 156~기원전 87)은 두둑한 국고(國庫)를 바탕으로 강군(強軍)을 육성하고 외교에 힘썼다. 오로지 기골이 장대한 서역(西域) 한혈마(汗血馬)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키는가 하면 흉노를 협공할 동맹국을 찾으려 장건(張騫)을 서쪽으로 파견했다. 이 때 장건이 개척한 길은 머잖아 실크로드(Silk Road‧비단길)로 발전하게 된다.

 

무제는 한편으로는 신분 가리지 않고 명장(名將)을 발굴해냈다. 양치기 출신인 위청(衛靑)과 저자거리에서 나고 자란 곽거병(霍去病)이 그들이었다. 특히 곽거병이란 기린아(麒麟兒)는 사나운 유목기병을 상대로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쳤다.

 

기원전 123년 첫 출정에서 곽거병은 수백 기병만을 거느린 채 미친 기세로 북진(北進)해 흉노 수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3년 뒤에는 무려 표기장군(驃騎將軍)에 임명돼 출진한 뒤 흉노의 최대 목축지이자 상징적 의미가 큰 기련산(祁連山)을 초토화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에는 기련산을 잃은 흉노인들의 고통이 담긴 서하구사(西河舊事)란 민요 가사가 실려 있다.

 

곽거병은 ‘보급은 적진에서 취하면 된다’는, 누구도 함부로 따라 해선 안 되는, 사마천마저 “천행(天幸)이 따랐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한 위험한 전술을 구사했고 실제로 매번 성공했다. 저자거리 출신 영향인 듯 병사들과도 허물없이 동고동락했다. 하루는 무제가 하사한 깨끗한 술 한 병이 도착하자 흐르는 강물에 뿌린 뒤 “우리 모두 나눠먹고 취하자!” 병사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장졸들 사기가 크게 고취됐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곽거병이 술을 흘려보낸 곳은 현재 주천(酒泉‧주취안)이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곽거병은 기원전 119년의 마지막 출정에서는 바이칼 호수(Lake Baikal)까지 진출하는 등 북방을 마구 유린하면서 흉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마침내 흉노는 일부는 서쪽으로 달아나 훈족(Huns)이 되고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되는 등 묵돌 출현 이전처럼 사분오열됐다. 흉노는 이후로 다시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으며 서기 5세기경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국가로서의 흉노는 서기 216년 마지막 선우 호주천(呼廚泉)의 위(魏)나라 입궐(入闕)을 계기로 이미 스러졌다. 한나라 백성들은 죽음과 상납의 고통에서 비로소 해방됐다. ‘힘에 의한 평화 구축’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6일 새벽 대북(對北)전단 20만장을 살포했다는 소식이다. 일부는 해당 단체가 북한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반대 중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 시기 대북송금 등 굴종외교라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의 유화(宥和)정책을 펼쳤을 때도 1‧2차 연평해전, 미사일 사격, “삶은 소대가리” 등 끊임없이 도발하고 핵(核)을 개발했다.

 

조직폭력단에게 “잘 봐 줍쇼” 돈을 상납하면 돌아오는 건 “더 내놔”다. 조폭은 유독 검경(檢警)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된다고 한다. 북쪽 조폭집단에게 필요한 건 ‘튼튼한 몽둥이’다. 첨언하자면, 또한 독재자에게 억압받는 북녘동포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두 번째로 첨언하자면, “네가 휴전선 일대 주민들 심정을 아냐” 비판 나올까봐 말하자면, 필자는 약 10년 전 북한이 장사정포(長射程砲) 대남사격을 대놓고 예고했을 때도 판문점 인근 전단 살포 현장에 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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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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