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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정치파동-A>: 미국-야당 ‘이승만 제거’ 음모...이승만, 대통령직선제 개헌 캠페인...미-야, 장면 뽑으려 '국회쿠데타' 기도...이승만, 계엄령 반격

뉴데일리

개성과 판문점 일대에서 휴전협상을 저지하려 ‘특공대 습격’ 지령까지 내렸던 이승만은 새로운 카드를 뽑았다. 한국방첩대의 휴전회담장 총격사건으로 공산측이 유엔 측에 시비를 걸며 소동을 벌일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8월15일 광복절 ‘정부수립 3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조항을 수정하는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광복절 3주년 이승만 “대통령 직선제 해야 살아남는다”

[부산14일발AP합동] 8월15일 정부수립 3주년을 맞이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이리 준비된 성명서에서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립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에 의존한다”라고 요지 다음과 같이 기념사를 발표하였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면서 유엔이 공산침략자와의 협상에서 정당한 결말을 짓고 모든 자유국가들을 위한 집단적 안보정책이 수립될 것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우리 민국정부의 탄생과 존립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에 의존하고 있다.오늘 조용한 아침 우리 가까이 자유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우리가 현재 목표로 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은 확고부동한 평화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합심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희망인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공산진영과 민주진영 간에 전개된 거대한 세계적인 쟁패에 휩쓸려 들어간다는 사실이다.이 양사상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2자 중 하나만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우리 세대가 봉착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위대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다.우리는 합심하여 민주주의를 보호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공산주의에 희생물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정부의 진실한 기초로서 국민이 가자의 그 정당한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의 2개 조항 수정을 국회에 요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제로 할 것이며, 또 하나는 국회를 양원제로 할 것인데,이것은 우리 국가를 민주주의적으로 건전하고 안전하게 하기위한 것이다.나는 모든 국민들에게 각자가 선출한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이 2개 수정안을 지지하도록 요구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조선일보] 1951년8월16일자)

이승만의 ‘직선제 대통령’ 개헌은 오래된 구상이었다. 독립운동 시절, 미국에 망명한 이승만은 프린스턴대 총장이자 친밀한 스승 윌슨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운동을 도우면서 “미국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국민이 선거인단을 선출하여 그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식 간접선거를 지켜보면서 그는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를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해방후 3년간 좌우진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엔 외교로 다급하게 건국하는 마당에 5.10총선후 헌법제정과정에서는 야당의 내각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게 고작이었다. 건국정부 수립과 국가 독립선언이 다급하므로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선제’ 그것은 이승만의 ‘튼튼한 국민국가’ 만들기 구상의 원점이다. 기념사에서 말한 것처럼,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의 패권 쟁탈전에 휩쓸려 죽지 않으려면 “정부의 진실한 기초로서 국민이 각자의 정당한 지위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정부는 국민이 자기 손으로 지도자를 뽑아 국민정부를 세워야 할 것인데, 다시 말하면 헌법 제1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 국가’로 되어야만 강대국 패권쟁탈시대 공산주의의 희생물을 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산군과 싸우면서 미국과 맞서온 이승만의 ‘국민국가 형성”의 사상적 뿌리이며 신생국 민주정치를 망칠 내각제를 거부하는 민주철학의 한 단면, 국민의 힘을 모아 국가위기를 돌파하려는 이승만식 ’국민정치’였다.

◆부산정치파동의 배경...제헌부터 건국, 6.25전야까지

이승만의 ‘직선제’와 야당의 ‘내각제’ 헌법개정 대결이 바로 유명한 부산정치파동이다. 그 파동의 뿌리는 건국시 헌법제정과정에서 시작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각제 헌법을 만들어 집권하려던 한민당의 뜻과 달리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요구해 하루밤새 헌법조항을 수정해야 했고, 내각 구성에 ‘총리+장관6명’을 요구한 한민당의 조각제안을 이승만이 물리치고 ‘딱 한명만 입각‘ 시킴으로써 ’건널 수 없는 강‘이 만들어졌던 과정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다. 그날로 정파들이 헌법을 ’내각제로 환원‘하는 개헌을 추진했음도 보았다. 건국전후부터 권력투쟁에 집착했던 국내정파들의 움직임을 되돌아 짚어보자.

◉1949년◉ 제헌의원 임기연장 개헌 요구=야당은 건국정부 출범시기부터 개헌을 추진하였지만 ’제주4.3폭동‘과 ’여수순천 군반란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해야하였고, 파리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승인 외교 등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헌‘을 요구하기는 염치가 없었다. 김성수 한민당은 건국 다음해 1949년 2월10일 새로운 진영을 구축한다. 신익희(申翼熙)의 대한국민당과의 합당이다. 당명은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으로 정하고 우선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철학 ’일민주의‘을 내걸었다. 이승만세력 국민회와의 연대도 모색한 것이다. ’내각제 개헌카드‘를 숨긴 국회의원들은 일단 ’임기연장을 위한 개헌안‘이란 꼼수를 들고 나온다. 제헌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인고로 국내외 정세가 불안한 신생국의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국회의원 임기를 4년으로 연장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져 5월부터 8월까지 김약수 부의장을 비롯, 소위 소장파 좌익국회의원들 10여명이 구속되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결국 이 ’임기연장 개헌안‘은 그 위급한 국내외 정세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권력만 챙긴다‘는 따가운 눈총를 받자 이듬해 1950년 1월 스스로 거두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첫 내각제 개헌 시도=국회가 미군철수를 결의한 프락치사건 수사가 한창 어수선할 무렵, 민국당은 임기연장개헌안을 철회한 열흘 뒤에 용기를 낸다. ”부결을 각오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공식적으로 국회에 제출한 것이다. ([동아일보] 1950.1.28.) 진작부터 내각제 개헌 움직임을 경계한 이승만은 ”한국 현실에 안 맞는 제도로서 시기상조이며 국운을 기울게 하는 것“이라며 반대를 표명하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국회의원들이 사적(私的) 권력만 챙긴다“며 개별적으로 설득하였다.개헌안은 3월15일 표결에 부치자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미군 철수에 따라 남침 위협이 급격히 높아진 상황에서 국회의 ’일탈‘이 이어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좌파는 공산당에 놀아나고 우파는 권력밖에 모르는 판국이니 전쟁 나면 이 나라는 과연 누가 지킬 수 있느냐?“주한 미군은 1년전 6월말까지 철수를 완료하고 고문단만 남았고, 38선에선 북한군의 국지공세가 하루도 그칠 날이 없을 때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이승만 대통령은 걱정이 태산이다. 북한의 남침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제헌의회 임기가 만료되는데 제2대 총선을 하느냐 마느냐...국내외 정보들은 북한공산군의 침략이 임박했다며 얼음이 풀리는 봄부터 장마가 오기 전 6월이 가장 위험하다는 정보가 잇따랐다. 그래도 선거는 헌법대로 실시해야한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이 보여주듯이 제헌국회에는 신생 대한민국을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많았다. 특히 총선과 건국을 반대한 김구의 한독당 세력 등은 ’무소속‘이란 위장 간판으로 당선되어 다수를 점유하고 있었다. 이번 2대 총선에서는 될수록 자유세력이 주도권을 잡아야 할 텐데 이승만의 고민은 깊어진다. 그때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선거 연기 말라‘는 항의각서를 날려 보냈다. 무초대사의 촉구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국무회의에서 소리내어 낭독한 대통령 이승만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열차를 탄다. 미국의 내정간섭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승만은 2대총선 유세에 나서 3남(三南)지방을 순회하며 특정인사를 지원하는 유세가 아니라 ”자유인사를 잘 보고 선택해 달라“는 계몽강연을 이어갔다. 당시 내무부가 ’적색 후보자‘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들어갔기에 정파들 사이에서 반발하는 소리가 높아졌다.무려 39개 정당-사회단체가 10.5대1의 경쟁을 벌인 5월30일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또 우파의 참패로 나타났다. ”중간파“라 자칭한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어, 의원정수 210명중 60%가 넘는 126명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말았다. 소속정당이 없는 이승만 지지계열도 줄어들고 김성수의 민국당은 24명 꼴찌였다.

◉김성수, 미국에 지원 호소=미국은 유엔결의를 통해 건국한 대한민국을 초장부터 주시, 반소반미 성향의 이승만 대통령을 군정때 하지가 그랬듯이 밀착 체크하였다. 제2대 총선을 앞두고 경찰이 후보자들의 사상조회를 진행하자 미국측은 노골적으로 압력을 가했다.이승만은 내무장관 김효석(金孝錫,1895~1966)이 경찰에 한민당계를 대거 중용하자 선거의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장관을 바꾸었다. 후임 백성욱(白性郁, 1897~1981)은 불교 승려로서 동국대학교수직에서 선거관리 내무장관이 되자 경찰간부 200여명을 이동하는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였다. 여기서 한민당도 미국도 크게 반발한다.한민당 김성수는 미국대사관에 달려갔다. 무초 대사가 귀국 중이므로 대리대사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드럼라이트는 총리서리 신성모를 만나 ”백성욱 장관이 경찰인사를 하면서 자기를 무시했다“고 불만을 제기한다. ”대통령이 경찰인사를 잘못해서 민국당과의 긴장이 심각해지고 현 내각이 붕괴되는 사태가 생길지 모른다“면서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소리친다. ”미국 말 안 들으면 내각을 엎겠다“는 협박이다. 김성수는 이승만의 경찰인사가 선거에서 민국당을 약화시켰다며 비난하였다.

당시 걸핏하면 미국대사관에 손을 뻗치는 인사들은 정치인들만이 아니었다. 경제 사회 각계의 유력자들은 미국대사관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풍조가 조선시대 사대주의자들을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니 미국의 노골적인 내정간섭도 구한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처럼 각 분야를 좌지우지하는 ’빽‘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조용중 [대통령의 무형혁명] 나남출판, 2004)

★’1.4후퇴‘ 국회의원들 부산에서 ’내각제 개헌‘ 투쟁

2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지 한 달도 안돼 6.25침략전쟁이 터진다. 국회 개원식도 못한 국회의원들은 부산 피난살이 4개월을 겪어야했다. 그동안 국회의원들의 일본밀항 소동이나 아들 병역기피 등 부패 양상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다. 이번엔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 또 다시 임시수도가 된 부산으로 피난간 정치인들이 이번엔 무슨 일을 벌이려나? 또 다시 권력투쟁이다. 두 번째 부산 피난국회 두 달째 2월부터 야당은 내각제 개헌논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여기에 선공(先攻) 카드를 뽑는다. 그 동안 내각제를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대통령 직선제‘(直選制)와 국회 양원제(兩院制) 개헌안이 그것이다.”이것은 급속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북 총선거를 실시한 다음에는 즉시 상-하 양원을 만들어야하고, 대통령은 직접 국민이 투표하여 선출하도록 헌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이 사업까지 완수하면 내가 일생에 하고자 하던 일은 다 하는 셈이 될 것이다“([조선일보] 1951.2.11.)

다음해 1952년은 제2대 대통령 선거의 해, 건국전야 국회에서 헌법의 간접선거 규정에 따라 초대대통령에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었던 이승만은 2대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직접투표 선거, 즉 직선제를 통해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평생의 염원‘을 완성하는 일임을 기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왜 ’직선제가 평생의 소원‘이란 말인가? 위에 소개한 이승만의 광복절 기념사에서 보듯이 그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나온다. 이승만의 뒤를 계속 따라가 보자.

★정당 무용론자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

국민의 힘을 모으는 방법은 국민 정당의 조직이다. 진작부터 정당 무용론을 펼치며 소속정당 없이 국민의 중심에서 국민을 이끌겠다던 이승만이 확 달라졌다. 야당과 개헌소동을 겪고 있던 4월경 이승만은 농민총연맹과 노동총연맹 대표들을 부산 경무대로 불렀다. 그들이 ’대한노농당‘(大韓勞農黨) 결성을 추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네들은 노농당을 조직했다지? 나는 쌍놈당을 착수했네” (조용중, 앞의 책)뼈있는 농담이었다. 구한말 20대 청년 이승만은 ’쌍놈‘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거리투쟁 ’만민공동회‘ 연단에 백정, 신귀료 장수, 기생, 머슴 등 천민들을 내세워 ’백성의 소리‘를 토하게 하였고, 감옥에서도 “쌍놈’들이 잡혀 오면 앞장서서 한글을 가르치고 도와주었다.그의 ‘쌍놈당’은 바로 아직도 양반의식에 사로잡힌 민국당 지주계급을 겨냥한 칼날이다. ◉두개의 ‘자유당’ 등장=이승만을 따르는 친위조직들이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당을 만들었다. 이승만은 당명으로 ‘통일노농당’을 지목했지만, 공화당, 민주사회당, 통일당 등등 가운데서 ‘자유당’(自由黨)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이 탄생한다. 그런데 창당대회가 열린 23일 같은 날 국회 원내와 원외에서 2개의 자유당이 두시간 간격으로 창당대회를 열었다. 원내측은 경남도청 피난국회에서 360명의 대의원으로 창당하고 원외측은 부산 동아극장에서 400여명의 대의원이 참석, 당수에 이승만, 부당수에 초대총리 출신 이범석을 추대하여 출범한다. 이승만은 원외측을 지원하였는데 ‘통일없는 휴전 반대, 대통령 직선제,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 조속실현‘ 등 8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두 자유당은 이승만의 ’쌍생아‘ 격으로 정치노선은 정반대였다. 이승만의 지지를 못 받는 원내측은 반(反)이승만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승만은 표면적으로는 어느쪽 지지도 밝히지 않고 두 정파를 조정하는 노련한 정치 책략가의 면모를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부산일보사 [임시수도 1000일] 1984)

◆새해 첫날 대통령의 ’경고‘ 메시지...부산정치파동의 신호탄

마침내 제2대 대통령 선거의 해가 밝았다. 1952년 부산정피동의 해!이승만대통령의 ’년두사‘(年頭辭)와 새해 메시지가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진해1일발 UP-대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남북한이 통일되기 전에 공산군와의 정전협정이 조인된다면 서방 연합국은 남한으로부터 오는 곤란을 각오하여야 할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백발노인 이대통령은 1일 신년 메시지에서 “한국 국민의 가장 커다란 우려는 한국의 통일이 수행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정전협정에 대한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충실한 남한인들은 이러한 협정을 찬성하고 있지 않다. 앞으로의 전도는 잔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유엔군측 및 공산측 대표들은 한국을 무제한으로 분열(분단)시켜둘 협의를 하고 있다. 1952년은 우리의 적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우방제국 때문에 엄혹한 한해가 될 것이다” ([조선일보] 1952.1.3.)

1952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승만은 포문을 열었다. “통일 전에 정전협정 맺으면 남한국민의 공격을 각오하라”“공산적군 때문이 아니라 우방 때문에 엄혹한 한해가 될 것”이와 같은 메시지를 국내외에 공언하는 이승만의 목적과 그 구상은 과연 무엇인가.연두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공산군의 침략으로 세계가 다 당하고 있는 간난(艱難)을 우리가 가장 선봉으로 나서서 만무한 참상을 당하는 중에 1년 반을 지나고 지금 새해를 마지하게 되어서 무슨 말로 모든 동포들에게 위로하며 무슨 말로 신년환영사를 할는지 도리어 말을 못 잇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우방의 원조와 우리 민족의 동족 상애(相愛)로써 반도강산에 남한만이라도 보호하고 우리 국군이 유엔군과 합동으로 밀고 올라가 승리를 위하여 싸우고 있는 중이니 우리 일반국민은 더욱 굳센 결심과 통일의 정신으로 꿋꿋이 싸워나가서, 올해에는 하루바삐 중공군을 밀어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해서 파괴된 국토를 다시 재건설하는데 지체 없이 매진함으로써 민국의 통일 확립과 국민의 자유행복을 영구히 성립해서 이후 자손에게 유전하며 정의평화에 큰 보장이 되기를 바라고, 이 말로 모든 국내동포와 해외동포는 물론 공산군 점령하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이북동포들에게 새해 축복받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올해에는 통일을 이루자“면서 우방들에게 ’한국민의 공격‘을 경고하는 이승만의 메시지는 UP통신 기자의 표현대로 ‘백발노인’이 던지는 ‘엄혹한 협박’으로 파문을 던진다. 우방들의 중심이 미국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승만은 무슨 ‘배짱’이란 말인가. 부산정치파동의 불길은 아무도 모르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승만 ”국회의원들의 권력욕“ 비난...직선제 개헌안 참패

광복절 기념사에사 ’직선제 ‘개헌’을 제안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안‘을 처음 국회에 제출한 것은 자유당 결성작업 중이던 1951년 11월 30일, 그러나 내각제로 뭉쳐진 정치권이 직선제 개헌안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해를 넘기도록 심의를 미루는 국회를 향해 이승만은 노골적인 비판 담화를 내놓았다. “4년 전에 헌법기초위원회가 헌법을 제정할 적에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정하고 국회에 상하의원을 두기로 협의 되었으나, 그때 시기가 촉박해서 그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임시로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거하고 추후 다시 교정하자는데 양해되었던 것이다.그 후 본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게 누누이 권고하다가 이번에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한 것인데, 국회의원들이 이때까지 (직선제개헌을) 미루고 내려온 이유는 민중이 직접 선거하게 되면 자기들 권리를 잃게 될까봐 이 안건을 찬성하지 아니하여 오다가, 지금 와서는 자유당이 성립되어서 각 지방의 민의로 작정이 된다는 공론이 생긴 이후로, 국회 내에서 몇몇 정객들 주동으로 하루 바삐 투표해서 대통령직접선거와 양원제 개헌을 거부코자 하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회는 민의를 대표한 기관으로 하사(何事)를 불고하고 자기들의 사권리(私權利)만을 도모하고 있어서 그 중임을 부담키 어려운 줄로 인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이상 두 가지에 대한 전국(국민)의 동일한 사상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임으로, 국회에서 이를 거부하는 국회의원에 대해서는 전민중이 이를 지지하지 아니할 것이다.” ([조선일보] 1952년 1월19일자 2면)즉, 제헌국회때 합의했던 ’직선제 개헌‘ 약속을 어기고 국회의원들이 자기 권력(대통련 간접선거권)을 놓기 싫어서 몇몇이 작당하여 ’민의‘를 거부하기로 모의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그 국회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공개적 요구이다.

이튿날 18일 국회는 이승만의 직선제개헌안을 전격적으로 표결에 붙인다. 결과는 참혹하다. 찬성표가 고작 19표, 민국당을 비롯하여 원내자유당까지 똘똘 뭉쳐 표로써 직선제를 거부하였다. 이승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원내자유당이 이승만이 지원하는 원외자유당을 견제하려고 생긴 당임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결과라는 기사가 나왔다.

◆“국회독재 말라” 국회의원 ’소환‘ 캠페인...“민의 배신” 시위폭발

20대 청년시절부터 거리정치에 명성을 떨친 이승만은 또 발 벗고 나섰다. 기득권에 매달린 국회의원들에게 “민주주의가 뭔지 가르쳐주자”며 지지세력들을 동원하고, 재일동포 책임자로 일본에 파견한 문봉제(文鳳濟,1915~2004)도 불러들였다. 평남 개천 출신 문봉제는 북한공산당과 싸우다가 쫓겨서 1949년 월남, 서북청년회의 지도자로 갖가지 반공투쟁을 벌였고, 재일교포들에게 북한 실상을 알리며 반공교육을 실시하던 중에 달려왔다.

◉국민들의 국회의원 ’소환 운동‘=이 ’소환운동‘은 앞에서 본대로 이승만의 ’민주화운동‘의 하나이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변할 자격이 없으므로 그를 뽑은 유권자 국민의 힘으로 국회에서 추방해야한다는 ’주권재민체제’의 기본임을 이승만이 사상처음 행동으로 보여준 사례이다.직선제 개헌안이 절대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전국민의 뜻에 의한 제의”였다며 “국회독재나 의회만능주의로 수구적 전제주의를 의도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노골적으로 쏟아낸다. ([동아일보] 1952년2월16일자)“헌법에 ‘국회의원을 소환하지 말라’는 조건이 없으므로 민주국가의 주인 되는 투표자들이 소환하는 것은 이론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누가 막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 국민들에게 국회의원 소환에 대해 계몽운동을 겸한 국회개혁 캠페인에 돌입한다. 대한청년단(단장 이승만)의 부단장 문봉제는 부산 영도경찰서 옆에 셋방을 얻어 동지들과 합숙하며 벽보를 수없이 만들어 중심가에 붙인다. 특히 국회가 들어있는 경남도청 주변에 “민중의 분노를 아는가” “민주국가에서 민의를 거부한 국회의원은 반역죄로 다스려야한다”고 도배질 하다시피 집중 살포하였다.국회 앞엔 날마다 데모가 요란하다.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노총과 농총(農總) 등이 전국애국단체연합회란 이름의 공동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국회를 포위 연좌농성, 자극적인 구호들이 난무한다. “민의를 묻기 위해 국회의원을 새로 뽑자” “국민의 기본권리를 약탈하는 국회의원을 추방하자” “민의를 배신하는 국회는 해산하라” “의회 독재를 음모하는 국회를 타도하자”부산 부민동 정부정차(경남도청), 국회의사당(경남도청 상무관)에서 법원청사, 이승만대통령의 임시 경무대(경남도지사 관저)에 이르는 도로는 거리정치 무대로 변하여 낮에는 데모, 밤에는 벽보를 바꿔 붙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전국민 조직화 ’지방자치제‘ 선거...면단위까지 의회조직

’국민 시위’로 국회를 압박하는 이승만은 전국에 지방자치제 선거 실시를 공포한다.선거는 두 차례다. 4월25일 시읍면 의회 선거, 5월10일 도의회 선거를 실시한다고 했다. 1949년 제정된 지방자치법은 그동안 여러가지 공산폭동 반란 등 치안문제로 덮어두었던 것을 그보다 더 위험한 전쟁 중에 실시하겠다는 이승만의 발표에 경악과 희비가 엇갈린다. 도대체 전선에서는 밤낮으로 피 흘리는 전쟁이 한창인데 후방에선 정치싸움 선거를 두 번이나 하다니, 이승만 대통령은 제정신인가? 지방자치제가 실시중인 국가였더라도 전쟁 중이니 전쟁을 핑계로 지방자치제를 전면 중지시킬 법도 하건만, 이승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지방자치제를 전쟁 중에 도입, 그것도 손바닥만 한 나라에 시골 구석구석 면(面)단위까지 의회를 설치하는 국민의회제도를 실시하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 이것이 바로 자유당을 창당한 이승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전체를 자유민주주의 조직체로 양성하려는 ’평생의 소원‘을 이참에 실현하자는 것이었다.왜 평생의 소원인가? 배재학당시절부터 독립협회, 독립신문, 독립문 건립까지 동분서주하며 종로 네거리에 ’만민공동회‘를 열어 백성 계몽에 나섰던 이승만은 “똑똑한 국민이 국가독립의 기둥”이란 신념으로 뭉쳐진 국민혁명가이다. 공산군과 싸우는 지금이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일민주의‘로 합동단결해야 한다. 그의 지방자치제 선거는 그래서 권력만 쫓는 수구적 국회의원들까지 뭉치게 만드는 일이요, 미국의 내정간섭도 국민의 힘으로 막는 일이며, 강대국들의 일방적 휴전도 국민의 힘으로 막아 통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여는 일, 바로 이승만이 말하는 ’시대적 사명‘이다. 미국과 우방들이 달려와 싸워주는 이 절호의 찬스를 역이용하는 전략가 이승만의 ’강대국 활용 전술‘을 보여주는 본보기 사례의 하나로 필자는 꼽는다.

◉자유당 대승—전국을 장악=두 차례의 지방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시읍면 의회의원 정원387명 가운데 역시 무소속이 148명 40%, 자유당은 118명 31%, 민국당은 겨우 16명이다. 도의회 선거는 정원306명중 자유당이 무소속을 누르고 147명 48%, 민국당은 고작 4명이 되었다. 지방의회들은 5월 20일 일제히 개원, 신생 자유당이 드디어 이승만의 지론 ’국민국가‘의 대표들로 등장하여 직선제 개헌 투쟁의 전위대로 조직을 완성한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때 필자의 아버지도 면의원이 되어 국민 학교 5년생은 ’면의원님의 자제분‘이 되어 으쓱거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미국, 야당과 공모...’휴전반대 이승만‘을 국회선거로 제거 작전

언제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멀리 했던가? 1941년 국무부의 실세이자 소련 간첩이던 앨저 히스가 “이승만은 반소주의자”로 낙인찍은 뒤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소련과의 휴전협상을 맹렬히 반대함으로써 이승만은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악성요소‘로 자리 잡았다.

★미국, ’옹고집 이승만’ 대신 ‘상냥하고 고분고분한 장면’ 선택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은 이승만의 ’대타‘를 찾아야 한다. 영어 잘하고 사교성 좋은 조병옥 등 몇 명을 물색하던 미국이 점찍은 인물은 장면(張勉)이다. 미국대사시절 ’상냥한 성품에 부드러운 자세‘로 트루먼정부에게 높은 점수를 딴 장면, 무엇보다 “미국에 고분고분”해서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무초가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미국의 속내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이승만이 최근 더욱 고집이 세지고 노쇠하였다. 최선의 후임이라면 장면과 허정(許政) 두 사람인데 다 같이 대중의 인기가 없어 좀 약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국회의 간접선거로 장면이 당선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의 바람일 것”이라고 무초는 결론처럼 썼다. “우리는 한국 국회를 강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겠다.” (The Ambassador in Korea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Pusan, Feb. 15, 1952. FRUS 1952~1954). 무초의 보고서 날짜가 2월15일, 미국은 판문점 휴전협상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비밀공작을 일찌감치 시작, 여기까지 진척시켜 놓았던 모양이다. “미국의 말을 안듣는 이승만” 대신 “미국의 말을 잘 듣는 장면”이 휴전협상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트루먼 정부였던 것이다.

★민국당, 내각제 개헌안 제출...장면 옹립 물밑공작

대선이 임박하자 민국당은 우선 ’내각제 개헌안‘을 또 국회에 제출한다.(1952.4.17.) 현행 헌법(대통령 간선제)에 따라 국회에서 2대대통령 선거를 치르려는 야당 정치인들은 ’“이번엔 집권하자’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개헌안을 제출하며 내분이 일어난다.”개헌이 먼저냐...집권이 먼저냐“ 선후문제를 두고 분쟁이 일어났지만 목표는 같았다.국회선거에서 이승만을 제치고 야당 후보를 뽑으려는 세력규합 물밑공작은 호응이 컸고, 그 중심에 장면이 떠올라있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이 기회를 놓쳐선 결코 안되는 것이다.

장면 옹립의 선두 곽상훈 의원은 자신만만했다. “고집불통이요 심술쟁이 이(승만)박사를 몰아내고 운석(雲石:장면의 호)을 대통령에 선출할 계획을 추진했는데 사전지지가가 압도적으로 많아 성공적이다.” 내각제 개헌지지 세력도 이승만을 상징적 대통령으로 앉히고 실권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맡기자고 주장했지만 ’젊은 소장파‘들이 반대하며 우선적으로 ’장면 대통령‘을 뽑아놓고 개헌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였다. (운석 장면 기념회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고는: 장면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선우종원(鮮于宗源, 1918~2014)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무초대사가 어느 날 장면 총리를 은밀하게 만났을 때 ’2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을 배제하기로 정했다‘고 알려주었다.” (선우종원 [격랑 80년: 선우종원 회고록] 인물연구소, 1998)또 이런 증언도 있다. “장면 박사를 대통령으로 옹립하자는 비밀운동은 이미 1951년 말경부터 시작되었다. 장택상이 파리(유엔총회)에서 귀국한 3월까지 판도는 국회의원 3분의 2선을 넘고 있었다. 장면 지지세력이 그렇게 커지니까 자연스레 의견대립이 생겼고, 또 이승만 지지세력과 내통하는 배신자가 생겨 세력이 약화되었다.” (조용중의 선우종원 면담 증언, 앞의 책)당시 야당의원들이 모두 장면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예컨대, 민주당내 구파에 속하는 김준연(金俊淵,1895~1971)은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그는 항일투쟁 경력이 전혀 없고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패기있는 인품도 아니었다. 단지 귀공자형으로 인상이 좋고 영어를 잘해 이승만 박사가 총애하여 미국 대사로 나갈 수 있었는데 외국에서 이박사를 몰아내려고 원격조종을 하며 도전하여 이박사의 격노를 샀다....장면을 지지하는 세력은 평안도 출신, 흥사단 계열, 일제 관료출신들, 천주교 세력 등이었다. 그들은 전시 하에 패당을 형성하여 돈 보따리를 싸들고 다니면서 장면 추대운동을 해왔다.” (허도산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자유지성사, 1998)◉이승만도 알고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 장면의 은밀한 관계를 알게 된 것은 여러통로를 거쳐서였다. 이승만의 개인 정치자문 교수 올리버(Robert Oliver)는 이렇게 이승만의 메모를 소개한다. “조병옥이 안중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무초는 다른 인물, 온후한 장면을 찾고 있다. 무초는 자기 의중의 인물을 포기했지만 아직도 다음 선거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무부는 오랫동안 한국을 자기들의 손아귀(under its thumb)에 잡아 두려하고 있다.”(Rober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1942~1960], 한준석 번역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1913) 파리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던 장면은 몸이 안좋아 하와이에서 휴양하겠다며 귀국하지 않았다. 혼자 나타난 장택상에게 이승만이 소리치듯 말했다. “장면은 왜 안 오나? 장면이 치밀한 계획을 꾸며서 국회의원들과 손을 잡고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니, 하루라도 빨리 와야 될 것 아닌가” (장병혜-장병초 [창랑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기념사업회, 1992)장면은 4월1일에야 서울에 나타났다. 기자들은 ’대통령설‘을 물었다. 장면은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고 시치를 떼었다고 한다. 그는 4월19일 총리 사표를 냈다. 이승만이 “몸도 불편한데 그만 쉬시라”고 권고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승만은 후임총리에 장택상을 임명한다. 이승만보다 18세 아래인 장택상은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의 미주 독립운동시절 참여했던 젊은 후배였는데 경북 칠곡의 대부호인지라 해방 전후부터 박헌영 조봉암 등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좌우세력 간에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던 인물이다.

★정부, 직선제 개헌안 제출...지방의회대표들, 국회 성토 가열화이승만 정부는 5월14일 직선제와 양원제를 위한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이승만 건국대통령 취임일이 4년전 7월24일이므로 늦어도 6월23일까지는 2대대통령을 뽑아야하는데 그 대통령은 반드시 ’직선제‘로 국민이 정해야한다고 설명하였다.야당이 내각제 개헌안을 낸지 한 달후 직선제 개헌안이 나왔으므로, 이제 국회에는 두 개의 개헌안이 나란히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직선제 개헌을 지지하는 단체들의 국회 압박전술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번엔 지자체 선거로 뽑힌 전국 자유당 지방의원들이 합세하여 시위와 구호가 더욱 격렬해졌다.“국회의원 서민호는 살인자다” “살인 국회는 해산하라”무소속 서민호는 지난 4월 지방선거에 나선 야당후보들을 지원하러 순천에 들렀다가 육군대회 서창선을 권총으로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국회에 조사단이 꾸려졌지만 제대로 수사도 이루어지지 않자 민심이 들끓었다. 해방후 미군정하에서 이승만의 도움을 받아 광주 시장, 전남도지사를 지낸 서민호(徐珉濠, 1903~1974)는 2대국회부터는 이승만 반대세력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민의 배신‘ 국회 성토대회를 주도하는 지방의원들과 청년단체들은 “살인국회의원 서민호를 총살하라” “순국용사 서대외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흔들며,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요청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 진정한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선언서 등을 배송하며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국회까지 행진을 계속한다. 직선제 개헌안과 내각제 개헌안의 거리 투쟁 대결, 그 종착역은 어디일 것인가.

★이승만, 무초에게 국회의원들의 공산당 관련 ’증거‘ 제시

부산 임시 경무대에 5월23일 무초가 찾아왔다. 본국에 돌아가 당분간 체류하게 되었다면서 대리대사를 맡은 라이트너(E. Allan Lightner)를 소개한 무초는 한미간 현안들을 거론하다가 “좀 거북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을 돌렸다.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가 나눈 대화내용을 ’무초의 국무부 보고서‘에서 찾아보자.무초 “최근 시중에서 나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대통령의 재선을 방해하고 있으며 한국정당에 파당적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무책임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이승만 “그런 말은 금시초문이오. 내가 들었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오”무초가 말을 계속하려하자 이승만이 말을 이어나갔다.이승만 “그 문제에 관해서 말 나온 김에 나의 입장을 밝히고 싶소. 나는 앞으로 기껏 몇해 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오. 나는 대통령으로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소. 그동안 조국을 위해서 하고 싶었지만 못다 한 일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목표들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모를만큼 어리석지는 않다오. 하지만 한편으로 돌아보자면, 지금 우리나라에 국민의 복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자기들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오. 이 문제가 분명하게 해결되기 전에는 대통령 자리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오.”무초 대사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승만의 긴 말을 전부 인용해 놓았다.이승만은 “국민의 뜻에 따르는 단 하나의 길은 국회를 양원제로 하고 대통령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것뿐”이라며 “이 목표만은 이 자리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70대 후반 노인 이승만의 열정적 토로를 다 듣고 난 무초는 흥분을 갈아 앉히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세계가 한국을 주시하고 있으며 정치적 마찰이 한국에 분쟁을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썼다.그런데 중요한 대목은 다음의 이것이다.이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73년 Truman Library가 주선한 회고대담에서 무초는 놀라운 증언을 토해냈다. 당시 이승만과의 대화에서 보고서에 없던 나머지 부분을 들어보자. “이승만이 공산주의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을 구속할 생각이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건 귀국의 국내문제요‘라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화 50달러짜리 신권이 가득 찬 몇 개의 트렁크를 나에게 보이면서 ’북한으로부터 홍콩을 거쳐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압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걸 왜 나한테 보입니까, 한국국민들에게 보여야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말하니까 그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내가 워싱턴으로 떠난 뒤 그들을 구속했다”금방 터질 부산정치파동의 ’예고편‘을 무초는 다 듣고 본국으로 떠난 셈이었다. 미국과 무초는 자신들의 음모가 시행될 국회 간접선거를 코앞에 두고 ’자리를 피해준 것‘일까?

◆이승만, 비상계엄령 선포...미국-야당의 ’음모‘를 사전 봉쇄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5월25일 밤,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부산-경남과 전남북 등 23개 시-군에 공산당 잔비(殘匪)들이 빈번하게 출몰하므로 이를 소탕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계엄령은 지방자치제 선거를 위해 일시 해제하였던 전시 계엄령을 다시 내린 것이므로 국민들에겐 자연스럽고 특별한 불편도 없는 일이지만, 이승만 대통령에겐 보통 계엄령과 다른 비상사태 ’거사‘였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이날을 비상계엄 D-Day로 택한 이유는 바로 사흘 뒤 5월29일 미국과 야당이 국회를 전격 소집하여 ’대통령 교체’ 선거를 단행한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조종하는 변칙적 ‘정권교체’를 막아야하는 것은 독립국가 대통령으로서 불가피한 헌법적 조처, 이승만은 이틀 전 무초대사에게 ‘귀띔’까지 해둔 일을 해치웠다. 그러나, 야당에겐 전혀 예상치 못한 날벼락이다. 다 된 밥솥을 뒤엎는 이승만의 폭거, 그토록 비밀리에 준비했던 ‘집권의 꿈‘이 하루 밤새 물거품이 될 줄이야.

날이 새기 전에 국회의원 4명이 잡혀갔다. 모두 ‘이승만 제거-장면 옹립’을 추진한 주역들이다. 날이 밝자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아침 8시경, 피난국회 건물에 도착한 국회버스를 헌병들이 포위했다. 버스에 올라탄 젊은 헌병이 문을 가로막고 큰소리로 말했다. “잠깐 검문을 하겠습니다. 이 안에 공산당과 내통한 혐의자들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근하던 국회의원들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 그 버스 범퍼에 쇠사슬이 걸리고 군용트럭이 끌고 간다. 어디로 가나? 부산 헌병사령부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검거된 국회의원들이 모두 10여명도 넘었다.▶이승만 대통령은 왜 이렇게까지 일을 복잡하게 벌이는가?보통 대통령이라면 전쟁을 핑계로 국회를 문 닫을 수도 있고 직선제 개헌도 대통령 결단으로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면 될 것을! 직선제가 자신의 독재를 위해 그리도 급하게 필요하다면 독재자답게 결행하면 그만인 것을, 왜 이리 시끄럽게 국민들 눈앞에서 욕먹을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이승만은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독재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헌법 개정은 헌법에 규정된 절차를 지켜서 행해야 한다. 이것을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깨닫게 하고 몸으로 체험시켜야 하는 ‘민주주의 실천 교육’이 이승만의 오랜 꿈 ‘똑똑한 국민국가’ 만들기의 첫 걸음 아니던가. 하물며 ‘정권교체’를 어둠속에서 공모한 강대국 미국과 한국 정당들이 ‘도둑질’하듯 멋대로 해서야 건국헌법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승만이 무초에게 말했듯이 “국민을 무시한 권력욕”으로 뭉쳐진 국회의원들과 강대국의 이익이 야합한 약소국의 국회 간접선거, 다름 아닌 ‘국회 쿠데타’ 그것이었다. ‘부산정치파동‘의 개막! 이처럼 힘든 작업을 스스로 선택한 이승만은 과연 ‘40일간의 정치드라마’에서 무엇을 건졌던가. 이제는 비난만 남고 실체가 파묻힌 역사의 쓰레기더미에서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파헤쳐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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