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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얼룩졌던 2천년 전 세론조사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견제 없는 권세 주어지면 논란 불가피

 

허소(許劭‧생몰연도 서기 150~195)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비평가였다. 사촌형 허정(許靖) 등과 함께 매월 초하룻날 가진 인물비평 모임 월단평(月旦評)으로 이름 떨쳤다. 조조(曹操)에게는 “치세(治世)의 능신(能臣),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후한 말의 관료임용 방식은 과거제(科擧制)가 아닌 효렴(孝廉) 등이 중심이었다. 효렴은 군국(君國)의 태수(太守)가 매년 지역 내 인재를 조정에 천거하는 제도다. 만약 추천한 인재가 죄를 저지르면 추천자도 처벌됐다.

 

따라서 태수로서는 누구를 조정에 올려야할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이 사람은 괜찮다”는 보증을 서 줄 존재가 필요했고 그게 월단평의 역할이었다. 허소는 대상인물 주변에 떠도는 얘기 등을 집약한 뒤 “이 자는 지지율 OO%로서 유력 정승(재상)주자다” “이 사람은 지지율 OO%로서 역적감이다” 식의 감정을 내리던, 오늘날로 치면 세론(世論)조사업체 비슷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많은 태수들이 허소의 비평 하나만 믿고서 누구를 천거할지를 결정했고 허소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예를 들자면 허소는 사이가 매우 나쁘던 비평업계 라이벌 허정을 두고 헛소문을 퍼뜨려 한때 그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막았다. 양주자사(楊州刺史) 유요(劉繇) 휘하에서 근무하던 시절엔 맹장 태사자(太史慈)를 두고 “반골(反骨)의 상이다” 악담해 중용되는 걸 막았다.

 

비평에 사감(私感)이 개입됐으니 공정하고 정확할리 없었다. 태사자가 그 증거였다. 태사자는 유요를 충심(忠心)으로 받들었으나 유요는 허소의 말만 믿고 태사자에게 정찰임무 따위나 맡겼다. 태사자는 유요가 손책(孫策)에게 패해 죽은 뒤에야 손책을 따랐다. 태사자는 손책‧손권(孫權) 형제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크게 떨쳤다.

 

또다른 월단평 멤버 허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비(周毖) 등과 함께 동탁(董卓)에게 한복(韓馥)‧유대(劉岱)‧공주(孔伷)‧장막(張邈) 등을 각지 태수‧자사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동탁은 믿어 의심치 않고 허정 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작 허정 등이 보증서고 추천한 이들 대다수는 머잖아 모조리 동탁에게 반기를 들었다. 주비가 처형되자 두려워진 허정은 자신이 천거한 예주자사(豫州刺史) 공주에게로 달아났다.

 

이러한 월단평을 당대에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허정은 유비(劉備)의 파촉(巴蜀) 입성과정에서 주인 유장(劉璋)을 배반하고 유비에게 투항하려다 잡혔다. 허정은 유비가 파촉을 평정하면서 비로소 구출됐다. 유비는 허정을 중용하는 대신 “헛된 명성만 가졌다” 고개를 내저었다. 유비는 “허정이 비록 이름만 번지르르하지만 사람들은 그 명성에 미혹되므로 그의 이름을 이용해야 한다”는 참모 법정(法正)의 조언에 겨우 허정을 기용했다.

 

일부 세론조사업체와 관련된 의혹이 재차 정치권에서 고개 들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최근 자신의 SNS에 “2011년 전당대회 때 3억원을 주면 10%를 조작해주겠다고 제의한 어느 기관이 생각난다”고 썼다. 업계 전체가 그렇지는 않겠으나 일부 업체는 예전부터 꾸준히 도마에 오른 바 있다. 그러나 의혹 진위여부 확인은 지지부진했다. 견제수단도 거의 없다. 논란이 재차 공론화된 지금이 의혹 해소의 적기(適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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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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