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개담] 6‧25의 숨은 주역 켈로부대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헌신‧희생이 부끄럽지 않은 나라 되길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南侵)으로 발발한 6‧25전쟁 초기 수세에 몰렸던 우리 국군‧국민을 살린 건 잘 알려졌다시피 인천상륙작전(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이다.

 

대한민국을 낙동강 이남까지 몰아넣었던 북한군은 이 작전 성공으로 말미암아 허리가 두 동강 났다. 남쪽으로 치고 들어온 북한 주력군은 서울을 거치는 병참선(兵站線)을 잃은 채 고립됐다. 사상 최초로 결성됐으며 어쩌면 마지막 결성이 될 수도 있는 유엔연합군은 이들을 격파하고서 우리 국군을 선두로 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게임체인저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로 여겨졌다. 우선 인천에 상륙한다는 게 알려질 경우 김일성은 해안에 대규모 방어선을 구축할 게 뻔했다. 예나 지금이나 상륙전(上陸戰)은 공격 측에게 어마어마한 출혈을 강요한다. 만에 하나 한미 주력군이 이 전투에서 궤멸될 경우 전쟁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인천 앞바다는 지금도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가 크다. 찰나의 상륙시기를 놓치면 이미 상륙한 부대, 갯벌에 올라앉은 부대, 바다에 대기 중인 부대 셋으로 쪼개져 각개격파(各個擊破) 당하게 된다. 용케 모든 부대가 상륙한다 해도 만에 하나 퇴각해야 할 경우 다음 만조(滿潮)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에 제2의 덩케르크(Dunkirk) 꼴이 날 수 있다.

 

때문에 미국 행정부도, 군부(軍部)도 이 무모한 도박을 반대했다. 그러나 명장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생몰연도 1880~1964)는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보기 좋게 성공시켰다. 우선 맥아더는 강원 삼척, 전북 군산 등에 민간인 대피 촉구 전단을 뿌린 뒤 함포(艦砲)사격을 가해 마치 이곳에 연합군이 몰려오는 것처럼 꾸몄다. 졸장 김일성은 이 성동격서(聲東擊西)에 재깍 걸려들었다.

 

서울‧인천은 무방비도시(Open City)가 되다시피 했다. 태평양전쟁 경험을 살린 맥아더는 기막힌 통솔력으로 4만이나 되는 대군을 일사분란하게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상륙시켰다. 지휘함 맥킨리(McKinley)에서 전 과정을 매의 눈으로 살피던 맥아더는 비로소 참모들과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뭍에 오른 상륙군은 1950년 9월15일 오전 6시33분 미 해병대의 월미도(月尾島) 기습을 시작으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서울로 진격했다. 당황한 김일성은 약 2만의 병력을 서울에 투입했으나 9월28일을 기점으로 서울은 완전히 대한민국에 의해 수복(收復)됐다. 우리 국군은 중앙청(中央廳)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게양했다.

 

상륙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낙동강전선(戰線)의 연합군도 반격에 나서서 북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북으로 돌아갈 길이 끊겼다는 소식에 사기가 바닥을 친 북한군은 지리멸렬해 달아나기 바빴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일부는 지리산에 숨어들어 빨치산(Partizan)이 됐다. 1950년 10월1일 국군 3사단 23연대의 3‧8선 돌파를 시작으로 연합군은 침략군을 결딴내기 위해 보무당당히 북진(北進)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에는 숨은 주역이 있다. 대북(對北) 첩보부대 8240부대(켈로부대‧KLO‧Korea Liaison Office)가 그들이다. 켈로부대 구성원은 한국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음지(陰地)에서 정보수집‧사보타주(Sabotage) 등을 묵묵히 수행하다가 결전의 날 인천에 투입됐다.

 

인천 연안부두로부터 8.5해리(약 15.7㎞), 편도 약 1시간 거리에는 면적 0.076㎢의 작은 섬 팔미도(八尾島)가 떠 있다. 현재는 아름다운 일몰(日沒)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인천 팔경(八景) 중 하나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군사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상륙작전 당시 모든 조건이 완비됐음에도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상륙정이 연안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유일한 수로(水路)인 비어수로(飛魚水路)를 지나야 했다. 지금도 특정 항구에 선박이 기항(寄港)하기 위해선 암초(暗礁)가 어디 있고 없고 등 항구 해저지형을 잘 아는 도선사(導船士)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전쟁통에 도선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에 맥아더는 비어수로를 비추는 팔미도 등대 확보를 위한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을 입안(立案)하고 여기에 켈로부대원들을 투입한 것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현장지휘관은 미 해군 정보장교 유진 F. 클라크(Eugene F. Clarke) 대위였다. 상륙보다 약 보름 앞선 시점인 9월1일 영흥도(靈興島)에 잠입한 부대원들은 인천 앞바다 정보를 수집해 맥아더에게로 타전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9월15일 0시50분께 팔미도 등대를 점등(點燈)해 대장정의 시작을 알리고 상륙군을 인천으로 인도했다. 상륙군의 길잡이로서 목숨 걸고 등대를 사수하던 부대원들은 임무가 끝나자 등대에 “킬로이 다녀간다” 글을 남기고서 유유히 사라졌다.

 

전쟁 내내 전사한 켈로부대원은 전체의 80%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규군이 아니었기에 휴전(休戰) 후 소외됐던 생존자들은 김영삼정부 시절인 1996년 비로소 군번‧참전(參戰)용사증을 받고서 당당한 참전용사로 인정받았다. 전사자들 위패(位牌)도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안(奉安)됐고 위령비(慰靈碑) 또한 세워졌다.

 

헌신에 대한 실질적 위로도 이뤄졌다. 지난해 6월 켈로부대 기획참모 출신인 이창건 전 한국원자력학회장은 “2월엔 국가로부터 (최초로) 보상금을 받았고 6월14일엔 청와대 오찬(午餐)에 초청받았다. 북한에 침투했다가 휴전 때문에 못 돌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켈로가 (국가에서) 인정받은 건 이번(윤석열정부)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이 전 회장은 1950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2학년 때 참전해 켈로부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윤석열정부는 지난해 3월엔 팔미도 작전을 수행한 부부 켈로부대원 고(故) 이철‧최상령 씨를 국가공로자로 인정하기도 했다.

 

6월은 호국보훈(護國報勳)의 달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6‧25 등에서 우리 후손들을 위해 헌신하신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의 정신이 조금씩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영령들의 숭고(崇高)한 희생을 폄훼하려는 시도마저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남침위협이 재차 고조되는 지금,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을 위해 묵묵히 음‧양지에서 공헌 중인 이들을 마땅히 기리고 존중해야하지 않을까.

 

20000.png.jpg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1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 오주한
    작성자
    2024.06.09

    아, 인천상륙작전 때 유항렬 선생이란 분이 도선사 역할을 하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참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