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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안돼!” 야권통합서 영입 거부 … ‘박헌영 동무에게’ 쓴 편지도 "전향 아니다" … 최초의 단일야당 '민주당' 탄생

뉴데일리

세계최초의 공산국 연합 침략전쟁이 멈춘 정전협정 1년 남짓, 쑥대밭 대한민국엔 때아닌 ‘정계개편 태풍’이 불었다. 소위 ‘사사오입 개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제한을 철폐하자 야당들이 그제서야 ‘하나로 뭉치자’고 일어선 것이다. 그들의 눈엔 ‘자유시장경제 개헌’쯤은 보이지도 않았던지, 오로지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막아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정권교체의 헌정제도를 수호하는 일이 다급하다. 그리하여 급발진했던 ‘위헌 비상대책위’ 모임은 금방 ‘호헌(護憲) 동지회’로 이름을 바꾸고, 사분오열된 야권을 단일교섭단체로 묶어내는 ‘야권 통합’에 전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바로 ‘신당(新黨)운동’이다.

그 신당운동의 주역은 김성수의 한국민주당과 신익희의 대한국민당이 5년전 합쳤던 민국당(民國黨)이다. 자유당 일부를 빼내고 무소속 및 혁신계까지 아우르는 합당 작업은 1955년 새해 들어 본격 작업에 들어서는 듯 했으나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이해관계가 민감한 정파들이 정치이념과 주의주장이 생명인 정당조직으로 하루 아침에 합치기란 짦은 민주정치 역사가 허락하지 않는다. 지름길로 가기에는 내적 능력의 미숙과 외적 상황의 격동을 무슨 수로 혜쳐나갈 수 있으랴.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신당’ 창당 작업에 난관...“조봉암 가담하면 불참”

소련과 중공, 북한 공산세력과의 전쟁이 막 끝난 마당에 새 출발하는 통합야당은 ‘반공 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하였다. 너무나 자연스런 목표였다. 여기에서 이른바 ‘혁신계’라는 좌파 정당까지 연합하려는 작업은 그래서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혁신계’란 호칭은 일찍이 일본 정계에서 붙인 것,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반체제 혁명세력을 간접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한국에서도 그대로 갖다 썼다. 당시 한국의 혁신계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공산당 출신 조봉암(曺奉岩, 1898~1959)이다. 우선 정계의 동향을 언론보도에서 살펴 보자. 「지난해말 개헌파동을 계기로 원내 호헌동지회가 주동이 되어 추진하던 야당연합의 신당운동은 조봉암씨의 참가에 대한 찬반양론이 대립되어 아직도 타협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조씨의 참가를 전적으로 반대하는 측에서는 조씨와 동 계열을 제외하고 신당공작의 재출발을 모색하고 있어 그 추이는 극히 주목되고 있다.정통한 소식통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신당의 재출발 공작은 조봉암씨가 참가하는 신당에는 가담치 않겠다고 표명하고 있는 장면, 조병옥, 김준연 씨 등이 선두에 서고 있으며, 3씨는 최근 빈번히 회합하고 그 대책을 협의하고 있다.한편 민국당내 소식통에 의하면 김성수씨의 별세(2월18일 사망, 필자 주)와 그후 조봉암씨의 신당참가 성명이 있은 후, 최근 민국당 내의 동향도 종전과 판이하게 조씨의 참가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고 하며, 조씨의 참가를 지지하는 측은 극히 소수일 뿐이라 한다.이러한 움직임은 신당발기준비위원으로 서울시 대표에 장면씨, 경기도 대표에 조봉암씨를 각기 천거할 단계에 이르러 조씨의 참가에 찬반양론이 대립된 채 타협을 보지 못하고 있다. 호헌동지회 및 신당촉진 18인위원회에서도 수습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있는 상태가 되자 조씨 참가 반대 측에서는 신당공작을 일단 와해하여 조씨 및 동 계열을 제외하고 신당의 재출발을 추진할 것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일보]1955년 3월5일자) 요약하면, 신당 창당추진 주역들이 조봉암의 가담을 반대하고 지지자는 극소수란 말이다. 그러면 장면, 조병옥, 김준연 등 민국당 주역들은 왜 조봉암을 아예 제외시켰던 것일까. 조봉암은 제헌국회부터 재선 의원이며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인물 아닌가.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버린 적 없다”

당시 야당통합과 신당창당 운동을 주도하던 주역들의 말을 들어보자.

◉조병옥의 증언=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게 된 민국당 지도부 조병옥(趙炳玉)의 증언부터 보자.변칙적인 개헌안 통과 직후 그는 호헌동지회 결성에 앞장서서 신당 창당 작업을 주도한다. “새롭게 출범하는 신당은 단순히 자유당과 대항하는 조직이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이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1) 자유-민주-진보. 2) 법의 수호와 책임정치. 3) 자유경쟁과 적절한 분배. 4)국제평화와 협조 등 4대원칙을 세워 이를 신당창당의 기본 정신으로 채택시켰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영국식 사회주의 말고는 모두 공산주의나 그 아류로 분류하였다.서울 무교동에 신당 발기 사무소를 꾸린 조병옥은 조봉암의 신당가입 문제로 논란이 일자 처음부터 “거부”를 선언한다.“나는 미군정의 경무부장일 때부터 조봉암의 행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남로당 헤게머니 쟁탈전에서 박헌영에게 패배당하여 반간파(反幹派)로 몰렸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요, 그의 저서 ‘당면과제’에서는 자기의 정치적 이념이 변함없음을 자처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봉암은 정치적 방편으로써 ‘정치적 개종’을 한 것에 불과하므로 나는 적극 반대하였던 것이다”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조병옥은 인촌 김성수가 조봉암이 스스로 ‘비공산주의자’라는 성명을 발표하면 포섭하려 했다는 설에 대하여도 그 진실을 밝힌다며 이렇게 설명한다.“나는 계동의 인촌댁을 찾아가 그 진의를 물었다. 김성수 씨는 말하기를, 그것은 자신의 진의가 아니고 누군가 조작 선전한 것이라며 간부회의를 열어 결정하자고 했다. 이튿날 간부 20여명을 소집한 회의는 김성수 씨가 ‘반신불수’의 신체임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에 걸쳐 사회를 보아가며 조봉암의 가입 거부를 결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조봉암은 ‘김성수의 성명 조건‘을 내세우며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신당을 따르겠다’고 간청했지만 결국 제외 시켰던 것이다”

◉김준연의 증언=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왕년의 공산주의자였던 김준연(金俊淵, 1895~1971)이다. 조봉암이 과거를 반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 입당시키자는 주장이 나오자 가장 먼저 가로막고 나섰다. “모르는 사람들은 나와 조씨는 같은 처지이니 동병상련(同病相憐) 아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조봉암은 몸은 남한에 있지만, 그의 이념과 정신은 아직도 완전히 북한에 가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것임을 나는 잘 알수 있다. 그의 신당 입당은 절대 안되는 일이다” (허도산 [낭산 김준연] 자유지성사, 1998)장택상 등 조봉암에 동정적인 사람들이 타협적인 말을 꺼내도 김준연은 단호했다. “해방 직후 조봉암이 진작 자기 반성을 하고 이념을 고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와 같이 행동해 왔다면 믿을 것이지마는, 이제 와서 자기 정당을 만들기도 위험해지니까 우리하고 같이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한 행동이니 그를 어떻게 믿겠는가. 지금 서울에 북한 첩자들이 많이 잠복하고 있는데 그들과 접선하거나 무슨 의논을 하고 무슨 성명서를 내겠다는 것인지 누가 알 수 있겠나?” 공산당의 정체와 생리를 잘 아는 김준연은 일제때 독일 베를린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귀국 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ML(Marx-Lenin() 파벌의 지도급 인사였다. 조선일보의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활동한 언론인으로서, 해방 후 공산주의를 버리고 전향, 한민당 창당에 가담하였다.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전략에 정통한지라 1948년 대한민국 단독정부수립을 적극 지지 했으며, 건국헌법 제정때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도입에도 혼자 나서서 협력하였고 ‘반공 자유민주공화국’을 건국하는데 앞장서 왔던 인물이다. 오랜 세월 공산독재를 몸으로 체험하고 그 반인간적 폭력성과 반자유 일당독재 노예체제를 미련없이 청산함으로써 확신에 찬 ‘반공투쟁의 선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때 그를 후계자로 검토할 정도로 ‘천재’소리를 듣는 정치 엘리트였다.

◉장면의 반대=평소 온화한 교사형으로 유명한 장면(張勉)이 뜻밖에도 ‘조봉암 합류 반대’의 강력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공산주의에서 전향했다고? 나는 싫소. 조봉암씨는 물론, 그의 계열에 속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신당에 들어온다면 나는 즉시 손을 뗄 것이고, 따로 당을 만들것이오”신당의 성격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국시의 구현과 건전한 민주정치의 질서를 확립하기위해 결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철저한 반공주의자 가톨릭 신자이다. 좌파 기자들이 되풀이 유도 질문을 계속하자 그는 한마디로 잘라버린다. “대내 대외의 현 국가정세와 나의 신조로 보아 더 묻지 않아도 알 것 아닌가”(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조선일보] 1955.3.5)

◆조봉암의 삶...박헌영과 조선공산당 결성

구한말 대한제국시대 1898년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일제 식민지에서 강화군청 급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고학을 하던 중 공산주의에 접하자 빠져들었고 중퇴한뒤 귀국한다. 약력을 소개한다.*1922년 레닌의 국제공산주의 조직체 코민테른이 개최한 고려공산당 회의에 조선대표로 참석. (고려공산당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레닌이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여 1921년 조직되었음). 모스크바 정착후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 2년간 수학. *1924년 신흥청년동맹 결성, 공산주의 강연활동. 동지 김조이(金祚伊)와 결혼.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조선공산당 조직 중앙위원장 맡음.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1925년 4월17일 박헌영, 김단야(金丹冶)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창립하고, 동시에 출범한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부가 되었음.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의 도움으로 여권을 입수, 모스크바로 직행하여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승인 받았음. 귀국후 검거 선풍에 쫓겨 중국으로 도피하다.*1926년 상하이에 조선공산당 해외부 설치. 만주에 만주총국 조직 책임비서로 선출됨. 코민테른 극동부 조선위원으로 임명됨. *1927년 상하이 임시정부 소재 프랑스 조계에서 여운형의 집에 근거지 마련. 첫 사랑 김이옥(金以玉)과 동거함.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입당, 한인지부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되다.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 조선대표. 재중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를 조직함.*1928년 9월 김이옥이 장녀 조호정 출산. 김이옥의 폐결핵 지료를 위해 조봉암이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의 공금을 유용함. 이 사건을 계기로 박헌영이 라이벌 조봉암을 공격하며 주도권 쟁탈의 대립관계 형성되었음.*1931년 1월 조선인으로서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가 되다.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공원에서 붙잡혀 압송됨. 신의주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복역함. 다음해 귀국한 김이옥이 강화에서 사망. *1938년 출옥 후 인천에서 본처 김조이와 재결합.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해방 때까지 복역.*1945년 8.15 행방직후 일본총독으로부터 여운형이 일본인 보호를 위한 치안책임과 거액;의 자금을 받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조직할 때 조봉암을 석방시킴, 인천지부 조직을 맡은 조봉암은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에 투신함. *1948년 제헌국회 의원 출마 당선.*1950년 제2대 국회의원 당선, 국회부의장 당선.*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 출마 76만표 획득.1956년 제3대 대통령 출마, 216만표 획득. 좌파 진보당 결성, 평화통일 주장.1958년 7월31일 교수형.

★'박헌영 동무에게' 쓴 편지...'조봉암 전향했다' 착각

1946년 5월초 조봉암이 남로당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박헌영 동무에게--조봉암’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우익신문 [대동신문] [한성일보] 등 4개 신문에만 3회 연재된 이 편지는 큰 충격을 일으키며 전국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공산당 우두머리이고, 다분히 사적인 비밀편지가 백일하에 날마다 낱낱이 보도되었으니 일반은 물론 정치계에서 화제의 초점이 되었다.

어떻게 이 편지가 공개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수사결과였다. 남한 공산당(남로당) 활동이 북한 및 소련과 연계된 증거를 확보하고자 미군이 조봉암의 인천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실을 덮쳐 비밀서류들을 압수했는데, 그때 조봉암의 품속에서 ‘박헌영동무에게’ 보내는 편지를 찾아낸 것이었다. 조봉암이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돌려줄 수 없는 ‘결정적 보물‘이다. 방첩대는 그 내용을 보자 쾌재를 부르고,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자 검토 끝에 한국의 우익 언론에 배포한다. 미-소 공동위에서 소련이 ’좌익만의 남북임시정부‘ 구성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핵심적 증거물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왜 박헌영에게 그런 편지를 썼을까?

편지는 지극히 우호적이고 친밀한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문투로 시작된다.“내가 붓을 들어서 동무에게 편지를 쓴 것은 1926년 상해에서 동무에게 암호 편지를 쓴 것 외에 이것이 처음인 것 같소. 내가 얼마나 동무를 존경하고 또 과거 10여년간 동무가 얼마나 영웅적 사업을 계속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혁명가로서의 순정(純情)의 찬사는 아첨이라 생각할까 해서 한마디도 쓰지 않겠고 오직 동무의 꾸준한 건강과 건투를 빌 뿐이요.내가 8·15 그날부터 오늘까지 인천에 틀어박혀서 당, 노조, 정치 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왔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당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옳은 길이고 옳은 태도라고 믿는 까닭이오. 그런데 오늘 붓을 들어서 무슨 문제를 논의하고 우견(愚見)을 진술하게 된 것은 결코 이 태도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오.”

그랬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편지는 일반에 잘못 알려진 대로 공산주의를 버리고 ‘전향’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직 조선혁명을 위해 당을 사랑하고 지도자 동무를 아끼는 마음이라 아니 쓸 수 없어서 쓰는” 충성 맹서의 편지였다. (정용욱 [조봉암의 사신과 1차 미소동동위 불발] 2019)

그 은밀한 사신(私信)의 주요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홰방이후 박헌영이 취한 노선과 활동에 대한 비판과 충고이다. 성급하게 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시기가 부적절하였고 각지 인민위원회 조직에서 인사 문제가 많았다는 점, 즉 박헌영이 그 과정에서 조봉암 일파를 차별한 처사에 일제 때부터 묵은 ‘유감’을 터트린 것이다. 들쩨. 조선공산딩 재건과정에서 박헌영이 저지른 ‘오류’를 지적한다.. 자신을 포함한 현장 조직 활동가들을 경시함으로써 투쟁력을 약화시켰다는 것, 자신을 무시했다는 불만이다. 셋째,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인 신탁통치안에 대한 대응에서 실수했다는 것. 처음엔 ‘반대’했던 박헌영이 평양 가서 소련군정의 슈티코프에게 클렘린의 방침을 지령받고서야 하루 밤새 ‘찬성’으로 돌아섬으로써 남한대중으로부터 불신을 샀던 사실을 지적한다. 박헌영의 아픈 약점을 정확히 찌른 대목이다.

▶집단 착시 현상...‘조봉암 전향’ 인식 퍼지다=요컨대, 이 편지는 벅헌영과의 노선투쟁, 다시 말해 남로당내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비칠 수 밖에 없는 극히 내밀한 편지였다. 편지 어디에도 ‘전향’으로 읽히는 대목은 물론, 공산주의 이념이나 공산당 자체를 비난하는 대목은 안보인다.그런데도 이 편지를 본 독자들은 물론 언론사까지도 “조봉암 전향”이라며 반가워했다. 더구나 남로당에 시달리는 자유우파 진영에서는 마치 거물 우군을 얻은양 ‘조봉암 전향’을 선전 무기처럼 애용했다고 한다.미 정보당국이 소련과의 협상을 성공시키려는 국무성을 돕기 위해 소련의 기를 꺾는 자료를 수집하여 제공한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다른 결과를 불러온 셈이 되었다. 그만큼 당시 한국사회는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마저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지겨운 남로당 두목 박헌영을 ‘비판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마치 조봉암이 공산당을 공격하고 전향하려는 편지를 쓴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해방직후 공산당을 모르는 분단사회의 웃지 못할 ‘집단 착시’ 현상이다.

▶‘좌우 합작’의 당위성 지지=조봉암의 ‘편지’가 공개된 다음 달 6월부터 미국이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극력 거부하는 반공의 이승만과 김구 등 우익을 완전 배제하고 미군이 보기에 ‘중도우파’인 김규식과 ‘온건좌파’ 여운형을 묶어 소련이 수용할 타협안을 만들려는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 등을 알저 히스 등 소련 간첩들과 친소 세력이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의 정책을 좌우하였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좌우합작이 가시화하자 조봉암은 무릎을 쳤다. 그는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글을 써서 소책자를 만들어 좌우 합작의 ‘민족적 당위성‘부터 주장하고 나섰다. 박헌영을 편지에서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좌우합작이야말로 자신이 주도해야할 민족적 사명임을 자임한다. 그리고 6월23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곳곳에 뿌렸다. [동아일보]가 당시 보도한 기사를 원문 그대로 읽어보자.

「인천 좌익진영의 거두 조봉암씨의 명의로 지난 22일 상오 인천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민전’ 주최 인천시민대회장과 기타 각 관공서와 신문사 등에 다음과 같은 공산당과 그 지도하에 있는 모든 정치운동을 부인하는 성명서가 배포되었다.<성명서>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정당의 윤곽은 여좌(如左)함.1. 연합군의 승리에 의하야 그들이 호의로써 해방의 기쁨을 어든 우리 조선민족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야 건실한 자유의 국가를 건설함에 있고 어느 1계급이나 1정당독재나 전제(專制)여서는 안된다는 것.2. 조선민족은 자기의 자유의사에 의하야 민족전체가 요구하는 통일된 정부를 세울 것이고 공산당이나 민주의원의 독점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3. 현재 조선민족은 공산당 괴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조선공산당의 계획으로 된 인민공화 국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으로써 정권을 취하려는 정책은 단연 반대한다는 것.4. 우리 조선민족은 아메리카를 비롯하야 연합국에 대하야 진심으로 감사할 것이며 또 진심으 로 협력하야써 건국에 진력할 것이오. 지금 공산당과 같이 소련에만 의존하고 미국의 이상 을 반대하는 태도는 올치않다는 것.5. 조선의 건국은 민족전체와 자유생활이 보장되여야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독재나 자본주의 전제를 반대한다는것. 1946년6월23일 조봉암 ([동아일보] 1946년6월26일자 1면)

이 성명서는 좌우합작에 참여하려는 조봉암이 확실하게 남로당과의 ‘결별’을 밝히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군정 방첩대에 압수된 ‘박헌영 동지에게’ 쓴 편지 내용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자 조봉암은 한 달만에 태도를 급선회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공산당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며, 남북한 민족전체의 자유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는 의지를 과시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도 자본주의 계급독재도 반대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이 성명서 내용으로 보아, 조봉암은 공산당과 관계를 끊었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정용욱, 앞의 논문)

자신에 대한 이미지 바꾸기 작업을 끝낸 조봉암은 우파대표 김규식을 찾아가 좌우합작에 반드시 참여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김규식은 그러나 길게 검토하지도 않은 채 조봉암의 간절한 요청과 설득을 거절한다. 당시 미군정이 조봉암을 남한공산화 통일전선의 남쪽 연결고리 핵심으로 낙인찍었고, 여운형과의 미묘한 관계도 고려했을지 모른다. 그보다도 김규식은 자신이 소련과 중국에서 한때 공산당에 가담했으며 모스크바나 상하이에서 조봉암과 함께 했었기에 그 내막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다. ‘박헌영 동무에게’ 쓴 조봉암 편지의 본질이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좌익 거두’로서 발표한 성명서를 믿기에는 김규식이 공산당 특유의 전략전술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마치 ML당 출신 김준연이 조봉암을 배척했던 것처럼.

◆농림장관 6개월..농지개혁은 6년 걸렸다

5.10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덜컥 당선된다. 일반 사람들은 ’박헌영 비판자‘이자 ’공산주의 전향자‘로 이미 유명해진 인물에 대하여 더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여론‘이라는 마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실이야 여하간에 인기 좋은 ’가짜뉴스‘의 전파력은 영향력이 강하다. 두 달 뒤 조봉암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온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내각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그를 발탁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이제 모든 ’의혹‘에서 벗어날 면죄부를 받은 듯 기뻤을지 모른다. 사실 조봉암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응력도 언행도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하는 ’혁신계‘의 중진으로 변신해 있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자 출신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기용한 것은 농지개혁을 위한 전략적 카드였다. 국회를 장악한 지주계급 국회의원들의 반대를 제압하려는 정치10단 이승만의 ’돌파 무기‘ 선택이다. 과연, 조봉암은 과격한 좌파 부하들로 실무팀을 짜서 자신의 구상대로 농지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그때 ’사고‘가 터진다. ’공산당 같은 조봉암‘을 기피하는 지주층 국회의원들의 감시망에 걸려 버린 것, 즉 이번에도 ’공금유용‘ 혐의였다, 농림부 국가예산으로 장관 사택을 수리한 것이 적발되고 말았다. 일찍이 아내의 폐병을 고치려고 공금을 유용했던 버릇이 도진 것인가. 박헌영에게 공격받았던 똑 같은 약점을 또 잡혀버린 조봉암은 취임 6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농지개혁과 조봉암의 역할?=지금 사람들은 농지개혁이 조봉암의 공로라고 말한다. 우파 정치인들까지 좌파를 포용한답시고 무작정 칭찬하고, 역사교육을 못 받은 일반인들은 막연히 ’조봉암=농지개혁자‘인 줄로 등식화한다. 가히 국민적 집단착각이 너무 심하다. 알고 보면 조봉암이 농지개혁에 기여한 것은 사실상 없다.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공로가 있을까.왜냐하면 조봉암이 제출한 극좌적 개혁안을 이승만이 모조리 거부했기 때문이다. 조봉암이 초기 퇴장한 농지개혁은 이승만 평생의 꿈! 조봉암의 후임 이종현(李宗鉉)부터 윤영선(尹永善), 공진항(孔鎭恒), 임문환(任文桓) 등 6년간 무려 8명의 장관을 거쳐서야 완성될 수 있었던 난공사였던 것이다. 오늘 날, 조봉암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이들이 ’조그만 긍정요소‘라도 찾아내 그의 공로를 부각시키려 애쓰는 그 갈망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있는 대로 알고나서 역사를 정리하고 올바른 인식하에 ’포용‘하는 것이 학문적 연구와 국민설득을 위한 역사의 순리일 것이다. 참고로 농지개혁 과정을 간단히 살려보자.

조봉암이 만든 개혁안은 농민상환액과 지주 보상 사이 차액을 정부가 전액 부담하는 것, 이승만은 이를 담박에 던져버렸다. 자신의 구상대로 새로 만든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1950년 3월10일, 세부규정은 6월23일 공포한다. 6.25전쟁 이틀 전이다. 그렇다면 농지개혁은 전쟁 때문에 실패한 게 아닌가. 그러나 아니었다. 1951년 2월 16일 피난수도 부산에서 열린 국회에서 의원들이 농지개혁에 대해 질문공세를 펼치자 농림부는 당당히 답변한다. "농지개혁은 1950년 4월 15일에 거의 완료되었다" 모두가 놀랐다. 아니, 시행규정이 발표되기도 전에, 그것도 전쟁직전에 어찌 실시되고 완료까지 되었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았다. 국내만이 아니라 일본의 좌파 경제사학자 사쿠라이(櫻井浩)는 「한국의 토지개혁과 한국전쟁」(1976)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정부 주장은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의 커밍스(B. Cumings)도 전쟁 전에 농지분배는 되지 않았으며, 서울수복 이후에도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압력 때문에 미온적이었다고 써놓았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II], 1990).

◉농지개혁, 6.25 직전에 사실상 완료사실이었다. 진짜 거짓말은 이들이 하고 있다. 현장 조사도 연구도 없는 인민재판격이다.이 연재의 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농민을 장악하기 위한 결단”이다. [올리버, 앞의 책]개인적 지지 획득을 노려서가 아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토지 몰수‘로 농민을 정부의 노예로 만드는 소비에트 공산독재체제 구축이다. 공산당을 잘 아는 이승만은 ’농민 해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노예농민을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격상 시켜 통합하는 정치경제혁명이다. 유상몰수-유상분배로 지주도 소작인도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사유재산권의 보호, 그것은 개인의 경제자유권을 보장하여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칙을 따른 것이다.“농번기가 오기 전에 분배를 완료하자” 이승만의 불호령 채찍에 관료들이 신나게 뛰었다.조봉암이 사퇴한 1년 뒤에야 농지개혁법이 공포된 1950년 3-4월경엔 농지분배가 기적같이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한국의 전통적 농촌경제 문화를 모르면 이런 기적을 짐작도 못 한다. 미국-일본 학자들이 어찌 이해하랴. 수천년 이어 내려온 지주와 소작인의 농사 메카니즘은 현대적 법률이 없고 세부규정이 없어도 전통적 불문율에 따라 사시사철 농촌문화의 바퀴를 돌려왔다. 이번 농지개혁도 일부 과욕의 횡포와 사기성 일탈도 터졌지만 대부분은 정부보다 먼저 농민들이 뛰쳐 일어나 앞장서 스스로 해결해 나갔다. ’꿈에 그리던 내땅 갖기‘ 숙원을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풀어낸 역사적 농촌혁명이었다. 상전벽해! 이로써 이승만은 애초에 설정했던 목표, 북한의 ’몰수‘와 차원이 다른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농지개혁과, 동시에 닥친 북한의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것이다. 조봉암의 공로? 농지개혁을 기획하고 그 바람직한 실현을 위해 헌신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집념과 미친 듯한 독려와 그에 따라 협력한 관료들이 있었기에 그 성공이 가능했던 일임은 자명하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0). 어느 시대 어느 분야 무슨 국가적 프로젝트이건 당연히 혼자 해내는 일은 거의 없다. 잘 기획하고 강력히 조직을 가동시켜 완수했다면 그 최초의 기획자가 바로 공로의 주인공임은 상식에 속하는 일 아닌가.

◆최초의 단일야당 민주당(民主黨)의 탄생

정치권의 태풍!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개헌이 사사오입이라는 변칙적 강행으로 끝나자, 이에 반발한 야권 정당들이 건국이후 최초로 합쳐지는 ’야권 통합‘ 바람을 불러왔다. 개헌 파동부터 10개월 동안, 조봉암 영입문제로 우왕좌왕 진통을 거듭하던 신당운동이 가을에 접어들어 비로소 열매를 거두려는 창당 태세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9월18일 한국 현대정치사상 최초의 야권통합 정당 ‘민주당’(民主黨)이 탄생한다.신당운동의 주역 민주국민당(민국당)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발전적 해체를 결의한 뒤, 이튿날 9월19일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민주당 발당(發黨:창당)대회를 열었다.조봉암 등 혁신계(좌익)을 배제한 민주당은 “반공으로 민주주의 기반을 확립한다”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로 책임정치를 실현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오전 발기인대회를 마친 창당대회는 오후 2시 강당 내외로 운집한 방청객과 발기인 1천2백명이 참석, 개막되었다. 곽상훈 임시의장의 개회사와 신익희의 인사말에 이어, 사사오입 개헌의 사회자 자유당 최순주(국회부의장)이 “민주당의 창당과 장래의 발전을 축하하며 양당정치를 지향하여 협조를 바란다”는 축사를 했다. 민주당은 선언문에서 권력의 집중과 관료독재를 우려한다며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정권의 원활한 이동으로써 정치의 광정(匡正)을 기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자유와 민주와 통일”만이 국제정의에 합치됨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는 이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호상협의로써 기성조직에 구애됨이 없이 결속하여 오늘 민주당을 결성함을 엄숙히 선언한다“며 만세를 불렀다.

★한국정치 첫 양당체제...그리고 민주당의 분열

단일 야당 민주당의 등장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현대적 양당정치 구도의 탄생이다. 국회에 집권당 자유당과 야당 민주당의 대좌, 과연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미의 그것처럼 집권당과 수권정당으로서 견제와 협력적 경쟁을 통하여 성장과 발전의 기틀을 만들어낸 것일까. 신익희를 초대 당대표로 추대한 민주당은 그러나 불행하게도 출발부터 ’파벌‘ 색깔을 드러낸다. 민주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주력이 민국당인데, 그들이 통합한 세력은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파, 무소속계열 일부였다.민국당도 구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의 집합체였으며 새로 진입한 세력들도 쉽게 뭉치지 못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55년 출범한 민주당은 61년 박정희 쿠데타와 함께 5년반 만에 종말을 고하는 운명을 맞는다. 왜 그러했는가.한마디로 ’파벌싸움‘ 때문이다. 기존의 민국당 중심의 ’구파‘와 영입세력의 ’신파‘로 갈라진 파벌다툼은 정치이념 실현과 집권 대체세력으로서의 경쟁보다는 권력쟁탈전에 몰입한 탓이다.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이 독주와 횡포를 거듭할 때 ’독재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 앞에선 내부 암투는 감추고 표면적으로나마 응집될 수 있었으나, 막상 4.19이후 집권기회가 오자 4분5열을 거듭한다. 구파의 대표는 유보선, 신파의 대표는 장면이다. 무슨 계기마다 구파도 갈라지고 신파도 찢어져 자파끼리도 멱살 잡고 싸우는 4색당쟁의 연속극이나 다름 없었다. 연구자들의 평가대로 민주당 역시 현대적 민주정당과는 거리가 먼 왕조시대 ’양반정치‘의 구습을 반복하는 수구적 추태를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날마다 전국을 휩쓰는 ’데모 천국‘에서 추락하는 국가경제와 실업사태의 국민생활은 방치된 채, 국가경영능력은 행방불명이다. 특히 그동안 숨죽였던 소위 ’혁신세력‘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북한이 이에 가세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남북한 이념공세 속에서 국가안보는커녕 속수무책 말한마디 못한 당쟁 전성기였음에랴. 건국헌법을 제정할때부터 ’내각제‘에 집착했던 그들이 막상 내각제로 개헌하여 집권하자 ’파벌분권‘의 모순이 금방 드러났다. 마침내 민주당은 집권 10개월도 안돼 ’반공국시‘를 앞세운 군부 쿠데타를 불러왔다. 단명의 내각제 맹종 정당은 창당 5년9개월 만에 이름조차 찾을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다. 국민들은 자업자득이라며 연민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면 조봉암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민주당 창당과정에서 공산당으로 찍혀 배척당한 그 역시 ”출신계급은 못 속인다’는 레닌의 말처럼, 배운 대로 하던 대로 고집하다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국가의 생사를 건 이념대결 최전선에서 개인의 구차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 시대였음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알았다면 왜 그렇게 행했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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