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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갑옷 입고 ‘전쟁터’ 누빈 황후 이야기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혈세관광 의혹 前 영부인 사건 결말은?

 

여기 국모(國母)의 표상 같은 인물이 있다. 요(遼)나라 5대 황제 경종(景宗)의 아내이자 6대 성종(聖宗)의 어머니였던 예지황후(睿智皇后)‧승천태후(承天太后) 소작(蕭綽‧생몰연도 서기 953~1009)이다.

 

요사(遼史) 등에 의하면 소작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두 명의 다른 자매가 집안을 청소할 때마다 대충대충 처리한 반면 소작은 매번 꼼꼼하게 닦고 깨끗이 쓸었다. 이를 본 부친 소사온(蕭思溫)은 딸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거라 여겼다. 그 영향인지 고대~근세 동아시아에서 자(字)는 보통 남성에게만 부여됐으나 소작은 염염(炎炎)이라는 자가 주어졌다.

 

969년 회주(懷州)로 대규모 사냥에 나섰던 폭군 목종(穆宗)이 요리사 신고(辛古) 등에 의해 주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소사온은 경종을 새 황제로 옹립했으며 슬기로운 소작을 귀비(貴妃)로 추천했다. 입궁 후 황후(皇后) 자리까지 오른 소작은 별 볼일 없었던 남편을 대신해 국정(國政)을 다스리기 시작했고 경종 사후엔 섭정(攝政)이 됐다.

 

그러나 소작은 누구처럼 초호화 진주반지 돌려 끼우기를 하거나 황제 전용마차에 자신이 타고서 “타지마랄” 만류도 뿌리친 채 호화유람 나서지 않았다. 대신 안으론 황실(皇室)을 엄히 단속하고 밖으로는 민생을 챙겼다.

 

소작은 우선 아들 성종을 방탕하게 성장토록 내버려두는 대신 엄히 단련시켜 명군(明君)으로 키워냈다. 후일 원(元)나라 때 토크토아(脫脫)에 의해 집필된 요사는 성종에 대해 “요나라 임금 중 유일하게 군주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했다. 성종은 생전에 이미 예문영무준도지덕숭인광효공성치정소성신찬천보황제(睿文英武遵道至德崇仁廣孝功成治定昭聖神贊天輔皇帝)라는 어마어마하게 길고 화려한 존호(尊號)를 얻었다.

 

소작은 또 황족(皇族)이라 해도 법 앞에 평등함을 실천했다. 고려(高麗) 침공으로 유명한 소손녕(蕭遜寧)은 소작의 사위였다. 997년 소손녕의 아내 월국공주(越國公主)가 병들어 눕자 소작은 현석(賢釋)이라는 궁녀를 보내 딸을 간병케 했다.

 

그런데 소손녕은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직분도, 천륜도 잊어버린 채 현석과 신나게 간통했다. 병석에서 이 충격적 소식을 들은 월국공주는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중세 시대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리고 황실을 능멸하는 건 죽어도 싼 중죄였다. 소작은 즉각 사약을 내려, 그래도 아직 엄연히 월국공주가 낳은 소필적(蕭匹敵)이라는 외손자의 아버지 즉 황족이었음에도, 소손녕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소작은 나라살림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대신 출신 가리지 않고 현인(賢人)들을 적극 기용해 현명히 꾸려나갔다. 대표적 사례가 피지배층인 한족(漢族) 출신의 명신(名臣) 한덕양(韓德讓‧야율융운)을 중용해 요나라의 명장(名將) 야율사진(耶律斜軫)과 함께 문무(文武)를 이끌도록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요나라 최전성기를 일궈냈다. 특히 한덕양은 새 법전(法典)을 편찬해 공포하는 한편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해 널리 인재를 모집하고 불경(佛經)을 편수(編修)해 백성을 덕으로써 교화했다. 부역(賦役)은 최소한으로 하거나 종종 면제했고 부정축재하는 귀족들은 엄벌로 다스렸다. 야율사진은 송(宋)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두 사람 모두 생전에 왕(王)에 봉해졌다.

 

소작도 솔선수범했다. 그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진주반지나 돌려 끼우고 수천만원 어가식(御駕食)을 먹는 대신 무려 자신이 ‘갑주’ 걸치고 ‘병장기’ 지닌 채 ‘전쟁터’로 나아갔다. 송나라가 북벌(北伐)에 나서자 이를 몸소 요격하는 한편 1004년 역격한 것이었다. 소작이 정말로 갑주 입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허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戰場)은 언제든 중군(中軍)이 적에게 뚫릴 수 있기에 착용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여성도 무예를 익혔다.

 

송나라 건국에 앞서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은 오늘날의 북경(北京) 부근인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거란(契丹)에게 들어 바친 바 있었다. 거란은 이 땅을 통해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으로 비로소 진출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송나라로선 반드시 수복해야만 했다. 송태종(宋太宗)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을 쳤으나 그 자신도 화살에 부상을 입는 등 실패했다.

 

소작은 내친김에 스스로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송을 공격했다. 주화파(主和派)였던 송진종(宋眞宗)은 거란의 기세에 눌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소작은 “요‧송은 형제관계를 맺는다. 송은 앞으로 매년 비단 20만필과 백은(白銀) 10만냥을 요에 바친다”는 내용의 전연지맹(澶淵之盟)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10만냥도 크게 깎은 것이었다. 진종은 특사 조이용(曹利用)에게 “화의(和議)를 맺을 수만 있다면 100만냥도 좋다” 무기력하게 말했다. 재상 구준(寇准)은 조이용에게 “30만냥을 넘으면 참하겠다” 을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조이용은 소작에게 애걸한 끝에 비단 20만필, 은 10만냥으로 퉁치는 데 성공했다. 소작은 마치 크세르크세스(Xerxes)의 영화대사처럼 “나는 관대하다” 외쳤다.

 

요나라는 화친 조약문에 스스로를 ‘대거란국(大契丹國)’으로 칭하며 위엄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요나라의 명성은 키타이(Khitai‧캐세이)라는 이름으로 멀리 유럽에까지 퍼졌다. 영국계 항공사 캐세이퍼시픽 사명(社名)도 여기에서 따 온 것이다. 조야(朝野)는 소작에게도 예덕신략응운계화승천황태후(睿德神略應運啟化承天皇太后)라는 길고 화려한 존호를 올려 그 공적과 덕을 기렸다.

 

‘혈세(血稅)관광’ 의혹의 전직 영부인이 첫 의혹 제기인을 최근 경찰에 고소했다. 해당 전직 영부인과 그 배우자는 ‘아무 죄가 없다’는 취지로 아주 기세등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의혹 제기인과 그의 소속 정당은 유죄(有罪)를 확신하고 있다. 전직 영부인의 청와대 시절과 퇴임 후 행적이 깨끗했다면 이런 의혹이 제기되고 이를 뒷받침할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겠냐는 것이다. 검찰은 19일 고발인 조사를 시작으로 전직 영부인 수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1000년 전 요나라의 승천태후 사례와 아주 대조되는 이 사건의 결말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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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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