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기울어진 운동장, 반드시 바로잡힐 것
얼마 전 필자는 그간 까맣게 모르고 지냈던 우리 역사 하나를 찾았다. 충격이었다. 우리 민족이 단 ‘4명’의 무사(武士)만으로 왜구(倭寇) 칼잡이 ‘1000명’을 무찌른 역사가 있었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뭍에서는 왜구에게 거의 늘 열세였던 것으로 알았던 우리 한민족이 말이다.
주인공은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마치 영화 같은 활약을 펼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을묘왜변은 조선(朝鮮) 13대 국왕 명종(明宗‧생몰연도 1545~1567) 치세 때 왜구들이 오늘 날의 전남‧제주 지역을 공격한 사건이다.
앞서 왜구는 1510년 부산포(釜山浦)‧내이포(乃而浦)‧염포(鹽浦) 등에서 반란을 일으킨 삼포왜란(三浦倭亂), 1544년 대마도(對馬島)에서 출항해 사량진(蛇梁鎭)을 약탈한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등 조선 땅에서 갖은 패악질을 벌였다. 이에 명종은 왜구와의 무역량을 줄이는 고강도 대응에 나섰다. 그러자 왜구는 곡창지대가 있는 전남을 털고 제주를 아예 ‘해적기지’로 만들기 위해 함선 70척, 병력 수천 명 규모로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1555년 5월의 1차 침공에서 왜구는 전남 곳곳을 털어먹으며 초토화했다. 조선군의 대응으로 전북‧경상도로의 진격이 막힌 왜구는 더 이상의 약탈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동년 6월 한 무리의 왜구가 제주를 습격해 2차 침공이 발발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등에 의하면 제주에 들이닥친 왜구는 무려 1천명에 달했다. 바야흐로 제주도민들이 일본도(日本刀) 아래 유린되고 제주도에 해적깃발이 꽂힐 찰나, 제주목사(濟州牧使) 김수문(金秀文)은 날랜 군사 70명을 이끌고 뭍에 상륙한 왜구에 맞섰다.
김수문 등은 왜구 진영 앞 30보(步) 즉 약 40m 거리까지 접근했다. 우리 병사들이 활을 쏘자 왜구 진영은 크게 흐트러졌다. 조선의 편전(片箭‧애기살) 등의 위력은 주변국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강했다. 애기살은 속도가 빠르고 사거리가 길며 관통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상대로선 화살이 활을 떠났는지 알 수가 없어 대처가 매우 어렵다. 그 위력은 2011년 영화 ‘최종병기 활’ 등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왜구들은 옆 동료가 고슴도치가 되는 걸 보면서도 퇴병(退兵)하지 않았다. 이에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명이 말(馬)에 올라 왜구 진영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4인의 치마돌격대가 목숨 내놓고 적진을 피로 물들이자 그 칼춤의 명수라던 왜구들은 칼 한 번 제대로 못 휘두르고 소변을 지리며 달아났다. 70인은 그 뒤를 추격해 많은 수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치마돌격대가 거창한 영웅호걸들이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2021년 8월 한 제주 현지매체 칼럼에 의하면 정로위는 중종(中宗) 때 삼포왜란을 계기로 창설된 정예군이다. 나머지 김성조‧이희준‧문시봉은, 이견이 있긴 하나, ‘한량(閑良)’ 출신으로 왜구가 쳐들어오자 자진입대해 ‘임시’로 갑사 등에 임명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명종은 실로 놀라운 활약을 펼친 이 4인에게 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 등의 벼슬을 내려 용맹을 크게 치하했다.
대한민국 양당정치가 실로 대위기다. 10일 이후 대한민국이 기울어져도 크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 있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진다. 그러나 우리 모두 4인의 치마돌격대 같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만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금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