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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한동훈의 ‘곤조’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검사 출신 한동훈, 정치 의미 곱씹어보길

 

무장(武將)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 직업이다.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서 이기고 그런 것 없다. 무예를 수련하고 병법을 익혀 꼿꼿한 기개로 무조건 승리를 쟁취해내야 한다.

 

때문에 무장들에겐 이른바 ‘곤조(こんじょう)’라는 게 있다. 곤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근성(根性)이지만 보통 ‘높은 자존심’ 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다. 물론 외래어이다 보니 공적인 자리든 일상생활에서든 사용은 지양하는 편이 좋겠다.

 

‘곤조’로 무장한 무장들은 문관(文官) 전업 시 적응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숙임의 미학(美學)’이다. 국민을 덕(德)으로 섬기고 인의(仁義)로 대해야 한다. 국민이 불만 좀 내뱉는다고 전장(戰場)에서 했던 것처럼 “제일검” 운운하며 꼿꼿하게 창칼 휘둘렀다간 그날로 패가망신한다. 대표적 인물들은 동탁(董卓)‧이각(李傕) 등 역사상 차고 넘친다.

 

그러나 몸과 머리에서 힘을 빼고 창업(創業)에 성공한 이들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생몰연도 서기 927~976)이다.

 

조광윤도 여느 무장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946년 20세 무렵에 군문(軍門)에 들어간 그는 기골(氣骨)은 장대했고 창술(槍術)‧봉술(棒術)에 능했다. 성격도 다혈질이고 ‘곤조’가 있어서 훗날 제위(帝位)에 오르고서도 종종 신하들의 옥수수를 손도끼로 털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광윤은 금세 자기 잘못을 깨닫고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애완조(愛玩鳥)와 놀며 쉬고 있을 때였다. 한 신하가 들어와 상소를 올렸다. 조광윤은 “중요한 것 아니면 내일 처리하자. 나가라” 말했다. 그러나 신하는 끝끝내 상소문 들고 버텼다. 조광윤은 문득 그 신하의 치아건강이 염려된 듯 주머니에서 연장을 꺼내 옥수수 몇 개를 빼줬다.

 

입주변이 피투성이가 된 신하는 상소문을 들고 나가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사관(史官)에게 빠짐없이 전달하겠습니다” 말했다. 조광윤은 “저까짓 게 감히” 신하의 목을 날려버리는 대신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아차 했다. 그는 “잘못했다. 앞으론 내가 뭘 하더라도 망설이지 말고 상소를 올려라” 사과했다. 물론 이 일화가 사서(史書)에 기록돼 약 1천년 뒤의 필자가 이렇게 옮겨 적고 있는 걸 보면 그 신하는 끝끝내 사관에게 일러바친 모양이다.

 

‘힘 빼기’의 결정판은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었다.

 

960년 무렵 진교(陳橋)란 곳에서 군대를 이끌고 회군(回軍)한 조광윤은 그가 속했던 후주(後周)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건국했다. 조광윤을 따른 여러 장수들은 거사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병권을 쥐었다. 그들이 언제든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기에 조광윤으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광윤은 ‘제일검’ 휘둘러 강제로 축출하거나 멸족하는 대신 세 치 혀만으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냈다. 그는 건국 당해에 소의절도사(昭儀節度使) 이균(李筠)과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이중진(李重進)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직후 조광윤은 모든 휘하 장수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이 밤의 끝을 잡고 늘어지게 먹고 마셨다.

 

모두의 필름이 끊길까 말까 한 찰나, 조광윤은 시종들을 모두 물린 뒤 꼬인 혀로 은근슬쩍 말했다.

 

“딸꾹. 너희들 도움이 없었다면 짐(朕)은 천자(天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헌데 짐은 아직도 밤잠을 설치고 있다. 딸꾹” “폐하, 혹시 신(臣)들이 역심을 품을까 염려되시는 것이옵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딸꾹” “짐도 원래는 후주에 반기를 들 생각이 없었는데 그대들이 술 먹이고서 꽐라가 되자 억지로 용포(龍袍) 입히지 않았던가. 만약 너희들 측근이 너희들에게 같은 짓을 한다면 어찌 할 텐가?” “딸꾹...”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돈 그리고 마음의 평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석토록 하라...”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장수들은 이튿날 일제히 병권을 반납했다. 조광윤은 약조대로 그들에게 안락한 노후를 보장했다. 한고조(漢高祖)와 한신(韓信)과는 달리 피 한 방울 없이 모두가 행복한 방향으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이뤄진 해피엔딩 사건이었다. 만약 내전이 발발했더라면 나라는 또다시 혼란에 휩싸이고 많은 이들이 전쟁통에 목숨 잃었을 터였다.

 

당연히 조광윤은 백성도 덕으로서 다스렸다. 그는 창칼 앞세운 공포정치가 아닌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추구하고 유학자 출신 조보(趙普) 등을 중용했다. 또 수리(水利)시설을 확충하고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해 백성이 배부르게 먹도록 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란 뜻의 불야성(不夜城)은 북송(北宋)의 수도 동경(東京) 개봉부(開封府)에서 유래됐다. 포청천(包青天)의 전설이 써내려진 때도 북송 시기다.

 

이러한 ‘힘 빼기’의 결과 먼 훗날인 1279년 송나라가 몽골족의 원(元)나라에게 공격 받자 많은 백성과 후주의 구(舊) 황족 시씨(柴氏) 가문은 ‘진심’으로 목숨 걸고 싸우고서 송나라와 명운을 같이 했다.

 

검사 시절 범법자들과 싸워온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일 부산 유세에서 유권자들에게 큰절을 올리자는 주변 제안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는 “범죄자와 싸우는데 왜 큰절을 하나? 서서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한 위원장은 더 이상 검사가 아니다. 큰절도 국민에게 올리는 것이다.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긴 하나 늦게나마 정치(政治)의 본질적 의미를 곱씹어보고 현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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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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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4.05

    대파금지령. 화룡점정입니다. 남의 집 말아먹은 여섯 역적은 알아서 능지처참 당하시길. 아이큐 테스트부터 좀 받고, 제가 궁금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