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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국민의힘의 분병정향(分兵定向)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분병정향 채택했다 망한 이자성과 아이들

취약한 리더십마저 사라진 與… 미래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

 

조직(組織)은 한자의 직(織)이 기치 치(織)로도 쓰이듯 한 명의 리더를 중심으로 한 조직력이 생명이다. 조직‧단결을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구심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 구성원은 저 혼자 살고자 각자도생(各自圖生)‧조삼모사(朝三暮四) 한 끝에 공멸(共滅)하고 만다.

 

리더십의 위력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됐다. 1961년 미국 예일대(Yale University) 심리학과 조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행한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복종실험)이 그것이다.

 

밀그램은 20~50대 남성 피(被)실험자 40명을 모집한 뒤 두 무리로 나누어 한 쪽은 선생, 한 쪽은 학생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선생 측이 학생 측에 문제를 내게 한 뒤 틀리면 15~450볼트의 전기충격을 가할 것을 지시했다.

 

당연히 선생 측은 고문이나 다름없는 체벌(體罰)을 거부했다. 그러자 밀그램은 자신의 사회적‧학식(學識)적 권위를 강조하면서 “실험을 위해선 계속 진행해야 한다” “당신에겐 이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종용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선생 중 65%가 명령을 충실히 좇아 450볼트까지 전압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렸다.

 

비록 이 실험은 비(非)윤리성을 이유로 지탄 받고 밀그램은 대학에서 쫓겨났으나, 강력한 리더십이 휘하를 얼마나 사심(私心) 없이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리더십의 위력은 1971년 미 스탠퍼드대(Stanford University) 명예교수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의 스탠퍼드 감옥 실험(SPE)으로 재차 과학적 입증이 이뤄졌다.

 

<“리더십 안 통하니 각자도생하자”>

 

반대로 리더십 부재로 인해 엉망진창 공멸한 도적떼 사례도 있다. 명말(明末) 무렵 반란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생몰연도 1606~1645)과 아이들이 그들이다.

 

이자성은 섬서성(陝西省)의 중농(中農)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족할 것 없는 이자성이었으나 문제는 말기의 명나라는 부정부패가 극심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집안은 온 마을 조세(租稅) 부족분을 사비(私費)로 메우다가 쫄딱 망했다. 이자성은 역참(驛站) 잡부나 군(軍) 졸병으로 일했으나 허구한 날 밀리는 봉급에 손가락만 빨았다.

 

결국 이자성은 틈왕(闖王) 고영상(高迎祥) 휘하에 들어가 도적떼가 됐다. 그런데 고영상은 허우대만 그럴싸할 뿐 권위‧능력으로 무리를 이끌 재목이 못 됐다.

 

명 조정은 병부상서(兵部尙書) 홍승주(洪承疇)에게 수십만 대군을 주어 도적떼를 토벌토록 했다. 고영상 밑의 중간보스‧행동대장들은 혹자는 관군(官軍)과 정면승부 벌이자며 팔뚝 자랑하고 혹자는 속옷이 젖어 “엄마 보고 싶어요” 우는 등 중구난방(衆口難防) 지껄였다.

 

“너는 이리 가서 적을 막고 너는 저리 가서 병참(兵站) 맡아라” 겨우 의견이 좁혀질 만하면 불만은 재차 터졌다. 명군(明軍)을 대적하게 된 이들은 “싫어, 내가 보물창고 털 테니 쟤가 적군 막으라고 해” 면상에 삿대질 했다. 좌우는 급기야 “네가 험지로 가” “나는 강남‧영남‧분당 갈 거야” “이런 X맨” “혁신 걸림돌” 멱살 잡고 뒹굴었다.

 

고영상은 좌우로 도리도리하며 “그래 네가 옳다” 하거나 “아냐 네가 옳다” 입장 번복하고 달래기 바빴다. 그는 무리를 설득하고 복종시킬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자연히 총의(總意)는 모아질 생각을 안 했다.

 

그나마 머리가 조금 더 똑똑했다 자부한 이자성은 “이런 무식한 X들” 벌떡 일어나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 1735년 청(淸)나라 때 출간된 명사(明史)에 의하면 그건 분병정향(分兵定向)이라는 것이었다. 분병정향은 쉽게 말해 “너도 나도 양지(陽地)가려 하니 차라리 우리 모두 찢어져 제 갈 길 가자”는 게 내용이었다.

 

<양지만 찾다 공멸한 두령들>

 

사실 진압군으로선 도적떼 분산은 생각하기 싫은 시나리오였다. 이놈 저놈 잡으러 발바닥 땀나게 뛰다가 세월 다 보낼 게 뻔했다. 적을 한 곳에 몰아넣고서 질적 양적 우세 앞세워 일격에 때려잡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따라서 분병정향은 언뜻 그럴싸했다.

 

문제는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면 체계적인 천하평정은 물 건너 간다는 것이었다.

 

반란군으로선 확고히 전국 상당수를 장악해야 조정‧관군에게 맞설 수 있었다. 그런데 모여 있어도 통제 안 되는 애들이 무전기도 없는 그 시절에 사분오열(四分五裂) 되면 얼마나 말귀 안 들어 X먹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각 두령(頭領)들이 일사분란히 천하를 장악하기는커녕 각자의 안방에만 틀어박혀 중앙당이야 망하든 말든 제 등만 뜨끈히 지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관군 머릿수에 밀려 다 같이 손잡고 저승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권위라곤, 족보(族譜)라곤 없는 이자성의 리더십도 사실 고영상보다 딱히 더 뛰어날 건 없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자성은 ‘세금 면제, 부역(賦役) 면제’라는 현실성 없는 포퓰리즘 공약으로 민심(民心) 모아 대순국(大順國) 건국이라는 김칫국부터 마시고 1644년 명나라 수도 북경(北京) 입성까지는 어째어째 성공했다.

 

그러나 이자성과 따로 놀던 두령 장헌충(張獻忠‧1606~1647)은 이자성이 청군(淸軍)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인데도 제 권세만 챙겼다. 멀리 서쪽 사천(四川)을 지역구로 삼은 장헌충은 중앙당이고 뭐고 대서국(大西國)이란 나라 세워 자기정치에만 바빴다. 그는 선대 두목 고영상이 명군에게 목이 떨어질 때도 모른 체 했다. 장헌충은 이자성이 청군에게 죽은 지 2년만인 1647년 청군에게 패사(敗死)했으며 대서국은 단 1대만에 멸망했다.

 

장헌충과 함께 움직인 나여재(羅汝才)는 장헌충이 잘 나가자 배가 아파 ‘팀킬’ 나섰으나 이자성에게 참살됐다. 이들을 포함한 13가(家)의 크고 작은 두령들도 모두 양지 찾아 떠나 제 배 불리기에만 집중했다. 이러한 분병정향이라 쓰고 바보들의 행진이라 읽는 행태 앞에 큰 힘 안 들이고 웃은 건 명청(明淸) 조정이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13일 당대표 사퇴를 선언했다. 그의 취약한 리더십이나마 있을 때도 각자도생 난무한 국민의힘이 권력공백 앞에 앞으로 어떠한 사태 맞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권위‧능력 갖춘 강력한 리더십이 등장한다면 분병정향식 최후는 면하고 어쩌면 대역전(大逆轉) 드라마도 써내려 갈 수 있으리라. 향후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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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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