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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오주한

말 그대로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오월동주 끝나자 권력 포기한 범려

韓 정치판 새털들과는 극과 극 대비

 

<와신상담의 전설>

 

와신상담(臥薪嘗膽)‧오월동주(吳越同舟) 등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오월(吳越) 두 나라의 관계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양국은 태생부터가 달라 앙숙처럼 다퉜다.

 

우선 장강(長江) 하류의 오나라 지배층은 주(周)나라 왕족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 의하면 주나라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희단보)는 멀리 서쪽에서 일족 이끌고 동아시아로 왔다.

 

상(商‧은)나라에 의해 기산(岐山) 일대 제후로 봉해진 고공단보는 셋째아들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했다. 이를 알아챈 장남 희태백(姬太伯), 차남 희옹(姬雍‧중옹)은 기꺼이 동생에게 옥좌(玉座) 양보하고 대륙을 가로질러 멀리 장강으로 향했다.

 

미지의 땅에서 지도자로 추대된 태백은 원주민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온 몸에 문신 새겼다. 태백의 뒤는 중옹이 이었다. 후일 주나라를 건국한 계력의 후손은 중옹의 후손을 찾아내 오씨(吳氏) 성을 하사했다. 또 오등작(五等爵) 중 두 번째 서열인 후작(侯爵)에 봉했다. 오태백은 오늘날 전 세계 오씨의 시조가 됐다.

 

참고로 주나라 왕실은 장강의 친척들에게 “고생 많았다. 이만 집으로 돌아와라” 권했으나 중옹의 후손은 “우리는 이미 이민족의 복색(服色)을 하고 있다” 거절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자국 황실(皇室)이 태백‧중옹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고도 한다.

 

반면 오나라 남쪽에 위치한 월나라 지배층은 현지 원주민이었다. 이들은 지금의 대만 원주민처럼 피부색이 비교적 어둡고 키가 작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Austronesia languages)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월나라가 주나라로부터 받은 작위는 오등작 중 네 번째인 자작(子爵)에 불과했다. ‘아들 자(子)’에서도 보듯 자작은 후작‧백작(伯爵)의 신하 쯤 되는 자리였다. 월나라로선 웬 굴러들어온 허연 돌이 상전 행세하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자연히 오월 두 나라 사이가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

 

<오월동주를 끝장내다>

 

오태백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월은 경쟁적으로 외국인을 기용하면서 국력(國力)을 키우고 서로를 굴복시키고자 호시탐탐 노렸다. 오나라에 임관(任官)한 외국인은 손자병법(孫子兵法) 저자 손무(孫武), 장강 중류 초(楚)나라 출신의 명장 오자서(伍子胥‧오운) 등이 대표적이다. 월나라는 오자서와 마찬가지로 초나라 출생인 범려(范蠡‧생몰연도 ?~?) 등을 중용했다.

 

사기‧월절서(越絶書) 등에 따르면 범려는 당초 고향에선 광부(狂夫‧미친 사내)로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던 중 초나라에서 월나라로 망명한 대부(大夫) 문종(文種)의 눈에 띄어 월나라로 향했다. 원래는 오나라로 가려 했으나 그곳에 오자서가 기틀 잡고 있는 걸 보자 “저 자는 내가 뛰어넘기 힘들다” 여겨 월나라로 방향 틀었다는 얘기도 있다.

 

범려가 관모(官帽) 쓸 무렵 오나라는 춘추오패(春秋五霸)로 등극해도 모자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기원전 506년 서쪽의 강국(強國) 초나라를 공격한 손무‧오자서는 초나라 도읍까지 밀고 들어갔다. 오자서는 암군(暗君)에게 억울하게 목숨 잃은 부친‧형님의 원수를 갚고자 초평왕(楚平王)의 시신을 꺼내 채찍으로 내리쳐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초나라는 비록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수도가 잿더미가 되는 등 빈사(瀕死)상태가 됐다. 당시 중원(中原)은 주나라 왕실이 권위 잃고 춘추시대에 이미 접어든 상태였다. 오나라는 본격적인 북벌(北伐)에 앞서 이번엔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월나라를 전격 침공했다.

 

이 때 활약한 게 범려였다. 오월전쟁 때 손무는 없는 상태였고 오자서는 전쟁을 반대해 열외된 상태였다. 두 명장이 없는 오나라의 허점을 꿰뚫어본 범려는 사형수들로 구성된 결사대(決死隊) 꾸려 오군(吳軍)을 대적토록 했다.

 

오군 앞에 나타난 결사대 일렬(一列)은 돌연 검으로 제 목을 찔렀다. 처음엔 놀란 오군은 이러한 월군(越軍) 2~3열의 기행(奇行)이 거듭되자 긴장을 풀어버렸다. 이를 본 결사대 본진은 우레 같은 함성 내지르며 오군 진영을 덮쳐 대승(大勝)을 거뒀다. 심지어 오왕(吳王) 합려(闔閭)마저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이번엔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자만심 휩싸였다. 그는 범려의 만류에도 수만 대군(大軍) 동원해 오나라를 들이쳤다. 부친 합려의 원수를 갚고자 매일 밤 장작더미 위에서 잠들고 오자서를 재차 중용한 부차(夫差)는 월군을 일격에 격파했다. 부차의 노예가 돼 ‘변(便)’을 맛보는 등 굴욕 겪은 구천은 매일 쓰디 쓴 웅담 핥으며 복수를 별렀다.

 

이 때 활약한 사람도 범려였다. 그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쳐 부차가 치마폭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었다. 또 “구천을 죽여야 후환이 없다”는 노신(老臣) 오자서와 부차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부차는 구천을 귀국시키고 오자서를 자결토록 하는 한편 후방을 비워두고 북벌길에 올랐다. 부차가 여러 중원 제후국들 굴복시키고 패자(霸者)에 올라 회맹(會盟) 가지며 희희낙락하는 그 순간 범려는 이빨 드러내고서 부차의 뒤를 맹렬히 덮쳤다. 오나라는 오월동주 끝에 멸망했다. 부차는 “지하(地下)의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 울먹이며 자결했다.

 

<치이자피가 된 범려>

 

월나라 승리의 최대 공신(功臣)은 단연 범려였다. 그런데 월나라의 세상이 펼쳐지자마자 범려는 제 손으로 스스로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한 채 잠적해버렸다. 소인배 구천이 ‘변 맛보기’ 등 자신의 어마어마한 치부(恥部)를 속속들이 아는 공신들을 반드시 토사구팽(兎死狗烹)할 거라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범려는 여전히 외지인 출신이었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범려는 은인(恩人)이자 같은 외국인 출신인 문종에게 “구천은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부귀(富貴)는 같이 누리기 힘든 사람입니다” 조언했으나 문종은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종이 반역을 꾀한다”는 풍문(風聞)이 나돌았다. 구천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종을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우리 월나라의 공신‧충신(忠臣)으로서 많은 고생을 했소. 반란이라니 당치도 않지. 그런데 그대는 과거 일곱 가지 계책을 내놨고 과인(寡人)은 그 중 셋을 사용해 오나라를 멸했소. 이제 나머지 비책 넷은 쓸모가 없는데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모시며 쓰는 게 어떻겠소?” 범려‧문종 등이 사라진 월나라는 머잖아 초나라에 병합돼 멸망하고 만다.

 

은거(隱居) 후 범려의 행적을 두고선 여러 설이 있다.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제(齊)나라로 가 거상(巨商)이 됐다는 말도 있다.

 

치이자피는 가죽으로 만든 자루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오자서는 부차에 의해 자결한 뒤 그 시신이 말(馬)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겨져 수장(水葬)된 바 있었다. 범려는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시대의 거목(巨木)이자 정계 대선배인 오자서를 존경했던 셈이다. 일설에는 범려가 자신을 흠모(欽慕)한 서시의 눈물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났다고도 한다.

 

작금의 대한민국 정계에는 범려의 처세술(處世術)이 보이지 않는다. 여야 막론하고 눈앞의 한 줌 신기루 같은 권력만 좇으며 아부하고 배신하며 배신당하는 이들만 보인다. 진중함은 사라지고 새털 같은 가벼움만 있다. 2천하고도 수백년 전 범려가 뼈다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개(犬)와 같은 이 모습들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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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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