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개담] 여의도의 힝클리 주니어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들 담은 담론

과대망상 빠져 레이건 저격한 힝클리 주니어

돌아온 건 포스터의 싸늘한 눈빛이었을 뿐

 

<포스터 스토킹>

 

1981년 3월30일 오후. 조지워싱턴대(George Washington U.) 대학병원에 한 명의 응급환자가 긴급히 실려 왔다. 이 환자의 와이셔츠는 피격(被擊)에 따른 출혈로 시뻘겋게 물든 상태였다. 환자는 생사(生死)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의료진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조크 건넸다. “당신들이 민주당원은 아니어야 할 텐데요”

 

해당 환자는 다름 아닌 미합중국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생몰연도 1911~2004)이었다. 그리고 레이건을 저격한 건 “나는 연방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할 정도의 거물이다” 과대망상(誇大妄想)에 사로잡혔던 존 힝클리 주니어(John W. Hinckley Jr‧1955~)였다.

 

힝클리는 남부러울 게 없는 부유한 집안 자제였다. 아버지는 세계구급 구호단체 월드비전(World Vision) 미국 대표이자 한 석유기업 이사장이었다고 한다. 힝클리는 고교 때까지 두 차례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모범적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1975년 무렵 인기가수가 되겠다며 LA로 갔다가 실패하고 가세(家勢)도 기울면서 점차 비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항우울제를 밥 먹듯 복용하던 힝클리는 언젠가부터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1976년작 택시드라이버(Taxi Driver) 등에서 열연한 헐리웃스타 조디 포스터(Jodie Foster)와 자신이 연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터가 1980년 명문 예일대(Yale U.)에 입학하자 근처로 이사해 포스터를 스토킹하는 등 힝클리는 위험한 범죄로 빠져들었다.

 

당연히 포스터는 기겁했다. 그릴수록 힝클리는 포스터 관심을 끌기 위해 그에게 직접 전화하거나 하이재킹(hijacking)‧자살극 등을 계획했다. 그러다가 결심한 게 ‘대통령 암살’이었다. 힝클리는 “미 대통령을 처단하면 포스터는 내게 반해 사랑을 받아줄 것”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환상에 젖었다.

 

힝클리의 첫 타깃은 지미 카터(Jimmy Carter)였다. 권총을 찬 채 카터에게 접근하려다가 경찰에 체포된 후 석방된 힝클리는 레이건으로 목표를 바꿨다. 힝클리는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 자료를 살피는 등 치밀하게 계획했다.

 

힝클리는 마침내 1981년 3월30일 망상을 실행에 옮겼다. “7개월 간 당신 관심을 얻기 위해 시와 편지와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소. 내가 몇 번 전화하긴 했지만 난 당신에게 다가가 내 자신을 소개할 만큼 강심장(強心臟)은 아니었소.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건 그대에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어서요” 범행 직전 포스터에게 이러한 취지의 편지를 보내고서 말이다.

 

<힐튼호텔에서의 여섯 발 총성>

 

힝클리는 범행 이틀 전인 3월28일 버스를 타고 워싱턴D.C.에 도착했다. 그는 신문 등을 통해 레이건 동선(動線)을 파악했다.

 

레이건은 30일 힐튼호텔(Hilton Hotels)에서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 대표들과 회동할 예정이었다. 힐튼호텔 대통령 전용 출입구에서 주차장소 거리는 수m밖에 되지 않았기에 레이건도, 시크릿서비스(SS‧비밀경호국)도 모두 방심했다.

 

30일 오후 2시30분께 호텔 앞에 레이건이 모습 드러내자 기다리던 지지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레이건은 포토라인에 서서 기자들 질문에 일일이 친절히 답했다. AP통신 기자가 “대통령 각하(Mr. President)”라고 운 떼는 순간 군중 속에 숨어 있던 힝클리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곤 22구경 리볼버(revolver)권총 탄환 여섯 발을 연달아 발사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첫 총알은 백악관 대변인 제임스 브래디(James Brady)의 왼쪽 눈썹 위를 뚫고 들어가 뇌 아래쪽에 박혔다. 브래디는 머리 총상에도 살아남아 평생 휠체어 신세 지다가 2014년 8월 향년(享年) 73세로 사망했다. 레이건은 그를 퇴임 때까지 대변인으로 중용(重用)했다. 브래디 외에 현장의 경찰관 한 명도 중상 입었다.

 

사람들이 비명 지르며 엉키고 구르는 사이 건장한 시크릿서비스 요원들은 레이건을 붙잡아 리무진에 던져 넣다시피 했다. 그 과정에서 요원 한 사람도 복부(腹部)에 총 맞았다.

 

당초 이들은 곧장 백악관으로 향하려 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무사한 줄 알았다. 그런데 돌연 그는 입으로 거품 섞인 선홍색 피를 토했다. 와이셔츠는 붉은 선혈로 빠르게 물들어갔다. 알고 보니 마지막 여섯 번째 총알이 리무진 방탄차체(車體)에 맞고 튕긴 뒤 열려 있던 차량 안으로 들어가 레이건의 왼쪽 겨드랑이를 파고 들어간 것이었다.

 

급히 운전대 돌린 리무진은 미친 듯이 내달려 약 4분만에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의료진은 환자가 미합중국 대통령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레이건은 그 때 이미 다량의 내출혈로 상당한 혈액이 손실돼 당장 숨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레이건은 70세 고령(高齡)이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의료진은 수술 약 1시간10분만에 심장 바로 옆에서 총알을 찾아냈다. 레이건의 수술은 기적적인 성공으로 마무리됐다. 그는 4월11일에야 백악관에 복귀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럭키가이” 레이건의 지지율은 급속도로 치솟았다.

 

<41년 간의 지옥>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힝클리는 곧바로 구속기소됐다. 그의 부모는 당대 최고 변호사로서 훗날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을 변호하게 되는 빈센트 풀러(Vincent Fuller)를 선임했다. 또 정신과학 최고 권위자 등을 동원해 1982년 재판정에서 아들의 정신이상을 관철시켰다.

 

무죄가 선고된 힝클리는 대신 치료감호(治療監護)를 명령받아 워싱턴 소재 세인트 엘리자베스(Saint Elizabeth) 정신병원에 수감됐다. 30여년 간 치료 받다가 2016년부터 보호관찰 대상으로 바뀐 힝클리는 지난해 6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로이터통신에 의하면 힝클리는 자신의 SNS에 “41년 2개월 15일, 마침내 자유다”는 글을 올렸다. CBS‧ABC 등과의 인터뷰에서 힝클리는 “내 과거를 사죄한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정계(政界)에도 힝클리 주니어 같은 이들 판 치고 있다. 최소한의 품위·도덕성도 없이 국가원수에게, 국무위원에게, 정계 원로(元老)에게 인격모독적 막말 쏟아붓고 있다. 마치 자신이 이들과 동급(同級)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듯 말이다. 또 이들에게 막말 던지면 국민이 자신의 구애 받아줄 것이라는 몽상(夢想)이라도 하듯 말이다.

 

틀렸다. 대다수 국민은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성 상실한 그저 한 마리 야수(野獸)만을 볼 뿐이다. 힝클리는 레이건을 쐈지만 돌아온 건 한층 더 싸늘해진 포스터의 눈빛과 경멸이었다.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여의도의 제2의, 제3의 힝클리들을 기다리는 건 한국판 세인트 엘리자베스와 평생에 두고두고 남을 회한(悔恨)일 뿐이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

 

20000.png.jpg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