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적은 혼노지에 있다며 노부나가 친 미츠히데
대의 아닌 사욕에 패망… 이준석도 답습하나
금지옥엽의 도련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은 일본사(史)에서 매우 유명한 사건 중 하나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다이묘(大名)였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생몰연도 서기 1516 또는 1528~1582)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사찰 혼노지(본능사)에서 쳐서 참살한 사건이다.
미츠히데는 유명한 다이묘로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나라 훔친 이야기(国盗り物語) 전반부 주인공인 ‘살무사(蝮)’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의 처조카였다.
어린 시절 도산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도련님으로 자라난 미츠히데는 당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와도 친분 맺을 정도로 잘 나갔다. 쇼군 즉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 막부(幕府) 체제에서 천황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린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존재다.
허나 권위보다는 창칼이 우선인 하극상의 전국시대에서 허수아비 쇼군은 미츠히데 출셋길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됐다. 이에 미츠히데가 ‘환승’한 인물이 머잖아 천하인(天下人)이 되는 노부나가였다. 미츠히데는 무로마치(室町)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위험인물인 노부나가 제거를 도모하자 그 계획을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칠 정도로 충견(忠犬)을 자처했다.
노부나가는 정예기병대로 용명(勇名) 떨친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세력을 ‘간토의 너구리(関東の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함께 무찌를 정도로 잘 나갔다.
성격에는 막힘이 없었다.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는 일본사(日本史)에서 “노부나가는 가신(家臣)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거의 무시했다. 가신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묘사했다.
전국시대를 다룬 다수 일본 시대극에서 노부나가는 과장 좀 보태서 조금만 수틀리면 부하에게 욕설 퍼붓고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미츠히데는 물론 수많은 무사들이 노부나가를 무서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증오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특히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자란 미츠히데에겐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까지 느껴졌을 여지가 크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때문일까, 미츠히데는 결국 반기(反旗) 들었다. 지금까지도 미츠히데가 왜 반란 일으켰는지 정확한 이유는 기록이 없기에 일본사에서 미스터리다. 허나 많은 이들이 “노부나가에 대한 개인적 악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 입 모아 추측 중이다.
노부나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미츠히데를 “대머리”라 놀리거나 발로 걷어차면서도 내치진 않았다.
1582년 막강한 다케다 가문을 멸한 노부나가는 모리(森)‧호조(北条)‧우에스기(上杉) 등 나머지 세력에게 창칼 겨눴다. 노부나가는 그 중 모리가(家)를 치기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내면서 미츠히데가 히데요시 지휘를 받게끔 했다. 그토록 멸시해온 빈농(貧農) 출신 휘하에 들어가게 된 ‘귀족’ 미츠히데 속은 누가 더 능력자인가와는 상관없이 더더욱 부글부글 끓었을 게 분명하다.
미츠히데는 자신의 휘하 병력 소집해 히데요시가 있는 곳으로 진군했다. 돌연 미츠히데는 “주군(노부나가)께서 교토(京都)에 계시면서 우리를 부르신다”며 말머리 돌렸다. 의심 없이 믿고 따라온 병사들과 함께 혼노지 근처에 이른 미츠히데는 돌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그 유명한 말을 외쳤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병마(兵馬)를 이리저리 갈라 출병(出兵)시킨 노부나가는 그 때 혼노지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지키는 병력은 호위무사 모리 란마루(森蘭丸) 등 극소수에 그쳤다. 반면 미츠히데 병력은 ‘1만’ 안팎에 달했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는 부자(父子)가 한꺼번에 목숨 잃는 걸 방지한다는 원칙 하에 당시 교토 시내 묘카쿠지(妙覚寺)에 머무른 탓에 신속하게 도우러오지 못했다.
1582년 6월2일 새벽 미츠히데의 1만 대군은 혼노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처음엔 하인들 다툼소리인 줄 알았던 노부나가는 미츠히데가 배신한 걸 알아챘다. 죽음을 직감한 노부나가는 활을 쏘다가 화살이 소진되자 창을 잡고 싸웠다. 끝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밀린 노부나가는 거처에 불 지르고서 자진(自盡)했다. 뒤늦게 달려온 노부타다는 이미 큰 일이 벌어진 걸 보자 니조성(二条城)으로 피신했으나 뒤쫓은 미츠히데에게 살해됐다.
미츠히데의 3일 천하
바야흐로 미츠히데의 완벽한 승리인 듯했다. 노부나가 본인은 물론 그의 장남까지도 제거했기에 후환(後患)은 없을 듯했다. 그러나 미츠히데는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대의명분(大義名分) 없는 사사로운 분풀이격 내부총질, 밑도 끝도 없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누구의 공감대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미츠히데는 자신이 노부나가 대신 교토 조정을 장악하면 평소 친분 있던 호소카와 후지타가(細川藤孝),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 등이 발 벗고 달려올 거라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이들은 ‘충의를 저버린 천하의 역적’ 타이틀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튈까봐 몸 사리며 미츠히데에게서 등 돌렸다.
그간 노부나가에게 얻어맞고 멸시받던 나머지 다이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혼노지의 변을 쌍수로 환영하는 대신 합심해 미츠히데를 치러 몰려왔다. 노부나가로부터 대머리쥐(禿げ鼠) 또는 사루(猿‧원숭이)라 욕먹었던 히데요시는 모리가와 신속히 화평(和平) 맺은 뒤 미츠히데에게로 달려갔다. ‘오니(鬼‧도깨비)’ 시바타 카즈이에(柴田勝家) 등도 미츠히데 목을 취하러 갔다.
히데요시는 신들린 용병술(用兵術)로 회군 약 3일만에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에서 미츠히데를 쓰러뜨렸다. 명분 없는 반역에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던 미츠히데군은 싸움과 동시에 모래성처럼 붕괴됐다. 미츠히데는 측근들과 함께 달아나다가 상금‧전리품 노리고 덤벼든 오치무샤가리(落武者狩り‧전투 끝나면 낙오무사 사냥하러 가는 농부들)에게 죽임 당했다.
국민의힘 탈당 후 신당 창당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준석 전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의 대구 출마를 시사했다. 그런데 10일 주목할 발언이 나왔다. 이 전 대표는 이날 유튜브 채널 ‘노컷’의 ‘지지율 대책회의’에 출연해 “대구는 (용산에서) 누군가가 꽂힐 것이다. 검사나 용산 행정관. 그 사람 중 의미 있는 심판대상이 있으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간 이 전 대표 자신과 대립해온 ‘용산’이 대구에 측근인사를 공천할 경우, 이 전 대표 자신이 해당 인사 낙선을 목표로 자객출마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이를 두고 묘하게 2012년 12월4일 18대 대선 관련 TV토론회에서 “(출마 이유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라고 공언(公言)했다가 역풍 맞고 중도하차한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떠오른다는 목소리 적지 않다.
총선은 누구의 분풀이를 위한 행위가 아니다. 지역구는 누군가의 분풀이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지역구는 사람이 사는 곳이며, 총선은 민생(民生)을 살리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중차대한 총선을 개인적 분풀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하는 건 많은 유권자가 전혀 공감 못할 행태다. 이 전 대표의 10일 발언이 총선에서 제2의 혼노지의 변 결과를 야기하지 말라는 법 없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꿀빠는 풍신수길은 누가될지 궁금합니다
만인에게 득 되는 방향의 올바른 결과 나오길 바랍니다.
이준석의 대구출마는 말씀대로 명분이 없습니다.
실행한다면 개인적인 화풀이라고 볼 수 밖에 없네요.
기본을 하는 게 제일 어렵다는 말 있더군요. 그래도 당대표까지 지내셨는데 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해본 말입니다, 이 전 대표와 잘 알진 못하지만 그래도 민생에 큰 영향 끼치는 거대정당 당대표까지 했던 사람에게 말입니다. 거대양당 모두 민생을 까먹은지 오래인 듯 합니다만 기본을 우선시하는 정당들이 되길 바랍니다.
공교롭게 오늘 제 노부나가 글이 나갔습니다만.. 인간은 입체적 동물이니 누구는 무조건 이렇다는 건, 이분법적인 건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소견에 생각합니다.
금일 제 글에선 통일의 문을 연 노부나가의 부정적 면모만을 다뤘다 생각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천하인 중 제일 군왕다웠던 자는 노부나가, 제일 간웅다웠던 자는 히데요시, 제일 평범했던 자는 이에야스였던 것 같습니다.
고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