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현대사회에서 필수적으로 고민해야 할 진정한 ‘자유’
출처: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35회의 ‘자유’를, 지난 유엔 연설서 무려 21번의 ‘자유’를 외쳤다. 또한 최근 불거지고 있는 ‘윤석열차’ 논란의 중심 키워드도 ‘자유’이다. 우리나라 정치의 근간 역시 ‘자유’민주주의이다. 추상적 개념이자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이 자유는 늘 논란의 중심이자 범세계적 아젠다Agenda이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자 정치의 궁극적 목표이다.
이 칼럼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일부 빌려 ‘자유’라는 추상적 개념을 다루도록 하겠다.
자유의 실존성, 밀은 과연 틀린 것인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면 이 명제는 실현될 수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서로의 자유의 가치를 동등하게 본다면 자유가 상충 되는 것이 이 현상의 원인이다. 또한 밀의 말처럼 해를 끼치는 자유는 용납될 수 없다. 해석이 다양화되는 시점에서 진정한 자유의 가치에 대해 범세계적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의 자유가 상충되기에 모두의 자유가 실존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공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대전제가 필히 존재하기에 일체감에 의한 공리주의 추구를 자연적 흐름이나 필연으로 보기 어렵다.(다만, 가식적 공익 추구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유의 충돌을 막아야만 한다. 때문에 모두의 사익을 절충하여 모아 공익이라는 것을 만든 것이다. 공익은 가식적 도덕에 의거한 사익들의 집합체이며 일체감을 느끼려 하는 것은 공익과 사익을 조절하는 과정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사회적 일체감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익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밀의 주장과 일정 부분 반대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바는 ‘밀은 완전히 틀렸다.’, ‘그의 사상은 거짓투성이다.’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을 인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화합하자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행하는 모든 도덕과 선은 가식일 수 밖에 없지만 나쁜 것은 아니다.(어감상 나빠 보이겠지만) 선을 추구하려 했다는 인간의 자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치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폭정
자유라는 개념을 탐구할 때 자주 접하게 되었던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했던 ‘자유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종종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매우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토크빌의 저서 <마국의 민주주의>에 따르면 민주정치의 가장 큰 결함은 다수자의 압제이다. 여론은 개인의 사상적 독립성을 파괴한다. 자유의 상징이었던 민주주의 속에 자유의 억압이 숨어있다는 뜻이다. 한국 정치에서 역시 선거 승리를 위한 극단적 포퓰리즘populism의 확대, 많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폭정이 민주주의 속 자유의 억압을 키우고 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유의 사전적 가치를 그대로 실현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 속에서, 자유란 권위(지배)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지배자가 아닌 대표자로 전환되었다. 즉, 저항하는 것이 아닌 일체가 되어야 한다.(자유권의 중요성만 부각 되었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국가적 차원의 사회권 보장의 중요성이 새로운 가치로 떠올랐다.) 그 말인즉슨 일정 부분, 자유의 제한이 허용되어야 하며 ‘공익과 사익을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공동의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 이를 법률에 적용해 보면, 법이라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자유를 조금 양보하여 만들어낸 절충안과 같은 것이다. 즉, 법은 자유를 필연적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아직 법으로 지배하는 관행이 없었던 일에 대해 갑자기 법이 개인을 지배하려고 하면 즉시 이에 반발하는 강한 감정이 생긴다. 자유론에서 하용한 유일한 자유의 제한은 다른 사람에 대한 위해의 방지이다. 그 말인즉슨 나의 자유를 실현하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밀의 논리에 따르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제한할 수 없다. 또한 타인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는 법에 의해서, 혹은 여론의 비난을 통해서 벌해도 좋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전혀 행동하지 않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예를 들어 해악을 방지하지 못한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법률적으로 적용한 것이 프랑스 형법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다. 따라서 사법 체계는 자유의 제한에 측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며, 과격한 제한이 아닌 타인에게 끼치는 해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 되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가?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밀의 자유론에서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한테만 자유가 보장되는데, 이것은 열강주의와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써의 흠이 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은가? 자유론의 자유가 현재의 자유와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이란 것은 없고, 해석만 있다.”
위 질문은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다. 우선 밀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을 배척했다고 해석한다면 밀의 인성적 배경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겠다. 밀은 그의 아버지처럼 맹목적인 사회진화론자는 아니었지만 인도인들이 스스로 다스리기에 필요한 수준의 개명에 도달하기까지 선의의 독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르면 분명 밀은 인도인과 같은 개발도상국(또는 식민지)의 시민 혹은 신민을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으로 규정한 것이다. 또한 밀은 인도주의적 가치 이전에 상호이익을 우선시했던 탓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밀이 유럽인은 성인이므로 자유를 허용하고 비유럽인들은 마치 미성년자로 간주해서 강제적 교육대상으로 취급했다는 해석은 그를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더 많다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저 질문 속에서 또 다른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해석의 바구니 속에서 진리를 찾아 꺼내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이 질문 속의 진리는 자유는 천부적이나 언제나 불가침을 침범하는 이들이 있기에 스스로 자유를 인식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자유권을 실현해줄 밑바탕을 만들어주는 건 국가지만 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이다. 정리하자면 밀은 자유의 추구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 ‘자유’ 등의 천부적인 가치, 인간이 배우지 않아도 지켜야 함을 인식하고 있는 가치는 매우 추상적이며 해석이 다양하다. 또한 그 가치들은 마치 불가침이며 성역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고 인식되는 특징이 있다. 이에 따라 가치들은 정치적 선동으로 악용된다. 자유라는 울타리 안에 욕망, 침해, 거악을 가득 담아놓고 무게가 무겁다며 비싸게 팔아넘기는 꼴이다.(양보단 질이 중요한데 말이다.) 주로 그 판매자는 정치인들(위정자)이며 소비자(사기당하는 사람)는 국민이다. 오늘날의 선동적 공약들도 사기행각에 일종이며 일부 정치인들이 ‘자유’라는 가치만 주목하고 그 실속은 생각하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어용적인 행위이다. 나는 피해자를 욕하는 것이 아닌 ‘영악한 괴벨스(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에 답은 없으나 우리는 답에 근접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모두가 고민하며, 다 함께 힘쓰는 그 날이 오길 간절하게 고대한다. 루돌프 폰 예링의 격언을 인용하며 칼럼을 마무리하겠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참고서적: 자유론 – 존 스튜어트 밀
참고문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와 제국주의 -실존과 시의의 관점에서 – 박동천(전북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