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동가식서가숙의 종자들, 이젠 퇴출돼야
설중매(雪中梅)는 눈 속에 핀 매화꽃이란 뜻이다. 다르게는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에 살았다는 유명한 기생의 이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중매는 미모와 재주가 뛰어났으며 의기(意氣) 또한 높았다고 한다.
국적(國賊)들이 판을 치던 일제(日帝)치하인 1925년, 한양서원(漢陽書院)이 조선(朝鮮)시대 인물들 일화를 모아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다음과 같은 야사(野史)가 나온다. 미성년자 및 페미니스트에게는 부적절할 수 있으므로 자제를 부탁드린다.
1388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고려(高麗)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선 어느 날. 이성계는 개국공신들을 불러 모아 큰 주연을 베풀었다. 잔치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려간 기생들 중엔 설중매도 있었다.
왁자지껄 창업을 자축하던 백관(百官)들은 어느덧 얼큰하게 취했다. 흥이 오른 한 중신은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설중매에게 추근대며, 오늘날엔 결코 해선 안 되는 성희롱이지만, 이렇게 말했다. “네 이름은 익히 들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동쪽 집에서 밥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잔다)하는 유명한 기생이라고 말이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만난 것도 인연이니 오늘은 나와 함께 서쪽 집에 가보지 않겠느냐?”
설중매는 파안대소(破顔大笑)하면서 이렇게 답했다. “아무렴요. 소녀(小女)와 동가식서가숙하기론 대감께서 딱 제격이시지요. 어제까지만 해도 고려를 섬기더니 오늘은 조선의 신하가 돼 질펀하게 술독에 빠져 계신 게 고명하신 대감나리이시니까요. 호호호” 이 말을 들은 여러 대신들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하나 둘씩 슬금슬금 달아나버렸다.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소인배들을 비꼬는 고사성어 ‘동가식서가숙’, 이 성어는 송(宋)나라의 학자 이방(李昉‧생몰연도 서기 925~996)이 지은 태평어람(太平御覽)이 출처다.
머나먼 옛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제(齊)나라에 한 아리따운 처녀가 살았다. 어느덧 혼기가 차자 두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동쪽 집 총각은 인물이 보잘 것 없고 성격마저 포악했으나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서쪽 집 총각은 가난하기 그지없었으나 인물은 슈퍼스타 뺨쳤다.
처녀가 좀처럼 마음을 못 정하자 부모는 “만약 동쪽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고 서쪽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손을 들렴” 말했다. 그러자 처녀는 대한독립 만세 외치듯 ‘두 팔’을 번쩍 쳐들었다. 나자빠진 부모가 이유를 묻자 철부지 처녀는 당당히 답했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제 이상형이니 밥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자려고요~”
현실세계에서의 유명한 동가식서가숙 위인 중 하나는 아무래도 초한쟁패(楚漢争覇) 시절의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기원전 204)다.
사기(史記)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한서(漢書) 위표전담한왕신열전(魏豹田儋韓王信列傳) 등에 의하면 위표는 진(秦)나라에 의해 멸망한 위나라 왕족 출신이다.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이 발발하고 옛 육국이 속속 부활하자 위나라도 재건됐다. 초대 임금은 위표의 형 위구(魏咎)였다. 진장(秦將) 장한(章邯)에게 패한 위구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위표는 항우(項羽)에게 의탁했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위표는 항우에 의해 서위왕에 임명됐다. 그런데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소하(蕭何) 등을 거느리고 항우를 치러 가자 한왕 쪽에 붙어 칼을 휘둘렀다. 헌데 한왕이 팽성대전(彭城大戰)에서 어이없이 대패하자 이번엔 다시 항우에게 쪼르르 달려가 꼬붕을 자처했다.
위표는 당대의 유명한 관상가 허부(許負)의 말만 믿고 자신이 태상황(太上皇)이 될 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부는 위표 부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당신의 부인 박희(薄姬)는 후일 용(龍)을 잉태할 것이다” 위표에게 장담했다. 허부의 예언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용’이 위표의 자식이 아닌 ‘한왕’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한왕‧항우 사이에서 신들린 동가식서가숙을 일삼던 위표는 어느 날 들이닥친 한신에 의해 간단히 생포됐다. 한나라의 포로가 된 박희는 베 짜는 종이 됐다가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한왕에 의해 후궁(後宮)으로 거둬졌다. 한왕은 딱 한 번 박희와 관계를 가졌다. 그 때 품은 아이가 바로 훗날 전한(前漢) 5대 황제로서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룩하게 되는 문제(文帝) 유항(劉恒)이었다.
박쥐놀이하다가 나라도 잃고 지위도 잃고 아내도 잃은 위표는 구차한 목숨을 구걸해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기원전 204년 한왕이 항우에게 패해 기신(紀信)의 도움으로 겨우 도주하자 재차 배신하고 항우에게 붙으려다가 한장(漢將) 주가(周苛)에 의해 못난 목숨이 거둬졌다.
바야흐로 2024년. 대한민국 정계에는 여전히 설중매 성희롱범, 양다리 처녀, 찌질이 위표 같은 동가식서가숙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은 도룡지기(屠龍之技) 같은 재주만 뽐내며 당(黨)과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있다. 지조 있고 능력 있는 이들이 당과 나라를 이끌어야 할 때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동가식서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