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파용운란(波涌雲亂)한 집권여당의 모습
신예 이야기.
이신(李信‧생몰연도 불명)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진(秦)나라의 청년장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는 첫 데뷔 이후부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는 듯했다.
기원전 227년에는 백전노장 왕전(王翦‧생몰연도 미상)을 따라 연(燕)나라 정벌에 나섰다. 앞서 연나라 태자 단(丹)은 형가(荊軻) 등을 보내 진시황(秦始皇‧시황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바 있었다. 왕전의 지휘를 받은 이신은 기원전 226년 연왕(燕王) 희(喜)를 요동(遼東)으로 몰아내고 태자 단을 사로잡는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파격적인 진급은 독이 됐다. 기원전 224년 진시황은 숙적 초(楚)나라 정복을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신을 전폭 신임하던 시황제는 그에게 “초나라를 차지하고 천하통일 위업을 완수하려면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가?” 물었다. 이신은 자신만만하게 “20만이면 됩니다” 호언장담했다. 진시황은 이신에게 20만 군대를 내줬다.
사실상의 원정군 대장이 된 이신은 장수 몽염(蒙恬)과 함께 파죽지세로 초나라로 진격했다. 이신은 평여(平與) 땅 등을 공격해 초군(楚軍)을 격파하는 등 승기를 잡아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귀신같은 속도로 추격해온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에게 수습 불가능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신은 불과 몇 달 만에 재기하려고 버둥대는 대신 심기일전(心機一轉)했던 듯하다. 그가 다시 모습 드러낸 건 대초(對楚)전쟁 패배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기원전 222년 이신은 장수 왕분(王賁)과 함께 실낱같은 명줄만 유지하던 연나라를 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하려던 연왕 희를 사로잡고 연나라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듬해에는 왕분과 함께 제(齊)나라를 덮쳐 제왕(齊王) 건(建)의 항복을 받아냈다.
백전노장 이야기.
이신의 스승이었던 왕전은 훗날 장한(章邯)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다.
오랜 기간 관직에 머물렀던 만큼 그의 영욕(榮辱)의 삶도 부침을 거듭했다. 기원전 236년 왕전은 장수 양단화(楊端和)‧환의(桓齮) 등과 함께 조(趙)나라를 쳐서 9개 성을 함락했다. 기원전 229년에도 양단화‧강외(羌瘣) 등과 함께 조나라로 재차 출병해 공을 세웠다. 오랜 기간 경험을 쌓으면서 때로는 좌천도 되고 때로는 승진했던 왕전은 기원전 228년 무렵 마침내 만군(萬軍)을 지휘하는 대장 자리에 올랐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기원전 224년 초나라 원정에서 이신이 “20만이면 충분”이라고 주장하자 왕전은 “60만은 있어야 가능합니다” 반박했다. 시황제는 “왕전 그대도 나이가 들더니 담이 작아졌소”라며 이신의 손을 들어줬다. 사실상 실각(失脚)하게 된 왕전은 과거 조나라 장수 염파(廉頗)처럼 행하는 대신 고향 빈양(頻陽)으로 낙향했다.
이신이 초나라에 의해 박살이 나 쫓겨 오자 진시황은 부리나케 왕전에게 달려갔다. 왕전은 재차 “60만이 아니면 아니 될 줄 압니다” 말해 입장을 관철시켰다. 시황제는 몸소 파상(灞上)까지 왕전을 배웅했다.
왕전은 대초 승리의 전략을 짜는 동시에 시황제 등 진인(秦人)들의 마음도 얻으려 했다. 그는 수시로 진시황에게 사람을 보내 “저기에 저런 전답(田畓)이 있으니 제게 주십시오” “저기에 저런 저택이 있으니 제게 주십시오” 요구했다. 시황제는 “그대가 이기면 뭔들 못 주겠소. 싸움이나 잘 하시오” 짜증을 냈다. 백관(百官)들도 “저런 탐욕스런 인간이 다 있나” 수근댔다.
보다 못한 왕전의 측근은 “장군께서 행동하심이 지나친 듯합니다” 지적했다. 왕전은 빙긋 웃으며 “지금 나는 나라의 핵심 정예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내가 딴 마음먹으면 진나라는 끝이고 황상(皇上)도 그걸 아신다. 나는 지금 진인들의 의심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답했다. 기(蘄) 땅에서 항연의 수급(首級)을 취하고 기원전 223년 초왕(楚王) 부추(負芻)까지 사로잡은 왕전은 진나라 천하통일 대업의 일등공신이 됐다.
파용운란(波涌雲亂)한 집권여당 모습 앞에 짧은 소견으로 써본 개담이다.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부연. 이번에 백전노장에게 각 세우며 커밍아웃한 몇몇 인사들은 상응하는 운명을 잘 감당하리라 생각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