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 시신 이용해 패자 되려다 참패한 양공
안타까운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해선 안돼
제환공(齊桓公)은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첫 패자(霸者)다. 사후 자신의 시신이 권력 투쟁에 이용된 불운한 사람이기도 하다.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을 기용해 제나라를 급속도로 성장시켰다. 기원전 651년 회맹(會盟)을 소집한 환공은 이견 없이 패자에 추대됐다.
그런데 환공 주변에는 몇몇 간신이 있었다. 역아(易牙)·수초(竪貂)·개방(開方)이 그들이었다. 역아는 “인육을 아직 못 먹어봤다”는 환공의 농담에 자신의 세 살배기 젖먹이 아들을 ‘요리’로 바친 비정한 인물이었다. 수초는 당초 환관이 아니었으나 환공을 보다 가까이서 모시겠다면서 스스로 거세한 자였다. 개방은 원래 위(衛)나라 공족이었으나 못 사는 고국 대신 잘 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며 제나라로 달아난 이력이 있었다.
이들은 관중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을 땐 기를 못 폈으나 그가 사망하자 기어이 환공에게 중용됐다. 셋은 환공이 중병이 들어 눕자 역심(逆心)을 드러냈다. 이들은 거동할 수 없는 환공을 밀실에 몰래 감금해버렸다. 끝내 굶어죽어 60여일이나 방치된 환공의 시신엔 구더기가 들끓었다. 간신들은 공자 무휴(無虧)를 새 국군(國君)으로 옹립하고 국정을 전횡했다.
이 사건을 두고 송양공(宋襄公)은 간지(奸智)를 퍼뜩 떠올렸다. 마침 송나라에는 환공의 또다른 아들 소(昭)가 머물고 있었다. 양공은 “불의한 무휴가 선군(先君)을 시해했다. 불쌍한 공자 소를 도와 타도하자” 외치며 몇몇 나라를 부추겨 제나라를 함께 공격했다. 양공의 속셈은 “제나라 국군을 소로 갈아치운 뒤 쥐락펴락하다가 내가 패자가 되겠다”였다. 양공은 간신들을 축출한 뒤 그저 옹립됐을 뿐인 최종 목표 무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서 소를 제효공(齊孝公)으로 세웠다.
양공은 패자가 거의 될 뻔했으나 세상은 바보가 아니었다. 여러 제후국은 인간 이하의 사악한 음모가 양공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후국들과 좌충우돌하던 양공은 기원전 638년 초(楚)나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부상이 악화돼 초라한 죽음을 맞았다.
안타까운 사고로 운명한 사자(死者)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듯한 이들이 또다시 고개 쳐들고 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비인간적 행태에 많은 국민은 진절머리 내고 있다. 세상은 바보가 아니다.
※ 2024.5.27 전국 일간 스카이데일리 지면 및 네이버뉴스에 송출될 예정인 필자 칼럼입니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