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의 담론
“겁쟁이배” 왜군 까무러치게 한 거북선
거북선(정식명칭 귀선‧龜船)은 누구나 알다시피 임진왜란(壬辰倭亂)‧정유재란(丁酉再亂)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돌격선이다. 이 거북선의 웅장한 포성(砲聲)이 있었기에 명량해전(鳴梁海戰) 등 승리가 존재할 수 있었고 혼비백산한 왜군(倭軍)을 이 땅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거북선은 안타깝게도 지금은 구체적 외형을 알 수 없고 역사 또한 미스터리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태종실록(太宗實錄)이다.
실록에는 “태종13년(1413년) 임금이 임진(臨津)나루를 지나던 중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교전하는 모습을 봤다”는 내용이 있다. 규장각(奎章閣) 소속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따른 거북선은 누구나 알다시피 장갑선에 여러 화포‧총안구가 달려 있고 등껍질에는 쇠침이 빼곡히 박혀 있는 형태다.
거북선은 전쟁 후 열도에 큰 충격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1904년 일본 요도(春陽堂)출판사가 출간한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日本帝国海上權力史講義)에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풍신수길)가 거북선을 본따 귀갑선(龜甲船)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저자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 해군 중좌(중령)는 자국의 옛 기록을 인용해 “거북선은 불화살‧대포도 겁날 게 없어 곧바로 적선 가까이에 붙어 불화살을 쏘거나 (충각전술로 적선) 복부를 파괴했다”고 썼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 의하면 거북선을 본 왜군은 처음엔 배꼽 잡고 뒹굴었을 가능성이 있다. 상술했듯 거북선은 장갑선이다. 때문에 ‘무사도(武士道)’의 사무라이들이 볼 때 외견상 거북선은 ‘싸움이 무서워 꼭꼭 숨어있는 겁쟁이들의 배’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쇠침이 박힌 상단을 거적때기로 덮었기에 거북선은 더더욱 초라해 보였을 수 있다. 게다가 사방이 막힌 장갑선이기에 총포 등 무엇을 어떻게 밖으로 투사할 수도 없어 보인다.
거북선과 마주친 왜군 수병(水兵)들은 습관대로 백병전 벌이기 위해 적선에 접근한 뒤 건너가려 했다. 그런데 거북선은 세키부네(關船) 등 일본 주력선보다 높이가 월등하고 선체가 절벽처럼 각이 져 있기에 쉽지 않았다.
왜군 입장에서 문제는 다음이었다. 어째어째 거북선 등에 뛰어든 왜병(倭兵)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쇠꼬챙이에 꿰여 꿈틀거리며 죽어갔다. 선체가 두터운 장갑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왜군의 창칼‧화살‧조총(鳥銃)은 이빨도 안 먹혔다.
그 사이에 거북선은 육중한 선체로 왜군 함선들을 깔아뭉개며 돌진했다. 결정적으로 사방에 깔린 포신(砲身)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내뿜어진 무지막지한 쇳덩어리들은 왜선(倭船)들을 일격에 격파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니던 거북선은 실은 한 번 포효하면 일당백(一當百)의 용맹을 발휘하는 결전병기였던 것이다.
거북선이 해당 전투에 실제 투입됐는지 여부는 이견이 있으나, 실전 사례를 보자. 1597년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이순신 장군은 불과 10여척의 전선(戰船)만 이끌고 왜군을 맞으러 나갔다. 왜군 함대는 100여척에 달했다. 그런데 왜군과 실제 교전한 조선수군(朝鮮水軍)은 거북선 단 ‘1척’이었다.
이 한 척의 거북선이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적선 수십 척을 막아낸 것이었다. 나머지 군선들은 이순신 장군의 호통에야 겨우 달려와 싸움에 참여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장군이 “안위(安衛)야, 네가 군법(軍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크게 꾸짖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집권여당 맏형님인 인사가 잇달아 전직 당(黨) 지도부 인사를 꾸짖고 ‘거취’까지 언급하는 일이 최근 있었다. 그런데 당내 반발의 목소리는 극소수에 그쳤다. 지도부‧중진 대다수는 해당 인사의 눈치를 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간 해당 인사를 우습게봤던 일부는 맏형님뻘 인사의 이같은 당 내 영향력에 아마도 크게 놀랐으리라 생각한다. 그 일부는 앞으로는 자중하고 당 재건을 위한 맏형님의 사석위호(射石爲虎)의 여정에 적극 협조하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