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들을 담은 담론
고개 들면 망하는 게 정치… ‘감선’ 각오로 해야
‘조선(朝鮮) 왕조 오백년’ 조선은 1392년 건국돼 장장 1910년까지 존속한 나라다. 대략 250~300년 유지된 중국 명청(明淸)이나 일본 도쿠가와(德川)막부에 비하면 대단히 긴 존속기간이다. 조선의 장수 저력은 철저한 민본(民本)사상이었고 이 중심에는 감선(減膳)이 있었다.
감선은 나라에 흉년이나 천재지변이 들었을 때 임금이 식사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굶는 것을 뜻한다.
2014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 한복려 선생의 ‘음식에서 백성의 삶을 바라본 왕의 밥상’에 따르면 기간은 보통 3~5일이었다. 이 기간에 임금들은 육선(肉饍)을 금하고 소선(素膳)을 통해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했다. 태종(太宗)‧세종(世宗)‧성종(成宗)‧순조(純祖) 대에는 아예 수반(水飯) 즉 ‘물말이 밥’만 먹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한 논문에 의하면 감선의 사상적 배경은 전한(前漢)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제시한 천인감응론(天仁感應論)이다. 동중서는 “재해가 발생했을 때 이를 그릇된 정치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군주는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왕조는 이 천인감응론에 시경(詩經)의 “가뭄이 들면 군주의 식사를 줄인다” 등을 접목해 감선을 만들었다. 감선은 태종(생몰연도 1367~1422) 때부터 시작돼 순종(純宗‧1874~1926) 때까지 341회나 행해졌다.
감선을 중단시킨 건 연산군(燕山君) 정도뿐이었다고 한다. ‘음식에서 백성의 삶을 바라본 왕의 밥상’에 따르면 가장 많은 감선 기록 보유자는 89회의 영조(英祖‧1694~1776)였다. 그는 눈이 침침해 육찬(肉饌)인 줄 모르고 먹었다가 토하거나 아예 굶기까지 했다.
정조(正祖‧1752~1800)는 비단 감선 기간이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매우 검소했다. 그는 행차(行次)가 쉬는 곳에서 찬품을 높게 차리지 말 것을 명하고 자신이 직접 수라간에 들어가 조사하겠으니 지나치면 벌하겠다고 경고했다. 평시의 수라상에 오르는 그릇도 7그릇이 넘지 못하도록 했다.
감선이 형식화된 조선 후반기 이전까지 많은 임금들은 진심으로 감선을 행함으로써 백성에게 사죄했다. 이를 통해 군민일체(君民一體)임을 강조했고 이는 백성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애국심의 원동력이 됐다. 임금‧조정을 손가락질 하던 백성들 상당수도 “임금이 저렇게 밥도 굶다시피 하면서 사과하는데 그래, 한 번만 더 믿어보자” 마음을 바꿨다.
국민의힘이 위기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28일 방송연설에서 “저희의 부족함을 잘 안다. 실망 드린 일도 적지 않다.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고개 숙여 국민께 호소드린다. 딱 한 번만 더 저희를 믿어 달라”고 했지만 여론 반전에서는 역부족인 분위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대표 시절 ‘현대판 감선’ 격인 천막당사 카드를 꺼내 ‘차떼기’ 논란 등으로 다 무너져가던 당(黨)을 재건한 바 있다. 한 위원장도 조선시대 임금들의 절식(節食) 또는 단식(斷食)에 준하는 각오로, 진심어린 행동으로,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간절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사과로 여론을 뒤집기에는 지금 악재(惡材)가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니다. 필자가 무슨 한 위원장 팬이라서 이렇게 조언하는 게 아니다. 양당정치 종식과 ‘셰셰 독재’ 가능성을 우려하는 마음을 금치 못해 펜을 놀리는 것이다. 목에 깁스하고 빳빳이 쳐들면 망하는 게 정치다. 한없이 낮고 또 낮아야 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