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한세충‧사묘아리로 힘의 균형 이뤘던 三國
1人 빼고 중량급 실종된 與 잠룡들에 우려 고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전세 역전한 세 명의 영웅
자웅(雌雄)을 겨루는 동시대 무사(武士)들의 이야기는 고래(古來)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그런데 픽션이 아닌 실제로 한중(韓中)‧여진(女眞) 삼국의 진만인적(眞萬人敵)들이 같은 시기에 활약을 펼친 역사가 있다. 고려의 척준경(拓俊京‧생몰연도 서기 1070~1144), 송(宋)의 한세충(韓世忠‧1089~1151), 금(金)의 사묘아리(斜卯阿里‧미상)가 바로 주인공이다.
창작물과 달리 현실에서는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뛰어들어 무쌍(無雙)을 펼치는 게 대단히 어렵다. 도리어 자신이 다져진 육포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 성공사례는 안량(顔良)의 수급(首級)을 취했던 관우(關羽),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1세(Richard Ⅰ) 등 극소수다. 그런데 관우‧리처드처럼 널리 알려지진 못했지만 이들 세 명도 마치 영화처럼 일신(一身)의 무용(武勇)만으로 전세(戰勢)를 일거에 뒤집곤 했다. 이는 허구가 아닌 사서(史書)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아버님을 부탁한다. 나는 강산(江山)에 몸을 바친다”
척준경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가난한 하급 향리(鄕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독서 대신 무예연마를 좋아했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서 떠돌이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왕족으로서 훗날 숙종(肅宗)이 되는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의 부곡(部曲‧사병)이 됐다.
조선은 중앙집권제였기에 왕족이라 해도 어명(御命) 없이는 군권(軍權)을 행사할 수 없었다. 반면 고려는 봉건제(封建制) 성격이 강했기에 권력자들 상당수는 사병집단을 거느릴 수 있었다. 숙종이 1095년 즉위하자 척준경은 추밀원(중추원·中樞院) 말단관리로 들어가 ‘문관’으로 활동했다. 이를 감안할 때 무인(武人)이라 해도 최소한 글은 읽고 쓸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척준경이 붓 대신 창칼의 날을 드러낸 건 숙종 9년(1104년) 2월 여진족과의 전투 때였다. 여진족 일부 부락은 이웃부락과의 싸움 끝에 고려에 귀부(歸附)했다. 그러자 여진 완안부(完顔部) 추장이자 금태조(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형인 오아속(烏雅束)은 함경북도 정평군(定平郡) 정주성(定州城)까지 쫓아와 진을 쳤다. 숙종은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 임간(林幹)에게 군사를 딸려 이를 토벌토록 했다.
임간은 상대가 여진부락들을 규합해 머잖아 대륙을 침공하게 되는 완안부라는 걸 간과했다. ‘미개한 우량카이(兀良哈‧오랑캐)’를 얕본 임간은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대패(大敗)하고 말았다.
여진족은 반농반목(半農半牧) 민족으로서 농경사회 생산력‧행정력, 유목사회 전투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滿洲)에서는 질 좋은 철광석이 생산됐다. 후일 금나라는 마치 유럽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중갑기병을 운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눈만 겨우 내놓는 수준의 투구에 전신철갑을 입고서 말에게도 두세겹 마갑(馬甲)을 입힌 뒤 3인1조로 돌격했다.
작전실패 여파로 죽은 고려군 시체는 산(山)처럼 쌓이고 피는 하천을 이뤘다. 그간 고개 조아리면서 엎어져 기던 미개인들의 숨겨진 역량 앞에 고려조정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고려군이 몰살위기를 맞던 그 때 나선 게 척준경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척준경은 임간에게 병장기‧군마(軍馬)를 달라 요구할 정도로 무명소졸(無名小卒)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이병계급 ‘알보병’이 집단군(集團軍) 또는 야전군(野戰軍)사령관을 독대해 탱크‧장갑차를 달라고 조른 셈이었다. 척준경이 문관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조선 때는 말단병사가 임금에게까지도 간언할 수 있었지만 고려는 달랐다. 따라서 평소 같았으면 이 ‘건방진 졸병’의 목을 날리고 말았겠지만 때가 때라서 그런지 임간은 청을 들어줬다.
활 차고 창 비껴든 채 말에 올라 달려 나간 척준경은 진만인적을 발휘했다. 그는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포로 두 명을 구출하는가 하면 두 명의 교위(校尉)와 함께 활을 쏴 세 명의 여진족을 낙마(落馬)시켰다. 막부(幕府‧지휘본부)는 통상 진세(陣勢) 중앙 또는 후방에 위치한다. 척준경이 적장을 척살했다는 건 곧 창칼의 숲이 기다리는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용 앞에 대군(大軍)이 나타났다고 착각한 여진군은 놀라 달아났다. 다수가 밀집한 상태에서 뒷사람은 앞·옆사람 너머가 보이지 않기에 지휘관이 사라지면 얼마나 많은 적군이 나타났는지 알 수 없다. 척준경은 이 공로로 조정으로부터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 벼슬을 하사받았다. 천우위는 임금을 호위하는 근왕군(勤王軍)을 뜻한다.
공을 세운 척준경은 모종(某種)의 이유로 투옥됐지만 윤관(尹瓘)의 변호로 석방됐다. 은인(恩人)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은 1107년 여진정벌이 단행되자 원수(元帥) 윤관을 따라 북벌에 나섰다. 이 때도 척준경은 범의 발톱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실례로 석성(石城)전투에서는 “죄를 지어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고 말한 뒤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돌진했다. 여진군이 농성(籠城) 중인 성벽을 타고 오른 척준경은 다수의 여진족 추장을 베어 끝내 함락시켰다.
윤관이 소수병력으로 여진족에 포위되자 동생 척준신(拓俊臣)에게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라고 당부한 뒤 결사대(決死隊)와 함께 적군 수십명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척준경이 버티는 사이 지원군이 도착함에 따라 윤관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윤관은 척준경에게 “나는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도 나를 아버지 대하듯 하라”고 말하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척준경은 이후에도 수많은 전설을 남겨 오늘날까지 무신(武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범 같은 아내와 함께 대도(大盜)를 엄벌하다
한세충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용장(勇將)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부터 풍류를 즐기는 등 호걸(豪傑)의 면모가 있었으며 완력이 강했다. 18세 무렵 종군(從軍)한 한세충은 이미 그 때부터 영내(營內)에서 그의 무용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서하(西夏)와의 전투 때는 적군이 철통방어에 임하자 성문을 부수고 돌입한 뒤 적장을 찾아내 목을 치고 그 수급을 성 밖으로 내던졌다. 서하왕의 부마(駙馬)도, 소설 수호지(水滸誌‧수호전)의 실존인물 방랍(方臘)도 한세충의 대도(大刀) 앞에 눈감았다. 거란(契丹)족이 세운 요(遼)나라와의 대결 때는 불과 50명만 이끌고 수천명의 적군을 물리쳤다.
금나라도 한세충의 용맹 앞에 번번이 무릎 꿇었다. 1129년 완안아골타의 아들 완안종필(完顔宗弼)이 대군을 이끌고 남송(南宋)을 침공해 수도 임안(臨安)을 초토화한 뒤 이듬해 의기양양하게 귀국했다. 금나라는 아직 인구‧경제 등 모든 면에서 남송에 비해 열세였으며, 따라서 남송을 점령‧지배하는 건 개구리 입에 코끼리를 쑤셔 넣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수도 구원 타이밍은 늦었다고 여긴 한세충은 아내 양홍옥(梁紅玉)과 함께 수천 병력만 이끌고 금군(金軍) 귀로(歸路)에 매복했다. 양홍옥도 남편 못지않은 명장(名將)이었다. 부부는 금군 선단(船團)을 격침시키는 등 첫 전투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종필의 제안에 따라 정해진 기일에 금군과 벌인 회전(會戰)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양홍옥은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성벽 위 망루(望樓)에서 궁수(弓手)들을 지휘해 응사했다. 수차례의 접전 끝에 궁지에 몰린 종필은 화친을 제시했지만 한세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금(大金)의 황족 종필은 겨우 목숨만 건져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훗날 송사(宋史)는 한세충을 ‘진만인적’으로 평가했다.
100여 기병을 이끈 미스터리의 전사(戰士)
앞서 척준경‧한세충의 전과(戰果)만 보면 여진군은 오합지졸 같지만 상술한대로 여진족은 대륙 북부를 정복해 금나라를 세운 ‘전투민족’이었다. 수백년 뒤에는 아예 대륙 전체를 잡아먹고 청(淸)나라를 세우기도 한다. 척준경‧한세충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여진족의 영웅은 불패(不敗)의 용사 사묘아리였다.
사묘아리는 그의 이름을 음차(音借)한 것으로 실명은 알 수 없다. 그가 고려군에 맞섰다는 등의 이유 때문인지, 국내 사학계는 금사(金史) 기록을 부인하기 때문인지 알 순 없지만, 사묘아리의 정확한 행적은 국내에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느 정도냐면 필자가 칼럼작성에서 인용 및 교차검증하는 학술자료‧언론보도 등도 찾기 힘들어 사묘아리가 과연 실존인물인지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필자 주변 사학자들로부터도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다만 교육부 산하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 중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에선 사묘아리의 이름이 확인된다.
사서 기록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묘아리는 척준경과 직접 대면했을 ‘가능성’이 적잖아 있는 인물이다. 금사 등에 의하면 17만 대군을 이끄는 윤관의 여진정벌이 시작되자 사묘아리는 부친과 함께 참전(參戰)했다. 이 때 선봉(先鋒)에 나선 사묘아리는 고려군 장수를 장창으로 사살했다. 이후에는 두 개 성지(城池)를 점령했으며 고려군 대군을 막아냈다.
1109년에 진행됐다는 한 전투에서는 퇴각하는 고려군을 추격했다. 도강(渡江) 중이던 고려군 후미(後尾)와 맞닥뜨린 사묘아리는 이를 격퇴하고 수만의 고려군 본대(本隊)까지 이르자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고 한다. 금사 사묘아리 열전(列傳)에는 여진대장 석적환(石適歡)이 “네가 하루만에 중적(重敵)을 세 차례 물리쳤으니 공을 어찌 잊겠는가”라며 후사(厚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금사 등에 따르면 사묘아리는 거란‧송나라와의 대결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에는 아골타의 명으로 출진해 여러 성지에 깃발 꽂고 공격해온 수만 요군(遼軍)을 100여 기병만으로 패퇴시켰다. 송나라 침공 과정에선 수호지 무대가 되기도 한 양산박(梁山泊) 등지에서 송군(宋軍)을 격파했다.
40대 기수론은 불가능…중량급엔 중량급으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는 24일 귀국한다는 소식이다. 야권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 전 대표는 지난 4일 자신의 SNS에서 “국가를 위한 저의 책임을 깊이 생각하겠다.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민의 생활을 위해, 제가 할 바를 하겠다”고 말했다.
야권의 잠룡(潛龍) 인재풀은 여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이 전 대표 외에 이재명 대표, 조국 전 법무장관 등이 벌써부터 물밑 자웅을 겨루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중량급(重量級) 인사다. 조 전 장관은 10일 SNS에서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禮訪)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길 없는 길’을 가겠다”며 친문(親文) 측 표심을 자극하는 듯한 발언도 했다.
반면 여권은 안개 속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 대권주자 적합도 1위를 달리는 인사(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는 체급 면에서 비교적 달린다는 평가 앞에 ‘거품’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나머지 인사들도 한 사람만 빼고 지지율이 저조하거나 경량급(輕量級)이라는 우려를 사고 있다. 대선 본선(本選) 진출 시 승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례(46세 당선)를 제외하고선 현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60대가 돼서야 청와대에 입성했다.
1000년 전 한중‧여진 삼국은 척준경‧한세충‧사묘아리라는 세 영웅의 힘의 균형 아래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한 여당중진은 11일 “비리‧부패가 하루걸러 하나씩 나오는 민주당과 엇비슷한 수준 지지율로 엎치락뒤치락한다는 게 부끄럽다” “‘우리 윤석열 대통령 잘한다’면서 물개박수만 친다고 역할을 다 하는 게 아니다”며 국민의힘에 쓴소리를 내놨다. 지금의 정세(政勢)는 1000년 전처럼 혼돈이다. 여당‧대통령실도 이제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대판 척준경’이라는 중량급 인사, 진만인적에게 힘을 실어줄 때다.
한국에는 존야 소드마스터 홍준표가 있습니다. 그의 검술실력은 검사 시절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오늘날 진짜 만인적이 누구인진 머잖아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