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악(次惡)동침’에 도리어 현군 된 루즈벨트‧세종
한 지자체장‧거대노총 만남, 나쁘게만 볼 일 아냐
‘날건X’과 성군(聖君)의 만남
여기 ‘천하의 날건X’들이 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엄연히 사서(史書)에, 그것도 사관(史官)들이 철저한 팩트체크를 거쳐 공정히 기록한 조선시대 사서에 부정적으로 평가된 인물들이라 도저히 긍정평가가 어렵다.
그런데 이들은 그들 자신의 부도덕한 행각을 넘어, 다른 사람도 아닌 성군(聖君)의 표본과도 같은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祹)에 의해 중용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더 큰 충격을 던진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날건X’들을 이토록 예뻐하고 사랑했을까. 물론 세종이 ‘건X 오야봉’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답은 현명한 정치로 유일무이 4선 고지에 오른 신사(紳士)의 대명사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전 미국 대통령이 했다는, 야사(野史) 수준이긴 하지만,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보게나. (니카라과의 악당) 소모사가 개XX일 수 있지. 그러나 그 개XX는 우리의 개XX야(Somoza may be a son of a bitOO, but he's our son of a bitOO)”
“복장 터지는 복장(福將)”
이순몽(李順蒙‧생몰연도 1386~1449)은 조선 전기의 무신(武臣)이다. 일본 대마도(對馬島) 정벌, 여진족(女眞族) 토벌 등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태종실록(太宗實錄)‧세종실록(世宗實錄) 등 다수 문헌에 의하면 그는 실로 조선시대 최고의 문제아였다. 혹 영천 이씨 문중(門中)에선 본 칼럼에 불쾌하신 분이 계실 수도 있다. 반론을 주신다면 겸허한 마음으로 적극 수렴토록 하겠다.
이순몽은 당초 음서(蔭敍)에 의해 임관했다. 2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李芳遠)을 지지한 그의 부친은 태종 즉위 후 병조판서(兵曹判書‧지금의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원칙적으로 능력본위(能力本位) 사회였던 조선조정에서 음직(蔭職)은 멸시받기 일쑤였다. 조선왕조는 과거제도를 통해 양인(良人) 모두에게 입관(入官) 문호를 열었으며, 승진하기 위해선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선) 백성의 모범이 돼야 하고 산전수전 전부 겪어야만 했다. 이렇게 수십년 고행을 거쳐 고위직에 발탁된 인물들은 하술할 황희(黃喜)처럼 지쳐 쓰러질 때까지 민생을 위해 ‘노동력 착취’를 당해야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순몽은 자연히 손가락질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태종은 그런 이순몽을 어버이처럼 아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달랐다. 속내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태종의 붕어(崩御)로 온 나라가 국상(國喪)일 때 이순몽은 ‘기생’과 함께 뱃놀이에 나서고 심지어 음주가무까지 즐겼다. 이는 당시 시대상 멸족(滅族)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역죄였다. 그러나 세종이 내린 처벌은 파격적이게도 ‘파직’에 그쳤다. 그것도 얼마 안 가 복직됐으며 나아가 ‘승진’했다.
‘영혼’은 동료의 첩과 사통(私通)하기도 했다. 동료는 이 사실을 알아채자 노비들과 함께 쳐들어가 이순몽‧첩의 밀회현장을 덮치고 이들에게 ‘정의구현’을 실천했다. 지금의 대검찰청‧경찰청 격인 의금부(義禁府)는 강상(綱常)의 도리를 어긴 이순몽에게 곤장 100대, 폭행‧간통죄 등의 동료‧첩에게 각 곤장 80‧90대의 처벌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세종은 동료와 첩만 초주검이 되도록 팬 뒤 이순몽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만 내렸다.
‘영혼’은 말년에도 여전히 새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금주령(禁酒令)을 어겨 일시 파직됐다가 복직했다. 전근대 시대에는 백성을 먹일 귀한 곡식을 아끼기 위해 음주 엄금조치가 종종 내려지곤 했다. 그런데 이순몽은 고향의 어머니 묘소에서 성묘하고 돌아오다가 상주(尙州)에 이르자 기생과 함께 냇물에 들어가 혼탕(混湯)을 즐겼다. 그리고는 “나 지금 유녀(遊女)와 행음(行淫)한다”고 외친 뒤 누구나 상상하는 그 짓을 했다고 한다.
상처(喪妻)하자마자 조강지처를 깨끗이 잊고선 다른 여인을 노리기도 했다. 이순몽은 자색(姿色)이 뛰어난 한 과부의 소문을 듣자 강제로 취하려 했다. 여인이 완강히 거부하자 “계속 그러면 마찬가지로 과부인 네 어미에게 장가들겠다”며 협박했다. 백기 든 여인이 끝내 이순몽을 따라나서자 그녀의 어린 두 아들은 어머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가슴 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세종은 “어찌하여 백발이 되도록 광패(狂悖)가 그치지 않는가”라고 꾸짖었다. 문무백관들은 이순몽 살아생전에 그에 대한 강력처벌을 줄기차게 간언했다. 그러나 이순몽 공소장은 매번 소각됐다. 이순몽은 천수(天數)를 누리다가 편안히 눈 감았다.
막장 사생활과는 별개로 이순몽은 대마도‧여진정벌 등에선 큰 공을 세웠다. 행실에 문제가 있을지언정 어찌 보면 그가 직접 해를 끼친 인물들보다 훨씬 더 많은 백성의 목숨을 왜구(倭寇)‧이민족으로부터 구한 셈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이순몽을 아꼈는지도 모르겠다. 이순몽을 증오하지만 그렇다고 기사(記事)를 왜곡할 순 없었던 사관들은 “무예가 뛰어나지 않은데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므로 사람들은 이순몽을 ‘복장(福將‧재수 좋게 이기는 장수)’이라 일컬었다”고 기록했다.
비록 이순몽은 편히 갔지만 그의 나쁜 점만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 이석장(李石杖)은 ‘아버지의 첩’과 측간에서 놀아나다가 곤장세례 아래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늦은 대로 이순몽의 업보(業報)는 그 아들 대에서 갚아진 셈이다.
완전범죄 꿈꾸다 세종의 노예가 되다
황희(1363~1452)는 유능‧청렴한 재상의 대명사격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십수년 동안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면서 민정(民政)‧군정(軍政) 등에서 굵직한 큰 업적들을 남겼다. ‘황희정승’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때문에 세종은 황희가 눈 감기 직전까지 그를 ‘부려’먹었다. 황희가 사표를 제출한 것만 수차례이지만 그 때마다 반려됐다. 사직서는 황희 사망 목전에야 수리(受理)됐다.
그런 황희에게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의정부사황희졸기(領議政府事黃喜卒記) 등에 의하면 황희는 ‘서달(徐達)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어두운 역사가 있다.
상당수 조선시대 사관들은 역사기록에 목숨 걸었으며 뇌물‧청탁 등이 통하지 않았다. 때문에 아무리 청백리(淸白吏)라 해도 해당 인물의 과오 또한 숨김없이 폭로했다. 실례로 사관 민인생(閔麟生)은 사냥 도중 낙마(落馬)한 태종이 “적지 마라”고 명령하자 “주상(主上)께서 낙마사실을 적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원칙적으로는 임금마저도 실록 내용은 살아생전에는 들여다볼 수 없었으며 사관들을 존중해야 했다.
서달은 황희의 사위였다. 어느날 시골을 지나던 서달은 한 아전(衙前)이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는다고 시비 걸며 노비들을 시켜 잡아오게 했다. 그 과정에 말려들어 엄하게 폭행당한 다른 아전 표운평(表芸平)이 황당해하자 서달은 “저 놈이 낮술을 했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며 집단구타하게 했다. 결국 표운평은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살인사건을 수사한 지방 사또는 서달이 용의자라는 걸 밝혀냈지만 그 집안배경이 두려웠다. 서달의 부친은 오늘날 법무장관‧대법원장 격인 형조판서(刑曹判書) 서선(徐選)이었으며 장인은 황희였다. 사또는 결국 의금부 등이 아닌 황희에게 먼저 사건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황희는 앞장서서 사위를 처벌하는 대신 ‘사건은폐’에 착수했다.
완전범죄가 완성되는 듯했지만 당시 임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세종이었다. 공소장을 읽고서 수상함을 느낀 세종은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했으며 결국 진상은 드러났다. 살인죄는 불문곡직하고 사형이었지만 서달은 자신이 독자(獨子)인 점을 강조했다. 이를 받아들인 세종은 대신 ‘곤장 100대, 3000리 유배형’ 등을 내렸다.
이는 만신창이가 돼 병졸에게 끌려가다가 객사(客死)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산다 해도 폐인(廢人) 신세는 면할 수 없었다. 곤장의 위력은 오늘날 싱가포르의 태형(笞刑)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체 중 비교적 살집이 있는 둔부(臀部)에 단 몇 대만 맞아도 병원신세를 져야 하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피할 수 없다.
다만 서달 등과 달리 황희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잠시 파직됐던 황희는 이순몽처럼 얼마 가지 않아 복직했다. 그리고는 상술한 대로 평생토록 세종의 ‘노예’가 돼 조선백성들을 번창시켰다.
민생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苦肉策)
한 지자체장과 한 거대노조 전국시도(市道)의장단의 만남이 최근 있었다. 이를 두고 여권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게 사실이다. 그간 적잖은 거대 노조집단 폐단(弊端)이 있었기에 ‘노조’라는 단어 그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지자체장과는 무관하게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지만, 정치인에게는 루즈벨트처럼 세종처럼 때로는 ‘적과의 동침’에 나서는 파격(破格)도 필요한 법이다. 세상에 더 큰 악(惡)이 존재하는 한, 더 큰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차선(次善)의 악과 일시적이나마 손잡을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해당 지자체장이 만난 노조는 근래 간첩단 논란의 타 노조와는 달리 비교적 순수하게 노동쟁의(勞動爭議) 해결에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때문인지 해당 노조는 간첩단 노조를 제치고 국내 제1노조에 등극한 표밭이기도 하다.
루즈벨트‧세종이 마냥 착하기만 했다면 현군(賢君)의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권에 존재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악의 무리에 의해 무기력하게 축출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저 개XX는 우리 개XX”는 비록 루머라 해도 치자(治者)의 숙명을 짧게 압축한 말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광견병으로 미쳐 날뛰는 현세 최악의 개XX들을 잡고 동시에 수권(授權)을 이뤄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동종업계의 다른 거대한 개XX도 필요한 법이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선 때로는 돌아서 가야 할 때도 있다.
정치인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일에서 적용됩니다.
어떤 일을 할때 그 일을 해내려고 고민과 방법과 노력을 총동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의 시선을 신경쓰며 옆사람에 묻어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사람은 다른사람이 준비해놓은 메뉴얼만 여러장 비교해 보다가 끝납니다. 그런 태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장서서 나서는 사람을 비꼬고 앉아있으며 그 가치를 저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낭비인지 모르겠습니다. 롤 하십니까! 홍카는 이니시에이터입니다.
이니시에이터 새로운 용어 하나 또 배웁니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헌법과 국익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정치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법을 무시하고 국익만을 바라보다가는 국민의 지지는 받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에.
좋은 세상이 도래하길 기대해봅니다.
본 칼럼에서 사용된 일부 비판적 용어는 특정인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점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민주당 듣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