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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황제가 11번 바뀌었어도 국가 통치를 한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서포터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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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馮道) 882 - 954 자는 가도(可道),



중국 황하문명이 발생하고나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오대십국시대,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반세기에 걸친 대 혼란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나라가 사라지고 황제가 바뀌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이 바로 풍도(馮道)다.



[생애초기]


이런 비범한 인물이 의외로 서민가문에서 나왔다는 것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작문에 능해 명망이 높았고, 첫 공직생활을 지방에서 부터 시작했다.

유주절도사 유수광 휘하에서 그의 상사가 이웃 고을을 침공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극구 말리다가

죽음에 가까운 옥살이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발휘해온 처세술을 이때 체득했을지도 모른다.

난세에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때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고 정의감만으론 세상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후 풍도는 후당 초대 황제 이존욱이 유수광을 멸하자 이존욱의 휘하 환관이자 감군인 장승업을 따라가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이존욱이 죽고 다음 황제 이사원 때에 그가 한림학사를 거쳐 마침내 재상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료에 다 적지 못했던 그의 정치수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었다.

황제가 11번 바뀌어도 영원불변했던 재상, 풍도 전설의 시작이었다.



[풍도가 모셨던 그의 황제들, 암군과 혼군시대에 명군은 언제 오는가]


이존욱은 말 위에선 천하무적의 장수였으나 황제가 되고난 뒤론 스스로를 연극배우 이천하(李天下)로 살았다.

사치와 향락에 젖어 군인들의 월급을 주지 못해 피살당할 정도로 내치에 관심이 없는 군주였다.


후임 황제 이사원은 이존욱의 아버지 이극용의 양자였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았지만 내정을 게을리 처리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검약하고 나라를 7년간 잘 다스렸으나 결국 그 또한 병을 얻었고, 말년에 둘째 아들의 반란을 보고 홧병으로 죽었다.


다음 황제 이사원의 5남 이종후는 제위한 지 1년만에 이사원의 양자 이종가에 의해 찬탈당했고, 

이종가 또한 3년 만에 이사원의 사위 석경당의 쿠데타로 인해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진시황으로부터 이어져왔던 전국옥새가 소실되기도 했다.


석경당은 적국 거란(요)에 신하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10살 어린 적국 황제에게 아들이 되고 싶다고 상주문을 보내는 등

한 국가의 군주로서 상식이하의 행동을 많이하였다. 특히 군사적 요충지를 적국에 무상으로 줘버리는 짓까지 서슴없이 했다. 

불충을 넘어서서, 국토도 적국에 넘기고, 민족의 영혼까지 버리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그래도 자식사랑은 남아있어선지 아직 어린 아들 석중예에게 풍도를 보고 절을 시키고 품에 안기는 등 눈물겨운 연극을 했으나

석중예에게 황위가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삼촌 석중귀에게 권좌가 주어졌다.



석중귀는 석경당의 형제 석경유의 아들로 조카의 계승권을 찬탈해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반 거란정책을 시행하며 손자라 칭할뿐 조공을 보내지 않는 등, 강경노선을 유지했다.

이후 분노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한 일화가 전해진다. 요 태종 야율덕광이 풍도를 불러놓고 한 마디를 내뱉는다.

"천하의 백성을 어찌 구하려는가?"(天下百姓,如何可救)

이에 풍도가 말했다.

"지금 백성은 부처님이 와도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 구할 수 있습니다."(此時百姓,佛再出救不得,惟皇帝救得)

단순한 말 몇 마디도 평범한 아부도 아니었다. 현실적인 답이었다. 

그야말로 그가 평생 쌓아온 처세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야율덕광은 마침내 학살을 멈추라 지시했다.


후한(後漢)을 건국한 유지원이 거란족의 침략에 항전하면서 부터 야율덕광은 북쪽으로 철군했다. 풍도 또한 이 행렬을 따라갔다. 

그런데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야율덕광이 병으로 사망하자 한족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풍도는 한족들의 반란에 동참하였고

유지원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유지원은 제위 10개월만에 병사하고 그 아들 유승우가 그 뒤를 이었다.


유승우는 즉위할 때 나이가 어려 권신들의 권력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라에 수해와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잇따라 지방 군벌들의 반란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또 아버지의 부하 곽위를 믿지 못해 의심하고 죽이려 했다.

곽위의 가족은 유승우의 사주를 받아 모두 죽었으나 곽위는 살아남아 유승우를 결국 죽이고야 만다.


곽위는 후한을 멸하고 후주를 건국했으나 자손이 없어 처조카인 시영을 양자로 들였다.

시영은 즉위하자마자 후한의 잔존세력인 북한의 유숭, 그들과 결탁한 거란군 4만명의 침공을 막아내야만 했다.

시영은 나라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직접 나가 싸우려 했다. 그때 풍도가 이에 반대하며 말했다.

"당 태종도 몸소 천하를 평정했는데 나라고 내 몸 하나를 아끼랴?"

"폐하께서 스스로 당 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숭 따위를 멸하는 것 쯤은 큰 산이 달걀을 뭉개듯 간단하다."


"폐하께서 스스로 큰 산과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충언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목이 여러개 떨어질 만한 말들이었다.

결국 시영은 풍도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허나 시영은 풍도를 벌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을까?

시영이 대승을 거두고 몇달 후에 풍도는 기나긴 73년 인생의 끝을 맞이했다.

시영은 풍도의 죽음에 3일간 조례를 금하고 풍도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풍도는 사후에 영왕(瀛王)으로 추증되었고,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풍도를 향한 평가]



풍도는 함부로 정적을 만들지 않았다. 왕조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동조했고

강자 앞에서는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굴종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사신으로 거란에 갔을 때 야율덕광에게 말한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이 가능하다.


"저는 재주도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 


풍도가 모셔온 11명의 황제들도 그의 이러한 처세술을 모를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모두 풍도를 재상으로 썼다. 그렇다고 그가 아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하고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건 간언을 주저하지 않고 내뱉었다.

말 몇마디로 개봉 함락후 크게 번질 뻔한 대 학살극에서 백성들을 구했고

황제의 친정을 반대했다는 점에서도 절대권력자가 싫어할만한 말도 주저없이 뱉으며 자기 의견을 표출했다.

그런 배경에는 그가 청렴함을 추구했다는 점도 한 몫했다. 그는 뇌물을 멀리하고 임금이 하사하는 재물또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재상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몸소 농사를 짓고 물을 길으며 땔감을 팼다.

기근이 들면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가산을 털어 민중들을 구제하였고 전쟁터에 나갔을땐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

유례없는 역사의 대혼란기에 재상으로 살아남은 것은 군주를 여러번 갈아치운 간신배라서 그런것일까?

군주보다 백성과 나라의 평안을 생각한 뛰어난 재상이었기 때문일까?

그 어느쪽도 부정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풍도는 입체적인 인물이라 볼 수있다.

이상 그가 남긴 설시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여는 문이고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자신을 베는 칼이니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숙히 간직한다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어디서나 거뜬히 몸을 편히 두리라



                                                                                                                       청년의 꿈 1기 서포터즈 외교안보 담당 LY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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