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5000년 이상의 매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뭇사람들에겐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페르시아의 역사를 되도록 많이 훑어보는 것이 이 글의 지향점이지만 한 국가에 대한 모든 것들을 설명하기에는 불가능하며, 부족한 점이 많고 모르는 바 역시 많으니, 일반인들에게 흔히 마라톤으로 유명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까지의 이란의 고대사를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설명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고대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죠.
2. 고대 엘람
<고대 엘람 지도>
문명의 태동기에 옛 엘람 문명이 있었습니다. 원시 엘람 문명 시기 엘람의 중심지 수사는 기원전 4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대 문명의 최선진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엘람이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춘 시기는 약 기원전 2700여 년인데, 이시대 동아시아는 국가가 존재치 않았습니다. 중국 역사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그러나 실재의 여부는 아직 모르는) 하나라 건국시기인 기원전 2070년보다 훨씬 빠르니까요. 엘람은 이웃한 메소포타미아 국가들과 각축전을 벌이며 존재해오고 있었으며, 당대에 매우 번영하는 문명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00여년에, 현대 이란인의 조상이 되는 아리아인이 이란 고원에 정착했습니다.
아리아인들은 토착 주민들과 통혼을 통해 섞이기 시작했죠.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다가 신-아시리아 제국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석권하였고, 엘람 왕국 역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 사이에 이란 고원에서는 각각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이 강성해지기 시작했지요. 아시리아 제국이 엘람을 공격해 약해진 틈을 타, 페르시아인들이 안샨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 후 엘람은 소왕국 수준으로 축소되었다가, 키루스 대제 시기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3. 페르시아 제국 이전의 오리엔트와 패권국 : 신-아시리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 영광의 절정>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기 전에 오리엔트 지역은 서로 전쟁을 거듭하다가 결국 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시리아-이집트를 정복한 국가가 등장하는데요. 신-아시리아 제국이라고 불리는 아시리아 제국이 기원전 7세기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해서 패권국으로서 그 이름을 떨칩니다. 아시리아 제국은 제국의 통치를 위해 총독을 각지에 파견하였으며, 교통을 정비하고 우편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정복지의 주민들을 타지로 강제 이주시켜 반란을 감소시키려는 정책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제국은 피정복민에 대한 가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었는데요. 전쟁 포로와 일반 백성들을 학살하는 것은 기본이고 온갖 고문과 악행을 자행했던 것이 아시리아 제국이었습니다. 피정복민들은 약탈당했고, 강간당했으며 고문당하였고, 가죽이 벗겨졌으며, 임산부는 배가 갈라졌고, 사람들은 참수당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죽으로 기둥을 만들었고, 사람의 머리로 기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공포 전략의 일환으로서, 다른 국가들이 아시리아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아시리아가 쳐들어갈 때 빠른 항복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피정복민에 대한 가혹한 처우를 묘사한 부조.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모습과 기둥에 못 박는 모습이다.>
잔혹한 통치 때문에 아시리아 제국은 빈번한 지방 반란에 시달렸는데요. 그 대표가 바빌로니아 지역으로, 바빌로니아는 수시로 아시리아에게 반기를 들고 저항했습니다. 아시리아는 바빌로니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 빈번하게 그들의 도전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리아인들은 종교와 문화에서 바빌로니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바빌로니아는 다른 정복지와 다르게 특별히 존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지역은 반-아시리아 연합의 선두로서 저항했고 결국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612년 스키타이, 킴메르, 메디아와 연합해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키게 되고 아시리아 제국은 종언을 맞습니다. 이후 신-바빌로니아 제국, 메디아, 리디아, 이집트의 4강국 시대가 열리게 되죠.
<오리엔트의 4대 강국. 노란색은 메디아, 초록색은 신-바빌로니아, 파란색은 리디아, 연두색은 이집트이다 메디아의 실존 여부는 학계의 논쟁거리이다.>
4. 키루스 대제의 출현과, 관용 정책
<키루스 대제>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발전시킨 키루스 대제 시절, 오리엔트 지역은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한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나톨리아를 영유한 리디아 제국, 이란 고원과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일부를 점유한 메디아, 이집트의 투쟁으로 점철된 4대국 시대에 놓여있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메디아(고고학적인 증거의 부재로 메디아의 존재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의 속국이었었는데, 이 속국의 왕이 전 오리엔트 세계를 뒤흔들게 됩니다. 키루스 대제의 출현이었죠. 키루스 대제는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쳐서 멸망시키고, 리디아를 몰락시키며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세계 최고로 부강했던 국가인 신-바빌로니아 제국마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키루스 대제가 정복한 영토>
그리하여 키루스 대제 당대에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전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키루스는 관용 정책을 펼치게 되는데, 제국 내의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포로로 끌려온 민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 것이 그것이죠. 그래서였을까요? 키루스 대제는 이민족 황제인데도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로 불렸으며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 야훼가 키루스가 와서 바빌론을 멸망시킬 것임을 미리 예언했다고 성경에 적었습니다. 또한 키루스를 아예 성경에 등장시켜 유대인들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지시하는 것으로 묘사하기에 이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 제일년이었다. 야훼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래서 고레스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리고 그것을 적은 칙서를 전국에 돌렸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나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주셨다. 나는 그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계시기를 비는 바이다. 그 하나님은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시니, 유다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성전을 짓도록 하여주어라. 원주민들은, 여기저기 몸붙여 살다가 아직 살아 남은 유다인이 있거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가져다 바치도록 자원예물도 들려 보내고 금과 은과 세간과 가축도 주어서 보내어라."
에즈라 1:1~4 (공동번역)
유대인들의 경우처럼 다른 민족들 역시 키루스에 대해 감사했을 것이며, 키루스는 온 제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아버지라고까지 불리게 됩니다. 그의 관용 정책을 엿볼수 있는 것은 키루스 실린더인데, 일각에서는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문이라고 불리지만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적인 원통 문헌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는건 인정해야겠죠.
<키루스 실린더>
그 이후 키루스는 4대강국중 마지막 남은 강대국인 이집트에 칼끝을 돌리고자 했고, 이집트 정복에 필요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아마 키루스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들을 본국에 이주하게 한 이유는 이집트 정복을 위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역에서 엎어지면 이집트였거든요.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원인 불명의 이유로 그가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키루스의 죽음에 대한 학설은 매우 논의가 분분하여 속단할 사안이 아니므로 사인에 대한 발언은 삼가겠습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 및 수도 페르세폴리스 파괴로 인한 기록 말살 때문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이 유실되었기 때문입니다.
5.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과 다리우스의 황위 찬탈
키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가 뒤를 이었습니다. 캄비세스는 기원전 525년 펠루시움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그대로 밀고들어가 이집트를 멸망시키게 되죠.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캄비세스는 이집트인들을 탄압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신성한 소인 아피스를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아피스는 자연사했으며 캄비세스가 비문까지 써주는 등 오히려 아버지 키루스를 따라해 이집트의 토착 신앙과 전통을 존중했죠. 그러나 캄비세스는 부친 키루스만큼 이민족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이집트의 신성한 소 아피스를 죽이는 캄비세스 2세
삽화. 헤로도토스의 기록과는 대조적으로 캄비세스는 아피스를 죽이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아마도 이집트 여행에서 사제들에게 캄비세스의 이야기를 접했을 텐데, 이집트 사제들은 캄비세스가 사제들에게 지급되는 자금을 줄이자 그를 싫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들은 유언비어를 헤로도토스에게 알려준 것이다.>
캄비세스가 계속 이집트에 머물자 페르시아 본토에서도 그에 반발하는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결국 본토에서 그의 동생 바르디야가 귀족들의 지지를 힘입어 황제가 되죠. 캄비세스는 황위 찬탈 소식을 듣자 격노하여 페르시아 본토로 가고자 말을 타고 출발하려다 자기 칼에 허벅지를 찔리는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고위 관료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죠.(다리우스 대제가 유력한 후보이다.) 중요한 것은 바르디야가 황제가 됐다는 점이었습니다.
바르디야는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인기 영합 정책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바르디야는 세금 감면으로 인한 재정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캄비세스와 함께 원정대에 있던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페르시아의 최고위 일곱 가문이 반발했고 이때 등장한 것이 다리우스입니다. 다리우스는 그를 따르는 최고위 가문들의 자제들과 함께 바르디야가 있는 곳인 니사이아 평원의 시키아바우티슈 요새에서 바르디야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바르디야를 죽여놓고서는 뻔뻔스럽게도 사실 바르디야는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에 몰래 죽였고 가우마타라는 마기(사제계급)가 바르디야를 사칭해 모두를 기만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같은 주장이 먹힐리 없었고 제국은 전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6. 제국 전역의 반란과 그 진압
이와같은 혼란상 속에, 제국 전역은 반란이 일어났고 심지어 본토인 페르시아마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엘람, 바빌론, 페르시아, 아시리아, 파르티아, 메디아, 이집트를 포함한 제국의 많은 지역들의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혼란을 틈타 쳐들어온 스키타이 유목민들도 쫓아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반 다리우스 세력은 모두 일소되었고, 제국을 재통일한 다리우스에게 맞설 세력은 감히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다리우스의 천하가 도래한 것이죠. 천하를 손안에 쥔 다리우스는 키루스의 딸들과 결혼하였으며, 키루스와 다리우스의 가계도를 조작해서 아케메네스 가문을 창조해내게 됩니다.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 대제의 조각상에 아케메네스의 후손이라는 텍스트가 써지기 시작한 것도 다리우스 시기때부터였습니다. 키루스 대제 시절에는 아케메네스가 조상이라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7. 이어지는 정복 전쟁과 다리우스 치세의 번영
<다리우스 대제>
반란을 모두 진압한 다리우스는 리비아, 트라키아, 소그디아나, 마케도니아, 인더스 강 유역을 정복하였습니다. 다리우스는 제국을 경영하는데 뛰어난 수완이 있어서 옛부터 이어지던 길들을 이어 붙여 왕의 길을 정비하게 됩니다. 이 뛰어난 도로망은 수도 파르사(페르세폴리스)에서 제국 서쪽의 맨 끝자락까지 2주 안에 주파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동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팽창. 초록색은 키루스 대제의 번복지이며 파란색은 캄비세스 2세, 붉은색은 다리우스 대제의 정복지이다.>
다리우스는 새로운 수도인 파르사(페르세폴리스)를 짓고 파르사를 중심으로 한 행정, 우편, 교통체계를 구축하고 관료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초를 탄탄히 다지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제국을 20개의 사트라피(행정구역)로 나누었고, 법 체계를 정비하여 제국 전역에 통용되는 제국법을 도입하였으며,(이는 로마법에도 영향을 줍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의 고대 버전을 완공하였습니다. 다릭이라는 금화 역시 따로 주조해서 상업을 활성화시켰으며, 도량형을 통일하여 거래를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관개 시설 역시 개선하였고 이를 잘 드러내는 표상이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슈슈타르 관개시설입니다.
<슈슈타르 관개시설>
<다릭>
<다리우스 대제가 완공한 운하와 그 기념비>
다리우스는 반란 방지를 위해 패배한 왕들이나 지역 유력자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삼고 그들을 페르시아 식으로 교육시켰습니다. 또한 고대 아카드 제국(BC 2334- BC 2083) 시대부터 이어져온 사트라프 제도를 강화시켜서, 각지에 임명된 사트라프(총독)에게 행정, 군사, 사법, 외교 등의 폭넓은 권한을 주었지만, 수석 재무관과 수석 서기관이 사트라프를 감시했고, 중앙에서 파견하는 군 사령관에게는 독립적인 군 통수권을 부여했습니다. 군 사령관 역시 황제에게 사트라프의 행적을 보고했죠. 그 외에도 사트라프를 감시하는 왕의 눈과 왕의 귀 라는 직책의 감찰관을 수시로 파견하여 그들을 감제케 하는 견제책도 마련하고요.
요충지에는 페르시아 본국에서 파견한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상비군을 창설했습니다. 세금 제도 역시 효율적으로 개선하여 각 지역의 경제력에 맞춰서 세금을 걷었고, 국가 행정망의 역량을 확장시켜 제국 곳곳에서 세금을 성공적으로 거두어들였습니다. 제국이 안정세에 접어들자, 제국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졌고, 기원전 500년 당시 2400~3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으며 세계 인구의 24~30%, 세계 경제의 약 24~30%를 점유하게 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위엄을 뽐냈습니다. 현재 미국의 세계 경제 점유율이 약 25%인 것을 보면 정말로 경이로운 수치인 것이죠.(물론 미국은 1960년 41%까지 차지했습니다.)
<다리우스 대제 치세의 페르시아와 세계. 인도는 십육대국 시대였고 중국은 춘추시대였다. 카르타고가 성장하고 있었고 로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 추정치는 기원전 500년 1700만에서 3500만으로 추정된다. 평균적으로 2600만정도 되지않나 싶다.>
8. 연이은 그리스 정벌,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 실패와 제해권 상실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대제 시기,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아테네가 이들을 도와주게 됩니다. 반란군은 옛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르디스를 불태우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는 군을 투입해서 이오니아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이후 군을 투입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만 폭풍 때문에 아테네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원정 자체가 무산되고 맙니다. 그 후에도 군을 투입해서 아테네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여 두 번째의 시도도 무산되고 맙니다. 다리우스는 이후의 원정을 준비했지만,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그를 진압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맙니다.
<마라톤 전투>
황위를 물려받은 크세르크세스는 당대 최대의 군세를 모아서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그 수는 헤로도토스는 물경 500만이 넘는다고 기록하지만, 학계에서 추산한 수치는 전투병 10~20만입니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와 동맹국들을 전사시켰고, 아테네 시를 파괴하는 데 성공합니다만, 크세르크세스가 굳이 싸울 필요 없었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여 페르시아 해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다 이긴 전쟁을 말아먹게 되었지요.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했고, 남은 페르시아군은 육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해군은 미칼레 해전에서 각각 패배하여 괴멸되고 맙니다.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 전쟁의 여파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평정하기는 커녕 수십만의 인력을 소모하고, 육군과 해군이 괴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에게 해의 제해권을 상실하고, 이오니아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또한 적대국인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창설하여 제국이 되었고 페르시아에 역공을 가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가 해군을 재건한다는 소식을 듣자 아나톨리아 한복판까지 거슬러와 재건중인 해군을 격파하고 유유히 사라지는가 하면,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고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집트를 지원하기까지 하죠. 크세르크세스는 정치에 관심을 끄고 건축 프로젝트에만 몰두하다가 결국 쿠데타로 인해 살해되고,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고대 페르시아어 아르타크샤샤)1세가 즉위하게 되죠.
9.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사십년의 치세 : 회복의 시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 그리스 외교의 기조가 직접적인 정벌에서 자금을 활용한 그리스 도시국가끼리의 갈등 유도로 전환되게 한 군주입니다. 그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을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맞붙게 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동시에, 키프로스를 수복하고 이오니아의 세력을 차츰차츰 회복해나갔습니다. 재정상태 또한 국가를 수십년간 안정시키니 재정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용 정책의 기조 역시 유지하여 그의 시대에 느혜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하게 되죠. 사십몇년간 나라를 위해 힘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기원전 424년에 평온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황위 다툼이 벌어지게 되죠.
10. 치열한 권력 투쟁 : 골육상쟁의 시대
<다리우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크세르크세스 2세는 45일 동안만 통치했으며 그는 이복형제인 소그디아누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소그디아누스 역시 6개월 동안만 통치했으며 그 역시 이복형제 다리우스 2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다리우스 2세는 막후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개입하여 스파르타가 아테네에게서 승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의 성공적인 성과는 빛바래고 마는데, 그가 사망할 무렵인 기원전 404년 이집트가 마침내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에 성공하게 되기 때문이죠.(이집트는 기원전 343년 다시 정복될 때까지 약 60여년간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이집트는 기원전 404년 독립에 성공했다. 중국은 전국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인도는 마가다국의 세력이 커졌다.>
이후 다리우스는 사망하고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초기에 그의 동생 키루스의 반란을 마주하게 되는데,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키루스가 고용한 그리스 용병 약 1만명과, 키루스의 부대 약 3만명으로 구성된 약 4만여명의 반란군을 6만~10만에 달했을 대군을 동원해 뭉개버리는 데 성공하죠. 비록 그리스 용병들이 메소포타미아 한복판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그리스 본토까지 도착하기는 하지만 말이죠. 이를 기록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한명인 크세노폰입니다.
<크세노폰이 이끄는 만인대는 그리스 본토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1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페르시아의 암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아케메네스 군주들 중에 가장 오랜 세월을 통치한 황제입니다. 무려 45년간을 통치했죠.(크세르크세스의 암살 시점 차이에 따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할아버지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더 오래 재위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가 업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선대의 샤한샤(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며 페르시아 황제의 공식 칭호이다.)들처럼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그리스의 패권을 잡을 수 없게 한쪽이 우세해지면 대립하는 세력을 후원함으로써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스파르타가 아나톨리아에 원정왔을때 반 스파르타 도시국가들에게 자금을 살포해서 도시국가들이 스파르타를 공격해 스파르타를 물러가게 하고,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에게 평화를 구걸하게 만들죠. 그의 치세에 이오니아와 키프로스 같은 상실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합니다만, 거기에 그치고 맙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이집트를 수복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맙니다. 기원전 385년, 기원전 383년, 기원전 373년의 시도가 모두 실패하죠. 대표적인 사례인 기원전 373년의 사례를 보면, 기원전 373년에 페르시아는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다시금 재침공하나, 이집트는 페르시아를 훌륭히 막아내었고, 이는 황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융해되고 있었던 각 총독들의 협력은 이집트 원정 실패로 인해 가시화되었고, 급기야 지방 세력들이 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맙니다. 지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이집트와 소아시아 총독들, 그리스까지 가세해 위기는 한층 커지기만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부의 명령을 지방 세력이 잘 듣지 않는 건 당연했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군대를 모으기 위해 각 사트라프들에게 이권을 떼어다 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또다시 왕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그러나 반군들은 진압당하게 되는데 이는 황제의 유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반 페르시아 세력들의 단결과 협조가 결여되어 있던 탓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반군세력들의 손발이 따로논 덕분에 진압이 가능했죠. 또한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사트라프들을 모두 용서했는데, 이는 황제가 그들을 모조리 처형한다면 계속해서 반란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들과 대립하는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죠.
그의 이러한 조치는 당장이야 제국이 온전해 보이게 하는 데 그쳤지만 결국 제국의 응집력을 약화시켰고, 훗날 알렉산드로스가 침입했을 때 제국이 빠르게 무너져버리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애초에 황제 자신이 치세 전반에 걸쳐 선대들이 펼쳐오던 관용 정책의 연속성을 내팽개쳐버리고 국정에 무심하니 지방세력의 성장을 불러오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고, 군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돈이 드니 결국 군대를 내세워 고세율로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 제국의 관행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수탈해 버리니 민심이 악화돼서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기 일반 민초들의 삶은 비참하였는데, 그의 실정으로 말미암은 중앙 권위의 악화와 그로 인한 관개 시설의 낙후는 제국 농토의 생산성을 하락시켜 소출이 감소되었고, 곡창지대인 이집트의 상실은 제국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방 세력의 강화와 각지에 만연한 부정부패, 잇따른 반란 역시 제국에 상처를 늘려갔죠. 이런 상황에서 민초들의 삶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고한 위치에 있는 황제인데도(심지어 그의 즉위명 아르타크샤샤는 하늘의 법칙에 속하는 국가의 주인이다.) 되는일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애초에 황제가 되어선 안돼서였을까요. 그는 마약에 중독되었고, 젊은 시절부터 워낙 여자를 밝혀서 "350명"의 아내를 두고 그들에게서 무려 "115남 85녀" 도합 "200명"의 자녀를 두는데요.
당연하게도 이들에게 영지를 주었고 이게 국가에 도움이 될리는 만무했습니다. 제위계승권을 가지고 다투었으니까요. 무려 200이나 되는 플레이어가 황위를 위해 다투는 것은(황녀들은 각각의 황자들을 지지하여) 제국에게 압력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또한 황제 자신도 말년에 치세 전반에서 실정을 저질러서 불난집에 기름을 끼얹고 말았습니다. 경제 정치 군사 종교 전 분야에 걸쳐 실정을 저질렀죠.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노황제는 궁중 암투에 걸려들어 가장 유력한 계승자인 장자 다리우스를 처형해 버리게 되는 패착 또한 저지르게 됩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장자는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황위를 지키고 있어서 아버지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이 진실이라면 정당한 심판이 되겠으나, 그 진위여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누설되었고 장자는 처형당하게 되죠. 그가 정말로 아버지의 암살을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함이었건, 진실이었건 그는 처형당합니다. 그 다음 황위 계승자는 아리아스페스였는데, 그는 모종의 이유로 자살하게 됩니다. 낙심한 황제는 넷째 아들 아르사메스를 계승자로 세우지만 그 역시 살해당합니다. 늙은 왕은 비통해하며 궁중 암투의 승리자인 셋째 아들을 계승자로 세웠고, 이내 붕어하게 됩니다. 셋째 아들은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게 되는 군주로서 세계사에 등장하는데,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입니다.
12. 잔혹하고 유능한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황위에 오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가장 먼저 자신의 정적들인 형제자매들과 황실 구성원을 전원 처형합니다. 수백명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권력의 분산을 막는 데에 효율적이었지만, 왕조가 망할 때에 앞으로 내세울 수 있는 황실 자손의 씨를 말려버리는 결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샤한샤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을 때, 제국은 그야말로 균열이 심한 도자기였습니다. 중앙 권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사트라프들은 점점 권력이 강화되었고 사트라프직을 세습하여 힘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방 권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게 되었죠. 이 모든 것들을 내버려 두면 훗날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세력의 반란과 왕조의 전복 말입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정면 승부를 통해 지방 세력을 격파했습니다. 먼저 카스피 해 인근의 카두시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소아시아의 사트라프들의 반란 역시 진압합니다. 반란을 진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수사로 돌아와서 내부 개혁을 단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재정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351년에 이집트로 향하는데, 광대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였으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전역의 실패는 페니키아의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황제는 이를 진압해야 했습니다. 모든 반란을 진압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43년, 마침내 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는데요.
이번엔 기원전 351년에 실패했던 이집트 전역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었습니다. 페니키아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한 보병 30만, 3만 기병, 500척의 수송선은 그대로 이집트 전역에 동원되었으며, 추가적으로 그리스 용병 1만 4000명을 동원해 총 34만 4000이 넘어가는 대병력이 이집트를 멸하기 위해 진군했습니다. 이집트 역시 국가의 명운을 걸고 총력전에 나서는데요.
이집트인 6만 명과 그리스 용병 2만 명으로 구성된 8만의 군대가 페르시아군에 맞섰습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숫자가 정말로 34만 4천인지는 모르겠으나, 10만이 넘었을 것임은 확실하겠죠.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343년 펠루시움에서 이집트 군을 섬멸했습니다. 마침내 부유한 나일강 삼각주가 페르시아 제국에 다시 정복된 것이죠.
<펠루시움에서 페르시아는 이집트 군대를 패주시켰다>
황제는 다시는 이집트가 반란을 꾀하지 못하도록 이집트를 약탈했는데, 성벽이 파괴되었고, 사원이 약탈당했으며, 이집트 토착 신앙과 그 신자들은 박해받았습니다. 또한 이집트 지역에 높은 세금을 물려 이집트를 약화시키죠. 성공적인 정복을 마무리한 황제는 마침내 페르시아로 귀환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성공적인 군사 활동은 주변 세력들에게 제국이 다시 돌아왔음을 공언하는 것이었으며, 제국이 옛 영토를 수복할 힘과, 드넓은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은 다시 본래의 거룩한 지위를 존중받았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은 재건되었으며, 에게 해의 제해권 역시 되찾았습니다. 건방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감히 제국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고, 이는 아테네의 이소크라테스의 야만인에 대한 전쟁을 호소하는 연설이 무시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은 엄중한 처벌을 받았으며, 제국에 맞선 가장 강력한 세력인 이집트도 무릎꿇었죠. 그러나 서쪽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키우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그의 눈에 거슬렸고, 황제는 반 마케도니아 세력을 지원하라고 명령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하게도,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의 음모로 독살되었습니다. 그가 없는 제국에는 훗날 서쪽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광풍이 휘몰아칠 것이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기의 통치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제국의 멸망을 유예시킨 것 뿐일 따름이었죠.
13. 환관 바고아스의 전횡과 다리우스 3세의 즉위
환관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기 환관이었는데, 능력이 출중하여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황제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로 옹립시키는데요. 꼭두각시 황제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는 바고아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 역시 바고아스가 독살시켜서 2년의 짧은 치세만을 다스리고 퇴장하게 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마저 제거에 성공한 바고아스는 방계 황족을 황제로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입니다.
14. 비운의 황제, 다리우스 3세
<다리우스 3세>
방계 황족이었던 다리우스 3세가 황제가 되었다는것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피비린내 나는 황실 숙청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새 황제인 다리우스는 절대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바고아스는 다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고 꼭두각시로 조종하려 했지만 다리우스는 바고아스를 제거할 생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고아스는 다리우스를 독살하고 본인이 황제가 되고자 했으나 다리우스는 연회에서 자신에게 독배를 권하는 바고아스의 입에 술잔을 쑤셔넣어 바고아스를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황제로서 다리우스의 초기 행보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고 이를 훌륭하게 완수해냅니다. 또한 페니키아를 길들이는데도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선황제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페니키아의 반란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거니와, 그의 시대 이전부터 페니키아는 식민도시 카르타고의 성장으로 점점 힘을 잃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페니키아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페르시아 당국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페니키아는 제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제국의 충성스러운 영토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외에 다리우스 3세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다리우스 자신은 우리를 위해 비문을 남기지 않았으며(비문을 남길 시간도 없었지만), 그의 짧은 치세를 볼 때 그의 통치 기간의 대부분이 제국의 권력다툼과 혼란을 안정시키는 데 소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쪽에서 페르시아인들의 세계를 이지러지게 할 폭풍이 휘몰아쳐 오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말이죠. 과연 페르시아를 단숨에 멸망시킬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가 혼란을 수습하던 사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5. 전쟁의 신 알렉산드로스, 역사에 등장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제>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 사령관들 중 하나로서, 아직까지도 전 세계인들에게 회자되는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자국과 수십배의 체급차가 나는 세계 최강의 국가를 상대로 수십회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해서 신속하게 정복해버렸으니까요. 알렉산드로스와 같이 압도적인 대제국을 홀로 완전히 멸망시키고 정복한 업적은 알렉산드로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압도적인 대제국과의 싸움에서 수십회의 승리를 거머쥔 업적은 존재해도요. 알렉산드로스는 고작 8년 만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해버리는 기염을 토했죠.
왕자시절부터 군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을 뽐낸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리포스의 의문스러운 암살로(아마도 그와 그의 어머니가 주도했을) 스무살의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신속하게 형제들과 반대파를 처형하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트라키아를 정벌하여 페르시아로 건너가기 전에 국경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습니다. 또한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도시국가들을 평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테베는 도시 자체가 삭제되기에 이르죠. 그리고 나서 기원전 334년, 스물두 살의 알렉산드로스는 다수의 마케도니아인들과 소수의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수만의 연합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령 소아시아에 발을 내딛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대는 처음부터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본국에서 가져온 식량과 봉급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마케도니아는 거대한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재원을 소모했고,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시절부터 이미 빚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기름을 부어 버린 것이 알렉산드로스인데요.
그는 즉위 이후 신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마케도니아 시민의 의무는 군역뿐임을 선언하여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연히 재정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전쟁을 감행했고, 이미 페르시아로 오기 전부터 재정을 많이 소모하였는데, 트라키아 원정에서 적자가 난게 그것이죠. 트라키아인들은 딱히 부유하지도 않았고 배후 안정을 위해 친 것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이익을 보기는 요원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숨통을 틔워준 것은 테베를 점령하고 파괴할 때인데,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모조리 노예로 팔아서 숨을 고를수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러고 나서 그는 페르시아 원정 준비에 착수하는데, 국가의 명운을 걸고 사용가능한 모든 재원을 원정 준비에 투입하고, 왕실 재산마저 처분했는데, 왕실 토지를 담보로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서 급전을 마련하는 것으로 원정 준비를 마칩니다. 다음의 기록에서 그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데요.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4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만 3천 명 그리고 기병 3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백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2(완역본) 중에서)
이와 같이 급전의 대가로 돈을 제공한 귀족들은 왕실 재산을 갈라먹었고, 페르디카스와 같은 최측근들은 왕실 재산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돌려말하는 것이 위 기록의 내용이죠. 마케도니아가 빚까지 져가며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원정을 준비했다는 것은, 이 원정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마케도니아는 돌이킬수 없는 타격을 입고 몰락하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총력을 다했는데도 연합군은 봉급과 식량이 얼마 되지 않아 빠르게 한 판 승부를 봐야되는 상황이 강제되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원대한 원정은 언뜻 무모한 듯 싶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페르시아 제국에는 이에 대처할 자원이 풍부했습니다. 로마 제국보다도 드넓은 영토와, 험준한 고원들과 사막, 산지들은 방어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함과 자연 자체가 알렉산드로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었죠. 그 외에도 제국의 넘처나는 자금과 병력은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의미였으며 알렉산드로스를 압도하기에 충분을 넘어서 과한 수준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군량도 얼마 없고 군인들에게 지급할 봉급도 얼마 없는 상태에서 독소전 당시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보다 더 광활한 거리를 행군하여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 엑바타나, 파사르가다에, 바빌론, 페르세폴리스에 입성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었죠. 물론 그 사이에 대기하는 수십만의 군세를 꺾는것은 당연하고요. 누가봐도 미친 짓이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베를린과 모스크바까지의 거리>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에서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까지의 거리>
16.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양국간의 국력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격차는 엄청났는데요. 인구수, 군대의 숫자, 경제 규모, 국토의 크기로 봐도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가 정복한 그리스 본토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본토의 인구를 합하면 약 450만 정도였습니다만, 마케도니아 본토의 인구는 약 60~90만 정도였으며 나머지 지역을 효과적으로 동화시키지는 못했기에 그리스 전역의 인구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습니다.(추가적으로 당시 지중해 전역과 흑해에 존재하던 그리스 문화권의 인구는 약 720만으로 추산됩니다.)
이에 반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00년으로부터 16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였을 텐데, 아마 3500만에서 4000만 정도를 헤아렸을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본토 인구와 수십배의 차이였던 것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에 실패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여신은 알렉산드로스의 손을 들어 주었고, 결국 제국은 멸망에 이르지요.
17. 서쪽에서 불어오는 폭풍: 알렉산드로스의 침입과 멸망
알렉산드로스는 재정적인 문제와 보급의 문제 때문에 빠르게 한 판 승부를 봐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상황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신속하게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싸워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는데요. 당시 페르시아의 장군 멤논은 청야전술을 구사하여 적들을 고사시킨다는 작전을 입안했으나, 다른 장군들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멤논의 출신은 그리스계였고, 그가 이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면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라니코스 강 전투>
그리하여 그라니코스 강에서 전투가 발발하였고, 알랙산드로스는 죽을 뻔 하지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 내내 왕을 상징하는 황금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는데요.그 때문인지 사경을 헤맨 적이 많았습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들은 알렉산드로스의 훌륭한 자금줄이 되어주어서 그가 파산하는 사태를 막아 주었습니다. 그라니코스의 패배 이후 총사령관이 된 멤논은 청야전술의 시행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사주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걸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멤논은 병사하였으며,(알렉산드로스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됨)마케도니아는 본토를 지키고 있던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이수스 전투 이후 메갈로폴리스 전투 BC 331)
알렉산드로스가 수없이 전투를 치르던 와중, 다리우스 3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수스로 향하는데요.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시리아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이라고 예상해 남하했으나, 다리우스는 아마누스 산으로 북상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주둔지에 빈집털이를 성공시켜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둔 부상병들을 처형하기에 이르고 그들 일부를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에 보냄으로써 알렉산드로스 측에서 페르시아 군의 엄청난 규모를 듣고 병사들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을 일체 끊어버리게 되는데요.
알렉산드로스의 전략적 패배였으며 다리우스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다리우스는 이제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죠.
<이수스 전투 전개>
다리우스가 보급을 끊고 알렉산드로스의 목줄을 쥐어 버리자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재빠르게 다리우스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여태까지의 성과는 물론이고 모든 것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북상하여 다리우스와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그게 이수스 전투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10만이 넘었을 대군을 상대로 적의 수장인 다리우스를 노리는 전략을 성공시켜 다리우스를 도망치게 만들어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리우스의 막사에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노획하는데요.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지급하던 군인들의 봉급 문제와 보급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 버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 것이었죠.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의 유명한 도시 티레의 공성전에 돌입하는데, 그는 항복을 제의했으나 티레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공성전이 벌어졌습니다. 티레 공성전이 진행되던 중, 다리우스의 편지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도달하게 되는데요. 그 내용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땅을 모두 할양하고 금 1만 탈렌트를 지급하며 자신의 딸과 맺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가족을 돌려보내 주고 휴전을 맺자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단칼에 거절했고 여기서 파르메니온과 알렉산드로스의 유명한 대화가 나오죠.
파르메니온 : "제가 알렉산드로스였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 : "내가 파르메니온이라면 그랬겠지."
알렉산드로스는 외려 다리우스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할 것을 주문하고 설사 다리우스가 도망가더라도 자신은 끝까지 추격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답장을 보내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 "만일 당신이 나를 찾아와 항복을 한다면 예의를 갖추어 대할 것이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 내겠소."
<티레 공성전>
티레 공성전은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티레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지어진 도시라서 육군으로 공성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티레와 육지를 잇는 부두를 건설하였고, 정복지의 해군을 동원해 배에 공성병기를 실어 도시를 포격했으며 티레를 포위하여 육해군의 양동 작전으로 티레를 함락시키기에 이르죠. 잔혹한 학살이 시행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티레에서의 승리 후 알렉산드로스는 가자 역시 포위해서 함락시켰고, 이집트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그는 파라오로 즉위하고, 그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역시 이집트에 세우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정복한 영토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들을 지었는데, 제국 전역에 약 70여 개의 도시들을 건설하였다고 하며,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드로스가 한창 페르시아 제국 서부를 경략하고 있던 와중 다리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로스와의 일전을 준비하여 다시 싸우고자 하였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는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맞붙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 10여만의 군대를 상대로 또다시 승리해 내는데 성공하는데요. 다리우스를 노려 적을 붕괴시킨다는 전략을 이수스 때처럼 다시 성공시켜서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가우가멜라 전투는 조금만 삐끗했어도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직결되었을 정도로 페르시아 군이 분전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부대가 페르시아 기병의 맹공에 붕괴될뻔 했으니까요. 이민족 기병대가 약탈에 눈이 멀지 않고 그대로 마케도니아의 후방을 공격했더라면 가우가멜라 전투의 패배는 알렉산드로스가 맛보아야 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다리우스는 다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에게 시간 자체를 주지 않고 맹렬하게 추격하는데요.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적의 10만 대군(기록상으로는 수십만에서 백만인)을 두 번이나 궤멸시켰을지언정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매우 광대해서 가우가멜라 전투 직후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했을 때도 페르시아 제국 영토의 절반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에게는 아직도 중요한 수도들인 수사, 엑바타나, 파사르가다에, 제 1수도 페르세폴리스가 그의 영역에 있었고, 국고에는 많은 황금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즉, 해 볼만 했던 것이죠.
다리우스에게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면 국고에 있는 자금을 사용해 다시금 군세를 모아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다리우스를 맹렬하게 추격해서 병력을 모을 시간 자체를 일체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차례차례 페르시아의 수도들인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엑바타나를 모두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들이 약탈되었습니다. 수사에서는 5만 탈렌트의 은괴가 약탈되었고, 3만 탈렌트(1075톤)의 금이 약탈되었습니다. 제 1수도인 페르세폴리스는 아예 불태워져 오늘날 그 잔해만 남아 있으며 약탈 과정에서 2만 마리의 노새와 5천 마리의 낙타가 12만 탈렌트(4300톤)의 금을 약탈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약탈한 황금의 총량은 18만 탈렌트인데, 이를 현대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6000여 톤이 넘어가는 수치입니다.(기록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엄청난 양의 금이 약탈된 것은 사실이겠죠.) 막대한 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데마라토스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늘이 되기 전에 죽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의 왕좌에 앉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모른 채 죽어 버렸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2(완역본)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맹렬한 추격을 받던 다리우스는 기원전 330년 휘하 사트라프인 베수스에게 살해당했고 마지막 황제의 죽음으로써 아케메네스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베수스의 다리우스 살해는 알렉산드로스를 분노케 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목표는 시종일관 다리우스를 생포하여 그에게서 정식으로 선양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정식 황제가 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베수스는 스스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라고 주장하였지만, 그 역시 협력자들의 배신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고 그는 처형되었습니다. 다리우스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로써 선황이신 다리우스의 원수를 갚았노라며 끝까지 다리우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죠. 그 이후에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들을 정복하러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지속합니다.
18.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이후의 세계
<시르다리야 강에서의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히다스페스 강 전투 이 전투에서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를 사로잡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나머지 영토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쇄도해 오는 군사적 도전들을 전부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유목민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는데, 오늘날의 시르다리야 강가에서 벌어진 스키타이와의 교전에서 유목민 특유의 포위 전략을 부숴버리며 승리합니다. 요컨대 유목민들이 화살을 쏘며 도망가다가 아군 부대를 포위하는 순간에 맞춰서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아군을 다시 투입해 적을 역포위하는 식으로 섬멸하는 데 성공하죠. 별개로 원정 도중에 록사나라는 여성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도 하고요.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 유역을 평정하였고, 그를 막아서는 파우라바의 포루스 왕 역시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그의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며 승리를 얻어냅니다. 그는 인더스 강을 넘어 동쪽의 갠지스 강에 위치한 마가다국의 난다 왕조마저 쳐서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20만의 보병, 8만의 기병, 8천 대의 전차와 6천의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들은 결사반대를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인도의 풍토병과 병사들의 불만과 사기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알렉산드로스는 회군을 결정하게 됩니다.
회군해서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부정축재를 저지른 관료들을 처형하고 원대한 원정 계획을 세우는데요. 천여척의 대함대를 제작하고,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서지중해 전체를 정복하며, 아시아 사람들을 유럽으로, 유럽 사람들을 아시아로 이주시켜서 서로간의 대화합을 계획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필리포스와 친구이자 동성 연인인(고대 그리스 시대는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헤파이스티온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지을 것이었으며 특히 아버지 필리포스의 무덤은 이집트의 대피라미드와 맞먹는 규모로 만들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곳에 거대한 신전을 세울 생각이었고, 트로이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테나 신전을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래 살아서 위의 계획들을 실현하는데 성공했더라면 그의 제국이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의 권역을 하나의 정권 아래에 통합시키는 과제를 완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나이 서른 세 살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놀라운 정복속도와 그의 사망당시 제국의 영토>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장군들은 제국을 갈라먹어 내전을 일으켰고, 가히 고대판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절정을 알리는 전투는 기원전 301년에 벌어진 입소스 전투인데, 여기서 안티고노스군과 그에 맞서 대항하는 연합군은 각각 8만 대군을 소집하여 한 전장에서 16만의 군세가 서로 붙게 됩니다. 안티고노스군은 패배하였고 안티고노스 역시 전사하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셀레우코스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크게 세 국가로 분열되었는데 :
셀레우코스 왕조(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란 고원, 옥수스 강 유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와 키레네)
안티고노스 왕조(마케도니아)
위의 분열된 국가들이 그것이고, 그 외에도 온갖 소국들이 존재하여 혼란한 오리엔트 지역에서 살아남기 급급했습니다. 전란의 시대가 길어지니 일반 백성들의 삶 역시 피폐해졌으며, 수많은 농토와 관개시설이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입소스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는 리시마코스가,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앙아시아는 셀레우코스가,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다>
<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를 차지하지만, 암살당했다>
그뿐입니까?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 당대에 페르세폴리스에서 약탈한 금을 흥청망청 써버리면서 막대한 양의 금이 시장에 풀렸고, 이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첫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대13에서 1대10으로 금값이 내려갔고, 금의 가치는 구리에 비해 반토막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장군들은 군을 소집하기 위해 황금을 물 쓰듯이 써버렸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당시 바빌론의 보리 가격이 급상승한 것은 이를 훌륭하게 예증합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폭등하는 바빌론의 보리와 양모 물가(맨 위가 보리고 아래가 양모 값이다)>
이렇듯 아케메네스조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여 질서와 권위가 무너짐에 따라, 옛 페르시아 제국령은 그야말로 피폐해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전쟁에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인세의 지옥도가 도래한 것이었죠. 옛 제국령이 황폐해지고 있을 동안, 제국에게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가 성장하는데요. 서쪽에서는 앞으로 로마 제국으로 불리울 로마 공화국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인도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마우리아 제국이 급속도로 성장해서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란은 다시는 옛 아케메네스 왕조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합니다.(사산조때 잠깐 성공할뻔 했습니다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19. 아케메네스 왕조의 의의
페르시아 제국의 의의, 제국의 229년간의 존속기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계 최초의 대제국으로서 성공적인 통치의 선례를 남겨서 후대의 제국들의 모범이 되었다라는 것이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인류 최초의 대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을 가능케 만들었는데요. 제국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영토와 민족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동안 다른 국가로 나뉘어 있어서 갈 수 없었던 곳도 갈 수 있게 된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빌로니아의 도시 시파르 도서관의 발굴이 이를 생생하게 되새겨주는데요. 시파르 도서관에는 바빌로니아 문학과 자연철학 문서가 많이 있었으며 책들은 대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것들을 필사한 것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문서로 고바빌로니아 시절 함무라비 법전의 서문을 들 수 있겠는데요. 함무라비 법전 서문은 페르시아 제국 이전 바빌로니아인들은 정치적 분열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석비는기원전 12세기 경에 엘람의 수사로 옮겨졌었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엘람에 가서 필사해 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 하에 엘람과 바빌로니아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됨으로써 바빌로니아인들도 석비를 자유로이 볼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가 그 비문을 필사한 것 같습니다.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관행에 따라 고대 처음 몇 단어를 그 비문의 이름으로 붙여("존귀한 신 아누가...할 때") 그 토판의 맨 끝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존귀한 신 아누가...할 때"라고 불리는 문서의 첫 번째 토판은 이제 끝났다.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가 수사에 세운 옛 석비의 글에 따라 작성되었다. 아가데의 무샬림의 아들인 마르둑-슈무-우쭈르가 작성한 토판."
《고대 근동 역사 430p》
<기원전 20세기경 오리엔트 지역의 국제 무역>
페르시아 제국의 규모가 매우 거대했기에, 제국은 제국의 권역 내의 무역을 활성화 시킬 필요성이 있었으며 무역의 활성화에 기여합니다. 고대 오리엔트 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수천년 이전부터도 무역이 번창한 지역이었는데, 페르시아 제국이 오리엔트를 일통하자 무역량이 증가했지요. 제국 권역을 넘어서, 카르타고,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 그리스와 아라비아, 인도양 무역까지, 상인들은 정치적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오갔으며 제국은 통행세를 줄여서 무역량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짭짤한 통행세를 거둘 수 있었고 상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국고에 도움이 됨은 물론이었고요.
페르시아 제국은 광활한 권역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지역 문화를 장려하고 지원해주어 세계 최초의 다문화 제국이라 부를만 합니다. 이전의 제국들은 피정복민들을 문화적으로 동화시키는 데에 집착하였지만 페르시아는 각 지역을 존중함으로써 지방이 중앙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지방민들이 자발적으로 제국의 관습과 양식을 따르자, 제국 전역이 페르시아와 지방의 문화가 섞인 제국 문화로 통일되는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학문적으로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학문을 보존 및 학자들을 후원함으로써 학문을 발전시킨 공로가 있으며, 이는 그리스의 유명한 학자들(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이 제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는 것이 당시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제국사를 서술하면서 제국이 점차 쇠망해가는 흐름을 타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제국이 엄청난 규모의 재화를 쌓아두고 있던 점,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점, 특히 다리우스 3세 시절에 약 십여만의 대군을 두 번이나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제국의 거대한 판도를 멸망시까지 유지했다는 점은 제국의 조직력과 군사력이 견고하고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이를 토대로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침입 시점까지 내내 강대함을 보여주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는바, 이는 학계의 연구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종합해보자면, 이질적인 여러 다민족 집단을 하나의 국가에 녹여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 아케메네스 제국의 가장 위대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 글을 끝맺으며
여태까지의 장문의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소망하건대, 저의 글이 약소하게나마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은 키루스 대제의 무덤 글귀로 갈음하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사르가다에를 방문했을 때 키루스 대제의 묘를 방문하는데요. 그는 키루스의 무덤에 새겨진 글귀를 읽고 망토를 벗어 무덤을 덮으며 존경을 표했다고 전해집니다.
<키루스 대제의 무덤>
"아무리 제왕이라도 결국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 또한 여기서 그냥 빈손으로 가고 이렇게 작은 쉼터에서 쉬고 싶을 뿐. 이름 모를 제왕이여, 그대는 나의 잠을 깨우지 말길. 빈손으로 가는데 화려한 보물이 뭐하러 필요하겠는가? 어차피 그대도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용어 설명
기원전 : 예수 그리스도 이전이라는 뜻으로, 영어 약자 B.C(Before Christ)로 표기한다. 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전에 탄생했다. 최근 종교적 색채를 제거한 BCE(Before Common Era, 공통 시대 이전)라는 표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기원후 : 주님의 해 라는 뜻으로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 AD로 표기한다. 종교적 색채를 제거한 표기는 Common Era(공통시대)의 약자 CE다.
오리엔트 :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의 라틴어 오리엔스(Oriens)에서 유래된 것으로, 동방이라는 뜻을 지녔으며 이집트를 포함한 서아시아 지역을 뜻한다. 오리엔트는 서양이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 때 일본 중국 인도 등의 오늘날 아시아 전체로 그 범위가 확산되었다.
참고문헌
1. https://iranologie.com/the-history-page/the-achaemenid-empire/
2.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10758331/articles/163744?menuId=129&query=%EC%95%84%EC%BC%80%EB%A9%94%EB%84%A4%EC%8A%A4
3. The Dynamics of Ancient Empires
State Power from Assyria to Byzantium 77p.
4.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Pelusium_(343_BC)
5. Price Behavior in Ancient Babylon 49p.
6.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2(완역본)
7. 고대 근동 역사 397p, 424, 430p.
8. The Old Assyrian Trade Network from an
Archaeological Perspective. 12p, 87p.
9. https://en.m.wikipedia.org/wiki/Greco-Persian_Wars
10. https://en.m.wikipedia.org/wiki/Wars_of_Alexander_the_Great
참대단한 실력입니다
대표님께 칭찬받으니 기쁘기가 한량없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고 그저 관심이 남들보다 더 많을 뿐입니다. 더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마저 또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장문의 글이오니, 아침에 머리가 맑을 때 읽어보심을 권합니다. 역사 동아리에도 올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에 마저 또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많이 써주세요! 저도 역사동아리에
이순신관련글 연재중입니다
네 노량해전 글 잘 봤습니다. 이순신 장군 연재 잘 부탁드립니다.
넵 저도 쭈욱 연재하겠습니다~!
우와 고퀄칼럼 추천
감사합니다.
참대단한 실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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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로렌츠님
좋은 글 감사히 읽겠습니다! ㅎ
호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홍준표 의원님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와 👏👏👏
감사합니다! 😊
무대홍님 칭찬 받으신 칼럼 이라서 읽어보러 왔는데 천천히 잘 읽어보고 싶어서 댓글 부터 남겨봅니다
청꿈 칼럼 보면 훌륭하신 청년분들이 많이 보이셔서 이나라에 희망이 보이는데 정치꾼들 때문에 너무나 슬픕니다.
진짜 인재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쇼질이나 하는 정치꾼들 싹다 대청소 되었음 좋겠습니다
현재 여야 청년정치인이던 몇수 정치인이던 정상적인 정치인 열명 될까말까입니다
인성과 애국심까지 훌륭하신 청년들이 이나라의 일꾼이 되길 빕니다
현 시점은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의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조적인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학적, 경제적, 안보적 충격은 솔직히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하루가 지날때마다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음에 목이 죄어 옵니다. 그래도 각자 힘내야겠죠. 격려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연히 이렇게 똑똑하신 청년분들 글이지만 뵈면 이나라도 우리 청년들도 아깝고 눈물 납니다
진짜 대한민국이 바로 서려면 정치꾼들이 아닌 참된 정치인 인성도 애국심도 갖춘 정치인들이 꼭 필요합니다.
청꿈에서 글이지만 존경하고 싶은 훌륭하신 청년분들이 국회에 꼭 입성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참된 정치인들이 많아지는게 정말 중요한데... 국가의 룰을 만드는 엘리트계층이 애국심이 넘치고 도덕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번영은 참으로 어렵지만 쇠락은 한순간이라는점에서 그런 정치인이 필요함을피부로 느끼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와...진짜 양과 질에서 열정이 느껴지네요 ㅋㅋㅋ
이렇게 다들 좋아해 주시니 공들여 쓴 보람이 넘칩니다.
오 감사합니다 다리우스 많이 들어봤었는데 페르시아의 황제였군요.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우리가 아는 알렉산더 대왕이죠??
네 알렉산더 대왕이 알렉산드로스 3세입니다.
읽는데 20분 걸림
다음엔 나눠서 부탁
좋은글 굿
감사합니다. 나뉘어진 글은 역사정보 동아리에 있습니다. 본글은 칼럼으로서 쓰여졌기 때문에 나누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급이 30일치밖에 없다고? 괜찮아 보급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것이니까...
대한독립 총사령관 무다구치 렌야 선생님의 말씀이군요. 그와 별개로 진짜로 적에게서 보급을 취한 명장인 곽거병은 괴물인가 싶습니다.
어둠의 독립군 김렴야 장군님 그립읍니다...
렌야 장군님 덕택에 독립이 빨라졌죠.
ㅊㅊ
감사합니다!
페르시아.. 참 역사 전반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죠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급격하게 종교통제사회가 되어버린 현 이란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팔레비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민중들과 이에 호응한 이슬람 성직자 집단들이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갔지요. 정권을 잡은 호메이니는 이란을 파멸로 몰고 갔는데 어찌나 심한지, 자기들 위대한 유산인 페르세폴리스와 키루스 대제의 묘를 없애버리려고 했으나 전국민적인 반대를 받고 "저는 절대로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쩔쩔매야 했지요.
맞습니다 팔레비 정권이 대놓고 친미주의 정책 펼치고 실정한것은 당연히 비판점이나 꾸란에 심취한 세력들이 아예 중세시대로 돌려놓은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유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네요
팔레비가 서서히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는데 너무 급속하게 몰아붙여서 일을 그르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란의 잠재력만 보면 세계 10대 경제강국 안에는 거뜬히 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 국가인데, 지금 국가의 수준이 퇴보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때 일본보다는 작고 중국 인도와 비슷한 경제규모였던 적이 있었는데...
맞는 말입니다 근데 호르무즈 해협에서 수비대들한테 시달린 개인적 원한(?)이 있기에 감정이 썩 좋진 않네요ㅋㅋㅋㅋ
예전에 뉴스로 이란이 한국은 이란에게 지급해야될 돈을 어서 지급하라며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 배를 납치했던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직접 시달리셨다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저라도 감정이 좋을수가 없을것같네요.
아~ 그쵸 케미호 업계 선배들 타고 계셨었는데 참.. 그래서 은근히 이업계가 인종차별 심합니다 선진국은 정비도 잘되어있고 대화도 잘되는데 특히 일본과 싱가포르를 최고로 치고 후진국 가면 일도 더럽게 하고 뒷처리도 개판이라.. 이란도 그 중 하나지요
씁쓸한 일입니다. 저로서는 그저 안전을 기원할 뿐이네요. 안전하게 일하게 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