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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칼] 법카 긁어대다 볼기짝 내준 황제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칼’럼

‘법카’ 앞에서 운명 엇갈린 한 민족 두 황제

이재명 법카의혹 사실이라면 필히 일벌백계

 

사비로 공무 집행한 강희제

 

강희제(康熙帝) 또는 강희대제(康熙大帝)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愛新覺羅玄燁‧생몰연도 서기 1654~1722)는 청(淸)나라 4대 황제다. 아들 옹정제(雍正帝) 및 손자 건륭제(乾隆帝)와 함께 강건성세(康乾盛世) 일궈낸 명군(明君)이다.

 

대만드라마 황제의딸로 잘 알려진 건륭제는 평생 조부(祖父)를 존경하며 조부 임기보다 딱 1년 모자란 60년만 재위하고 상황(上皇)으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청나라를 찾은 프랑스선교사 조아킴 부베(Joachim Bouvet)는 루이14세(Louis XIV)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인데도 전례 없이 매우 검소하다”고 찬탄했다. 조선왕조의 현군(賢君) 정조대왕(正祖大王)도 “성군(聖君)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강희제가 즉위 초부터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친 건 아니었다. 7살 나이로 황제가 된 그는 네 명의 섭정(攝政) 지도를 받았다. 특히 병부상서(兵部尙書‧국방장관 격)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鰲拜)가 최대위협이었다. 15세 무렵 강희제는 젖먹이 천자를 우습게보던 이 오만방자한 권신(權臣) 숙청하고 비로소 친정(親政)길에 올랐다.

 

위기는 또 있었다. 당시 피지배층이었던 한인(漢人)들은 청나라 건국세력 만주족(滿洲族)을 경멸하며 제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만주족은 여진족(女眞族)으로 호칭된 명(明)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주변 민족들로부터 거의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대접받았던 터였다. 강희제로서는 한인들 인심(人心) 얻고 그 식자(識者)들 지혜를 얻을 필요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소수 만주족이 1억 한인들을 지배하는 건 불가능했다. 누구 표현대로 물속에 얼음쪼가리들 던져 넣으면 물을 얼리기는커녕 얼음이 녹고 만다.

 

“무식한 오랑캐” 소리 듣지 않으려는 듯 강희제는 주야장천(晝夜長川) 학문습득에 힘썼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달달 외우고 자신만의 새로운 정치철학 세우는가 하면 선교사들 불러 수학 등 배워 서양학문에도 통달했다.

 

때문에 내로라하는 한인 유생(儒生)들이 ‘오랑캐 황제’ 우습게 여기고 강희제와의 토론 임했다가 백기 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생들은 진심으로 승복하고 강희제를 도와 치세(治世) 열었다. 물론 강희제는 “저런 물러터진 황제” 소리도 듣지 않도록 삼번의난(三藩亂) 등 끝까지 반항하는 이들은 단호히 처벌해 권위(權威)를 세웠다. 강희제는 전형적 외유내강(外柔內剛)형 군주였다.

 

강희제는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체결, 징세(徵稅) 축소, 일자리 확충 등 밤낮으로 정무(政務) 임하면서 전국순행(巡行)에도 자주 나섰다. 혹 간사한 지방관리들이 “저희 고을은 아주 태평하옵니다” 거짓상소 올리고 뒤로는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강희제는 “짐(朕)은 하늘(백성)을 섬기는 신하”라고 공언(公言)할 정도로 민심(民心)을 중시했다.

 

강희제가 남방(南方)순행에 오른 건 모두 여섯 차례였다. 보통 어가(御駕)행렬이라 한다면 끝 모를 정도로 늘어선 시종‧군사 등 호화로운 풍경이 떠오른다. 그러나 강희제는 달랐다. “여기 황제 나아가신다” 광고하면 간신들로선 미리 대비할 게 뻔했다. 때문에 강희제는 수행원을 최소한으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곤룡포(衮龍袍)마저 벗어버리고 백성으로 위장했다고도 한다.

 

게다가 강희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파격도 감행했다. 국고(國庫)에서 지출되는 순행비용은 국법(國法)에 명시된 수준 그대로만 썼다. 혹 모자라는 비용은 전부 내탕금(內帑金) 즉 봉급‧진상 받아 저축한 ‘강희제 자신 개인 돈’으로 충당했다.

 

순행은 분명 외유(外遊)성 출장 아닌 공무(公務)였음에도 강희제는 백성혈세(血稅)가 막 쓰이지 않도록 엄중경계했다. 황제가 한 번 ‘법카(법인카드)’ 남용하면 이하 관리들도 따라하고 결국엔 “법카는 개카(개인카드)일 뿐” 외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국고가 비어갈수록 세율(稅率)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처럼 세금폭탄은 찢어지게 가난한 피지배층에 있어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법카로 음주가무 즐기다 딱 걸린 금태종

 

강희제와 달리 그의 먼 조상뻘 인물 중엔 몰래 법카 쓰다 딱 걸려 ‘엉덩이 얻어맞은’ 황제가 있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태종(太宗)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1075~1135)가 이 영화 같은 얘기 주연이다.

 

태종은 형이자 태조(太祖)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에 이어 보위(寶位)에 올랐다. 태종이 마냥 혼군(昏君)이었던 건 아니다. 북송(北宋)과의 일시동맹 통해 거란(契丹)의 요(遼)나라를 무너뜨렸으며, 협약 어긴 북송을 침공해 동경(東京) 개봉부(開封府) 코앞까지 육박하는 등 정복왕으로 이름 떨쳤다.

 

포청천(包靑天) 같은 능신(能臣)들 이미 죽고 없었던 북송은 하북(河北) 등의 막대한 영토 할양해야 했다. 송황제는 태종을 작은아버지라 불러야 했다. 태종은 나중엔 아예 송황제를 ‘생포’하는 정강의변(靖康變) 일으키고 북송을 멸망시켜버렸다. 북송은 9대 168년만에 막 내렸으며 잔여세력은 강남으로 도주해 남송(南宋)으로 명맥 잇는 처지 됐다.

 

그러나 북송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태종 운명은 ‘법카유용’ 하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졌다. 변방의 불가촉천민으로서 한인‧거란인‧고려인 등에게 허구한 날 얻어맞던 여진족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요나라는 주기적으로 여진부락들 쳐들어가 살육‧납치하는가 하면 산아제한(産兒制限) 정책까지 실시했다.

 

이렇듯 빈손으로 금나라를 일으켜 세운 태조 완안아골타는 후임 황제들 첫째 덕목으로 근면‧절제를 요구했다. 그는 “국고는 오로지 전쟁이 있을 때만 쓸 수 있다. 누구든 이를 어기면 곤장 20대를 친다”는 유훈(遺訓) 남겼다. 상술했듯 안 그래도 빈약한 나랏돈 한 푼 두 푼 꺼내다 사적으로 쓰다보면 바닥나는 건 시간문제고, 이는 모두 혈세로 메워야 했다. 세금폭탄은 피지배층은 물론 같은 여진족 민심이반(離叛)도 야기한다.

 

때문에 태종도 형의 가르침을 철저히 준수했다. 용포(龍袍)는 낡아 헤졌으며 황궁(皇宮) 성벽은 버드나무 울타리로 대체됐다. 태종은 “난 이렇듯 백성 사랑하는 군주”라며 자신의 덕망(德望)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하루 이틀 시간 지나면서 사달 벌어졌다. 태종은 옷이 낡은 것도, 집이 허술한 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황궁에 앉으나 길거리 걸으나 어디에서든 풍겨오는 참을 수 없는 ‘곡차 향기’였다. 백성들은 너도나도 맥주에 소주 말아 폭탄주 원샷했다. 그 광경 지켜보던 태종의 끽주(喫酒)욕은 참으면 참을수록 광기(狂氣)로 변해갔다.

 

태종은 마침내 미쳐버린 건지, 제 돈으로 슈퍼 가서 술 사먹으면 될 것을 왜 그랬는지, 빈곤코스프레(흉내)는 가식(假飾)이었을 뿐이었는지, 달빛 하나 없는 캄캄한 야밤에 부릅뜬 눈으로 달려 나가 재물창고를 ‘월담’하고 말았다. 그리곤 찾아낸 법카로 족발‧소주 배달시켜 눈물의 음주가무(飮酒歌舞) 즐기고 말았다. 환희에 젖은 태종의 코는 한 송이 딸기처럼 빨갛게 물들어갔다.

 

온 황궁에 때 아닌 새우젓‧소주 냄새 진동했으나 대취(大醉)한 태종 본인만 몰랐다. 이튿날 황궁에 출근한 백관(百官)들은 태조의 서릿발 유훈 서린 법카가 사라진 걸 알아챘다. 태종이 순결한 자태로 넥타이 머리에 맨 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발견됐는지 어쨌는진 모르겠으나, 백관들은 태종이 범인이란 것도 알아챘다.

 

좌우는 국법에 따라 태종을 가차 없이 끌어냈다. 형틀에 매달린 태종은 어제 자신이 뭘 먹었는지 속칭 오바이트로 확인할 때까지 맨엉덩이로 무자비한 몽둥이찜질 받아냈다. 만신창이 된 태종 일으켜 다시 옥좌(玉座)에 앉힌 백관들은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정신이 번쩍 든 태종은 이후론 법카만 봐도 경기 일으키며 족발집 전화번호 휴대폰에서 지운 채 평생 두부‧야채만 먹고 살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부인 김혜경 씨의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제기했던 조명현 씨가 최근 얼굴을 공개했다. 당국에 의하면 유용 규모는 ‘억대’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민주당 소속인 김동연 경기지사도 최대 100건의 유용 정황이 있다며 경찰에 수사의뢰했다고 밝혔다.

 

이 대표, 김 씨가 무고(無辜)할 수도 있다. 유용 진위여부는 당국 수사결과가 나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윗물 맑아야 아랫물 맑은 법, 만에 하나라도 두 사람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국가지도층이란 점에서 완안오걸매와 같은 일벌백계(一罰百戒)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건전한 정치풍토 수립도 가능할 것이고, 혼탁한 윗물 따라 국민혈세 제 돈처럼 막 쓰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에게 경각심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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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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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없습니다.
  • 해피데이
    2023.10.20

    좋은 글 땡큐입니다~

  • 해피데이
    오주한
    작성자
    2023.10.21
    @해피데이 님에게 보내는 답글

    필력이 모자라 아직 하산하지 못해 갈고닦는 중입니다. 더 좋은 글, 짧은 소견으로 찾아뵙고자 합니다.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고우
    2023.11.05

    좋은글 입니다

  • 고우
    오주한
    작성자
    2023.11.06
    @고우 님에게 보내는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