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흐름 못 읽고 과욕부리다 역천자망한 항우
洪 지지율서 드러난 민심…‘누군가’는 자중해야
항우를 버린 천하명사 이야기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생몰연도 ?~기원전 202)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를 풍미한 선비였다.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중 한 사람인 신릉군(信陵君)의 식객(食客)으로서 이름 떨친 인물이다.
이렇듯 이름 난 노사(老士) 장이는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 때 거병(擧兵)해 진(秦)나라를 무찌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초(楚)나라 재건 후에는 권신(權臣) 항우(項羽)에 의해 상산왕에 봉해졌다. 허수아비황제 의제(義帝)를 앞세운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는 여러 제후국의 종주국(宗主國) 초나라 조정을 장악하고서 사실상의 상황(上皇)으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이는 한왕(漢王)에 봉해져 산간벽지 촉(蜀)으로 쫓겨나던 훗날의 한고조(漢高祖)를 따랐다. 당시 한왕 세력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 비교할 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바닥민심(民心)은 달랐다. 백성은 신안(新安)의 갱(坑)에서 무고한 수십만명을 산 채로 생매장하는 등 ‘인심(人心)과의 괴리’를 자랑하던 포악무도한 항우 대신, 약법삼장(約法三章) 등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한’ 어진 한왕을 진정한 리더로 여겼다.
이에 장이도 장차 천하의 주인은 한왕이 될 것임을 내다보고 한왕에게 힘을 보탠 것이었다. 어린 시절 물로 배 채웠던 가난한 시골촌부(村夫) 출신 한왕이 당대의 명사(名士) 합류로 얻은 힘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항우 뒤를 들이친 노예왕 이야기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기원전 195)는 본래 하층민 출신이었다. 어려서 그는 관상가(觀相家)로부터 “형벌을 받은 후 왕(王)이 될 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커서 혹독한 진나라 법을 어겨 경형(黥刑‧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형벌)에 처해진 영포는 “내가 정말 왕이 되려나보다”며 좋아했다. 평생 문신을 드러내놓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영포는 경포(黥布)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포는 경형 후 진시황릉(秦始皇陵) 공사장인 여산(驪山)으로 보내졌다. 당대에는 “여산에 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 한다”는 한(恨) 서린 노래가 떠돌았다. 진승오광의 난 앞에 군대로 차출돼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목숨 건진 영포는 얼마 가지 않아 항우에게 투항했다. 영포는, 초한(楚漢)전쟁 후 한왕에게 항복하게 되는, 종리매(鍾離眜)‧계포(季布) 등 기라성 같은 장수들을 제치고 왕에 봉해질 정도로 항우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영포는 수하(隨何)라는 인물의 몇 마디 조언에 즉각 한왕에게로 투항했다. 처음에는 수하를 며칠씩이나 만나주지 않았지만 “항우는 이미 인덕(人德)을 잃었다”는,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충고를 듣자 현실에 눈 떴다. 영포는 한왕과 대치 중이던 항우 본대(本隊)를 자기 쪽으로 유인함으로써 항가군(項家軍)의 머리가 꼬리를 돕지 못하게 만드는 등 큰 활약을 했다.
항우를 굶겨죽이려 한 협객 이야기
양왕(梁王) 팽월(彭越‧?~기원전 196)은 거야(巨野)에서 어업(漁業) 등에 개입하던 수적(水賊)이었다. 진승오광의 난 발발과 함께 반란군 두령(頭領)에 억지로 추대된 그는 출정식에 지각한 이들을 참할 정도로 군기(軍紀) 확립을 중시했다. 때문에 팽월은 단순 도적이 아닌 협객(俠客)으로도 분류된다.
당초 팽월은 무리를 이끌고 항우에게 합류해 멸진(滅秦)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귀족 출신 항우는 단지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만으로 팽월을 분봉(分封)에서 제외했다. 한왕에게 귀순한 팽월은 신들린 유격전(遊擊戰)으로 항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 항우 혈압을 높였다.
만약 팽월의 활약이 없었다면 한왕 본대는 노도(怒濤) 같은 항가군 공세에 진작 무너졌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그토록 한왕을 직접 잡아 죽이고자 혈안(血眼)이 됐던 항우마저 인내심이 바닥 나 후방으로 말머리를 돌릴 정도로 팽월의 게릴라전 능력은 탁월했다. 한왕은 항우와 달리 팽월에게 왕호(王號)를 하사했다.
항우의 목을 취한 무명소졸 이야기
중수장후(中水莊侯) 여마동(呂馬童‧?~기원전 171)은 항우 휘하 무명소졸(無名小卒) 또는 하급장교였다. 항우와는 동향(同鄕)으로서 익히 아는 사이이지만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조차 받지 못했던 듯하다. 여마동은 항우의 충복(忠僕) 장한(章邯)이 한왕에게 패하자 그 길로 한왕에게 의탁하고서 끝까지 충성했다.
여마동은 한왕‧서초패왕의 마지막 결전 해하(垓下)전투에서 항우 목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책사(策士) 범증(范增)을 제 손으로 숙청하다시피 한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렸다. 항우는 먼 훗날 패왕별희(覇王別姬) 이야기로 구전(口傳)되는 애첩 우희(虞姬)와의 사별(死別) 후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 모습을 본 한왕은 “항우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한다”고 외쳤다.
이 때 항우를 막아선 게 여마동이었다. 휘하가 모두 전멸(全滅)하고 홀로 여마동과 마주친 항우는 과거 괄시했던 고향사람을 알아봤다. 애첩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숙부 항백(項伯)마저 한왕에게로 달아나는 등 대세(大勢)는 이미 기울었다는 걸 항우도 깨닫고 있었다.
항우는 “듣기로 한왕이 내 수급(首級)을 천금과 만호로 사려 한다지. 이왕 보물을 내줄 것 고향사람에게 주겠다”고 한탄하며 제 목을 베었다. 무명소졸 여마동은 한왕이 약속한대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만약 여마동이 없었다면 또 어떤 출혈(出血)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반면 민심의 풍년 맞은 한왕 이야기
보기 드물게 한왕을 배신했으면서도 끝내 다시 한왕에게 돌아오거나, 한왕에게 폭언(暴言)을 내뱉으면서도 끝까지 충성한 이들도 있다.
옹치(雍齒‧?~기원전 192)는 한왕이 두메산골에서 오합지졸(烏合之卒) 모아 첫 봉기할 때부터 따른 인물이다. 한왕은 두 개뿐인 세력기반 중 한 곳인 풍읍(豊邑)을 맡길 정도로 옹치를 신임했다. 하지만 동네 유력자(有力者)였던 옹치는 ‘반달’ 한왕이 무리 우두머리가 된 것을 못마땅해 했다.
옹치는 끝내 위왕(魏王) 위구(魏咎)에게 풍읍을 들어다 바치고서 한왕을 배반했다. 화가 치솟은 한왕은 풍읍을 들이쳤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한왕이, 그 때까지는 아직 같은 초나라 식구로서 관계가 원만하던, 항우에게서 병마(兵馬)를 빌려 공격함에 따라 옹치는 패주(敗走)했다.
그러나 초한전쟁 와중에 연락이 두절됐던 옹치는 뒤늦게 깨달은 바 있는지 한왕에게로 복귀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난세(亂世)에서 배신자를 기다리는 건 죽음이었지만 한왕은 넓은 도량으로 그를 용서했다. 나아가 아예 십방후(汁方侯)에 봉하고서 봉읍(封邑) 2000여호를 하사했다. 작위는 아들이 이어받았다. 약 400년 뒤 후한(後漢) 말 등장하는 호족(豪族) 옹개(雍齒)는 옹치의 후손이다.
주창(周昌‧?~기원전 192)도 한왕 거병 때부터 종군(從軍)한 사람이다. 사촌형 주가(周苛)가 항우에 의해 산 채로 삶겨져 죽자 한왕으로부터 요직(要職)이 제수(除授)됐다. 초한전쟁 후에는 조(趙)나라 상국(相國‧재상)에 임명됐다.
그런데 주창은 최고위 상관 한왕에게 독설을 아낌없이 퍼붓곤 했다. 실례로 주창은 어느날 상소(上疏)를 위해 한왕 거처로 향했는데 한왕은 음주가무 중이었다. 주창이 분노해 뒤돌아서자 평소 매우 인간적이었던 한왕은 취기(醉氣)에,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더욱 백성들에겐 비(非)가식적이고 친근함으로 다가왔을 수 있겠지만, 장난삼아 쫓아 달려와 주창을 쓰러뜨리고서 깔고 앉은 뒤 “내가 누구 같은 임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분통 터진 주창은 “바로 걸주(桀紂)같은 임금이시오!”라고 외쳤다. 걸주는 하(夏)나라 걸왕(桀王), 상(商‧은)나라 주왕(紂王)을 통칭(統稱)하는 단어다. 걸주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결딴 낸 폭군(暴君)들이었다.
주창은 이렇듯 한왕에게 독설을 날리면서도, 한왕은 백성의 희노애락(喜怒哀樂)에 공감할 줄 아는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끝까지 한왕을 따랐다. 한왕도 이러한 주창의 고언(苦言)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백성의 세금‧요역(徭役) 부담을 크게 낮추고 일자리를 크게 늘려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열었다.
60%에게 대든다는 소문의 30%
한왕과 항우의 운명을 가른 건 민심이었다. 민심이 한왕에게로 향하고, 자연히 내로라하는 영웅호걸(英雄豪傑)‧준걸(俊傑)들이 항우 대신 한왕을 섬김에 따라 초한전쟁 대미(大尾)는 민심이 원하는 결말대로 맺어질 수 있었다.
근래 여권 내 권력투쟁이 급속도로 심화(深化)되는 듯한 분위기다. 홍준표 대구시장을 두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소속 정당 국민의힘에서 징계수위가 논의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홍 시장은 차기 유력 대선주자 중 한 사람이다. 현 국민의힘 일각은 타 인물을 대선주자로 밀어주고, 대신 ‘누군가’가 태황(太皇)이 되려는 것 아니냐는 풍문(風聞)에 휘말린 상태다.
허나 ‘홍 시장이 민심에 역행(逆行)한다’는 취지의 당 일각 주장과 달리 바닥민심은 그렇지 않은 모양새다. 한국갤럽이 21일 발표한 ‘2023년 상반기 광역자치단체장 직무수행 평가’ 조사에서 홍 시장 시정(市政) 긍정평가 비율은 59%에 달했다고 한다. 전체 광역시도(市道)단체장 중 근소한 차이로 3위였으며, 전임(前任) 시장 수행평가와 비교한 증감률(增減率)에선 1위였다.
반면 ‘누군가’의 성적은 참담하다. 같은 날 공개된 한 여론조사에서 ‘누군가’의 지지율은 33%였다. 부정평가는 58%에 달했다(이상의 모든 여론조사 상세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공교롭게도 ‘누군가’를 보좌하는 주변 인물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구설수에 올라 홍 시장의 상황과 비교된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민심은 곧 천심(天心)이다. 천도(天道)를 거슬렀던 항우는 끝내 민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인 법이다. 풍문이 만약 사실이라고 할 때, ‘약 30%’는 민심을 거슬러 패왕별희의 비극을 자초(自招)하는 대신, 약 두 배의 인물에게로 향하는 시대의 열망에 적극 순응(順應)해야 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추방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시장님께서 그렇게 약한 분도 아니시고요. 시장님께서 국민의힘에 애정을 가지신만큼, 시장님 지지자라면 당 자체에 대한 왈가왈부는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론조사 결과가 많은 걸 시사하는 줄 압니다.
대다수 시민들의 공통된 생각은 홍준표는 대응을 잘했는데 겨우 골프 하나로 생사람잡는 건 옳지않다 이런 뜻으로 봐도 될까요
여론조사 결과가 많은 걸 시사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현재의 국힘은 '수해 중 골프친 것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다'라며 준표형님을 당에서 추방시키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정작 딴짓 한 경북, 충북 도지사는 그냥 묻어가고 있고요. 마치 여러차례 디폴트를 겪고도 정신 못차리는 아르헨티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르헨티나보다는 그냥 베네수엘라 보는거 같음
추방시킬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시장님께서 그렇게 약한 분도 아니시고요. 시장님께서 국민의힘에 애정을 가지신만큼, 시장님 지지자라면 당 자체에 대한 왈가왈부는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제가 안 됩니다.
윤리위에서 ‘혼내줘야겠다.‘ 이런 표현을 쓰는 데 참 어의가 없고,
정말 제게 힘이 있다면 싹 다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현명한 판단이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근데 경징계를 줘도 총선 이후 토사구팽(兎死狗烹) 할 가능성이 있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조삼모사(朝三暮四)전술일 수도 있는게, 지금 징계를 가볍게 주고 나중에 뒤통수 치는 수법을 쓰는 것 같습니다.
설사 어떠한 위난이 닥치더라도 지지층이 뭉치면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해도 역사를 보면 결국 축출당했습니다. 민심을 역행하다간 좋지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것입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필귀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