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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들이 간첩인가, 한국이 몽상가인가

오주한

‘호접지몽 혼란작전’ 美 농간한 소련스파이

‘대북송금 의혹’ 당사자 혼란작전 분쇄해야

 

“나는 나비인가 사람인가”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말이 있다.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는 인생무상(人生無常)‧권력무상(權力無常) 등이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혼란에 휩싸여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게 됨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가상현실을 다뤄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헐리웃영화 ‘매트릭스’도 근본 주제는 호접지몽과 밀접하다.

 

해당 고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사상가 장자(莊子)의 철학을 담은 동명(同名)의 책에 나온다. 장자는 어느 날 잠들었다가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는 한 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환희(歡喜)에 찬 장자는 이윽고 자신이 사람이라는 점도 잊어버렸다.

 

그렇게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누비던 장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에 비친 세상은 선계(仙界)가 아닌 인간세상이었다. 자신 또한 나비가 아닌 사람이었다. 장자는 한탄했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꿨던 것인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실로 알 수 없도다”

 

그로부터 약 1000년 뒤 당(唐)나라의 문장가 심기제(沈旣濟)가 저술한 침중기(枕中記)에도 호접지몽과 비슷한 한단지몽(邯鄲之夢) 고사가 나온다. 초라한 행색의 젊은 노생(盧生)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국시대 당시 지상낙원(地上樂園)으로 유명했던 유적도시 한단을 찾았다. 주막에 앉아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불퉁거린 그는 주모(酒母)의 밥 짓는 소리 들으며 피곤함에 졸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고래등 같은 대궐이 펼쳐졌다. 뿐만 아니라 천하제일 명문가(名門家)가 찾아와 “제발 우리 딸과 혼인해주시오” 애걸했다. 선녀 같은 색시를 얻은 노생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해 재상(宰相)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어질고 어여쁜 현모양처(賢母良妻)에 토끼 같은 자식들에 으리으리한 벼슬까지 있으니 노생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렇게 약 10년간 권세(權勢)를 누리던 노생은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포박됐다. 모진 고문까지 당한 그는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았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을 텐데. 그 옛날 누더기 입고 한단의 거리를 노닐 때가 그립구나”며 땅이 무너질 듯 장탄식(長歎息)을 내뱉었다.

 

다행히 무고(無辜)가 밝혀져 복직한 노생은 열 명의 손주까지 얻고서, 중세로서는 상당히 많은 나이인, 80세까지 장수(長壽)하다가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殞命)했다. 노생이 숨을 거두자 돌연 어디선가 식기(食器)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수한 향기가 풍겨왔다. 꿈속에서 눈 감았던 노생이 현실에서 눈 뜨자 주모는 그 때까지 분주히 밥 짓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전승되는 환상의 섬 이어도(離於島) 전설도 유사한 내용이다. 이 전설은 해녀(海女)의 노래 ‘이어도 사나’, 1979‧1997년 방영된 옴니버스 드라마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탐라(耽羅‧제주도)의 한 해녀는 여자‧노름 좋아하는 남편,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 살며 입에 풀칠하고 있었다. 한량(閑良)이었던 남편은 “선녀들만 산다는 섬 이어도에 가서 진시황(秦始皇)처럼 놀자”는 마을 남정네들 꼬임에 넘어가 어머니‧조강지처(糟糠之妻)마저 내버려둔 채 바다로 나아갔다.

 

거센 풍랑(風浪)에 동료를 모두 잃고 홀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남편은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미워도 제 서방이라고, 남편을 전복(全鰒) 등으로 몸보신시키기 위해 해녀는 물질하러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풍랑에 휘말려 생사(生死)의 고비에 섰다. 정신 잃고 이리저리 떠내려가던 해녀는 정말로 여도(女島) 이어도에 도착했다.

 

강제 억류되다시피 해 도민(島民)으로 인정받은 해녀는 이어도의 삶에 흠뻑 빠져 현세(現世)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녀는 신령(神靈)한 기운으로 아들도 출산했다. 하지만 이어도는 오직 여자만 살 수 있었으며 남자는 어린아이마저도 목숨 잃어야 했다. 차마 자식을 해칠 수 없었던 해녀는 아들을 바구니에 넣어 바다로 몰래 띄워 보낸 뒤 추방됐다.

 

탐라로 돌아오게 된 해녀는 그제야 현실에 눈 뜨고 남편 찾아 애타게 부르짖었으나 집에는 낯선 노파(老婆)만이 있었다. 남편 이름을 대며 어디 갔냐고 묻자 돌아온 노파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그 분은 우리 시댁(媤宅) 쪽 증조부(曾祖父)이신데” 충격에 실성(失性)한 채 바닷가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흐느끼던 해녀는 먼지가 돼 산산이 흩어졌다.

 

대소 전략문서 통째 유출한 앨저 히스

 

현대 들어 공산주의 간첩들은 나라 팔아먹는 제 죄악을 숨기고서 도리어 선량한 국민들을 몽상가(夢想家)로 몰아붙이곤 한다.

 

앨저 히스(Alger Hiss‧생몰연도 1904~1996)는 하버드(Harvard)대를 졸업하고서 국무부 차관보 특별보좌관, 국무부 극동(極東)국장 보좌관, 국무부 특별정치사무국 국장 등을 역임한 미국 정치인이다.

 

히스는 얄타(Yalta)회담 당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을 바로 옆에서 수행(隨行)하는 등 루즈벨트의 각별한 신임을 얻기도 했다. 루즈벨트는 그를 두고 ‘변호사 중의 변호사’로 칭할 정도로 총애했다. 히스는 임시 사무총장으로서 유엔(UN) 창설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수려한 외모‧언변으로 대중(大衆)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얻었다.

 

당초 엘리트코스를 밟던 히스의 삶은 1929년 한 여자와 결혼하면서 180도 달라졌다. 예술사가(藝術史家)이자 아이 딸린 이혼녀였던 프리실라 홉슨(Priscilla Hobson)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지속 주입했다. 결국 조국을 혐오하게 된 히스는 변호사단체 국제법률가협회에 가입해 미국공산당 당원 리 프레스먼(Lee Pressman)과 만났다.

 

히스는 1933년 농업조정국(AAA) 법률자문관이 돼 농무부 자문관 해롤드 웨어(Harold Ware)와 정기적으로 접촉하면서 이념공부 모임에 참여했다. 마찬가지로 미국공산당 당원이었던 웨어는 히스를 포함해 그렇게 형성한 인맥(人脈)을 ‘소련을 위한 간첩망’으로 발전시켰다.

 

해당 지하조직은 국무부에서 일하게 된 히스에게 각종 기밀정보를 캐낼 것을 지시했다. 히스가 공직생활 동안 소련에 넘긴 정보는 그가 직접 관리하던 미국의 대소(對蘇) 전략집 ‘블랙북(Black book)’ 등이었다. 즉 미국의 ‘소련 요리 레시피(Recipe‧요리서)’가 누구도 의심치 않던 미 행정부 최고위관계자에 의해 통째로 소련에 유출된 것이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냄새를 맡은 건 1946년 무렵이었다. 전해인 1945년 워싱턴의 소련간첩망 책임자 엘리자베스 벤틀리(Elizabeth Bentley)가 공산주의자들 ‘내로남불’에 지쳐 자발적으로 전향(轉向)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가 FBI에 제출한 미국 내 간첩리스트에는 히스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수사가 시작되자 앞서 1937년 전향해 타임지(TIME) 기자로 일하던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도 본격적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전신(前身) 내무인민위원회(NKVD) 출신으로서 미국에 망명한 ‘암호명 발터 크리비츠키(Walter Krivitskiy)’도 “NKVD 핵심요원(히스)이 미 국무부 고위층에 침투한 상태고 이와 별개로 31명의 소련 정예요원들이 미 행정부 요소요소에 숨어 있다”고 증언했다.

 

1947년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은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을 통해 반공(反共)노선을 천명했다. 비미(非美)활동위원회(HCUA)는 1948년 벤틀리‧체임버스를 소환조사했다. 이 자리에서 체임버스는 “히스는 국무부 기밀문서들을 누출한 소련간첩”이라고 폭로했다.

 

민중영웅 된 간첩

 

수사망이 옥죄어옴에도 히스는 뻔뻔했다. ‘케임브리지 5인조(Cambridge Five)’의 경우 정체가 탄로 나거나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그나마 소련으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히스는 마치 오늘날의 ‘강남좌파’처럼 자본주의 단물은 단물대로 빨아먹으면서 끝까지 제 혐의를 부인했다.

 

히스는 “휘태커 체임버스가 도대체 누구냐”고 태연히 반문(反問)하며 공개소명 자리를 요구했다. 히스‧체임버스 관계는 1948년 8월 HCUA 청문회에서의 두 사람 진술대조 끝에 사실로 드러났다. 히스는 대질(對質)신문에서 “내가 알던 사람과 (체임버스가)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열 받은 체임버스의 “당신은 공산주의자” 발언을 트집 잡아 체임버스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급기야 체임버스는 국무부 기밀문서들을 필사(筆寫)해 자신에게 전달된 히스 자필(自筆)메모, 히스의 아내 프리실라가 타이핑한 문서 등을 촬영해 호박 속에 숨겨뒀던 마이크로필름 등 물증(物證)도 제시했다. 미 의회는 간첩죄 공소시효(公訴時效)가 이미 소멸된 점을 감안해 히스를 위증죄(僞證罪)로 고발했다.

 

외모‧언변 등을 앞세워 여전히 혐의를 부인한 히스는 기소를 피해갔다. 히스는 1952년 출간된 체임버스 회고록 ‘증언(Whitness)’에 맞서 1957년 ‘여론의 법정에서(In the court of public opinion)’를 펴냈다. 그는 줄곧 “나는 매카시즘(McCarthyism)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집요한 행태에 심지어 아내마저 질릴 정도였지만 히스는 꿋꿋했다. 히스가 ‘명예회복 운동’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체임버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형(典型)적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히스의 이러한 행태에 의외로 많은 지식인‧대중은 동조했다. 특히 전미(全美)가 ‘히피(Hippie) 천국’이 되는 1960년대가 되면서 히스는 ‘구(舊)시대에 맞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히스는 대학가의 단골연사(演士)가 됐다. 지급이 막혔던 연금도 일시불로 받으면서 생활이 폈다. 1974년에는 HCUA를 주도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하야(下野)했다. 이듬해 히스는 변호사 자격이 회복됐다. 분명 어떤 게 진짜고 가짜인지 뚜렷함에도 어떤 게 진실인지 혼란이 야기되는 호접지몽 상태가 빚어졌다. 소련은 박수쳤다.

 

영광(榮光)은 길지 않았다. 냉전(Cold War) 말기 동구권(東歐圈)이 속속 무너지면서 각종 문서들이 기밀해제되기 시작했다. 헝가리 비밀경찰 파일에선 “1935년 여름 히스가 나를 소련간첩으로 포섭하려 했다”는 미 국무부 직원 발언이 발견됐다. 심지어 1985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 출신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Oleg Gordievsky)도 1991년 저서에서 “히스가 1930년대뿐만 아니라 1940년대에도 소련을 위한 첩보행위를 했다”고 폭로했다.

 

그럼에도 히스 동조여론은 여전했다. 히스가 1996년 11월15일 노환(老患)으로 사망하자 미 ABC는 “KGB 문서는 히스의 무죄를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 모 매체도 “앨저 히스가 지병(持病)으로 사망했다”고 전하며 ‘매카시즘의 대표적 희생자’로 표현했다. 다행인 점은, 지금도 히스 간첩 진위여부는 ‘호접지몽’ 상태이긴 하지만 “그는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여론이 대세(大勢)로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실수사 앞 당당한 대북송금 핵심용의자

 

정치권 고위인사 A씨에 대한 ‘대북(對北)송금’ 의혹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증언이 나왔다. 과거 한 지자체 근무 당시 해당 인사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인물 B씨가 “‘S그룹의 대북사업 거액지원’을 A씨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B씨는 그간 “A씨는 S그룹 대북송금과 관련 없다”고 주장해왔다.

 

A씨 측 입장은 여전하다. 그는 ‘나는 검찰 독재정권 피해자’ ‘나는 구시대에 맞서는 영웅’ 등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혐의를 완강히 부인 중이다. 심지어 전직 S그룹 최고위관계자마저 A씨 혐의를 입증하는 듯한 증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A씨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호접지몽 혼란작전’을 노리는 듯한 이러한 수법에 많은 국민은 혼돈에 빠졌다. 근래 발표된 한 여론조사 등 각종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에서 A씨는 ‘1위’를 달리고 있다(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A씨를 비판하는 유권자들은 A씨 강성지지층 등에 의해 인격모독(人格冒瀆)적 비방에 시달리며 도리어 몽상가로 내몰리고 있다.

 

히스의 농간(弄奸)으로 인해 미국은 수십년 간 적성국(敵性國) 노리개가 돼야 했다. 어떤 게 진짜고 가짜인지 뚜렷함에도 어떤 게 진실인지 혼란이 야기되는 호접지몽 사태를 늦게나마 수습한 건 확고하고 수많은 증언‧증거 등등이었다.

 

지금의 북한은 당장 쳐들어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대남(對南)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A씨를 포함한 간첩 용의자‧피의자 등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당국은 철저하고 완벽한 수사를 통해 이 땅의 히스를 철저히 엄단(嚴斷)함으로써 혼란을 다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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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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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7.21

    당장 눈앞에 돈 몇푼 쥐어주는거에 눈멀어서 아무도 관심이없습니다. ㅋㅋ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7.21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의 저력을 믿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