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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조영기와 산본오십육의 차이

오주한

‘경험’ 앞 말아먹은 히데키와 혜안 발휘 이소로쿠

여론조사 결과에 ‘우물 안 히데키’ 재현 여부 시선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동조영기)는 잘 알려졌다시피 일제(日帝) 육군대장 및 40대 내각총리대신 등을 지낸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산본오십육)는 동시대에 활동한 일본 해군대장이다.

 

두 사람은 성격 등에서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출생년도 1884년으로 같다. 그러나 히데키와 이소로쿠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즉 ‘경험’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 정치권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본 칼럼은 일제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닌 순수하게 역사적 관점에서 교훈을 반추(反芻)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린다. 필자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한다. 자칭 진보 측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필자는 비판을 돈벌이 등에 이용하는 대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혹 불편하신 분이 계실 수 있기에 예나 지금이나 일본, 특히 일제를 주제로 하는 칼럼작성이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불쾌하신 분이 계시다면 심심(甚深)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백 번 듣기만 한 히데키

 

도조 히데키는 제국의 심장부인 도쿄부(東京府‧지금의 도쿄도 일대)에서 육군 중장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히데키는 190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소위로 임관(任官)했다. 1915년에는 당시 장교에게 있어서 필수 엘리트코스인 육군대학교(육대)를 졸업했다.

 

육대 성적은 매우 나빴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일제 내에서는 중국의 꽌시(关系)와 비슷한 문화가 있었다. 출세에 있어서 능력본위(能力本位)보다는 연고주의(緣故主義) 등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오랜 기간 봉건체제였기에 더욱 그랬다. 각지 번(藩)들은 중앙의 막부(幕府)와 주종(主從)계약을 맺고서 번마다 자신들만의 닫힌 사회를 구축했다. 조슈(長州)‧사쓰마(薩摩)번은 1868~1869년 에도(江戶)막부에 대항해 보신(戊辰)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대화가 골자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도 이러한 끼리끼리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육‧해군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정도로 상호견제했다. 황도파(皇道派‧전제군주파)는 통제파(統制派‧입헌군주파) 등에 대항해 쿠데타에 착수했다가 실패했다. 육군 내에서도 육대‧비(非)육대를 가르는 풍토가 만연했다. 때문에 육대 출신이자 통제파였던 히데키는 계파 선배들 입김이 센 군부(軍部) 내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수뇌부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우물 안 개구리’도 속출했다. 히데키는 훗날 관동군(關東軍) 헌병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육군차관, 육군대신(大臣), 급기야 내각총리대신에까지 올랐지만 안목은 대단히 좁았다.

 

세 명의 졸장을 일컫는 이른바 삼대오물(三大汚物)도 히데키에 의해 중용됐다.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보급난에 굶주리는 휘하들에게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다”며 풀이나 뜯어먹으라는 희대의 명언(!)도 남겼다. 일본군 장성으로서 그 누구보다 일본군을 때려잡는데 능했던 렌야는 농담조로 ‘음지의 광복군‧독립운동가’라는 별칭도 얻고 있다. 뉴기니(New Guinea) 등지에서 동료들이 굶어죽는 걸 지켜봤던 오쿠자키 겐조(奥崎謙三)는 훗날 천황 히로히토(裕仁)에 대한 쇠구슬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히데키는 특히 외교적‧대국(大局)적 안목이 크게 좁았다. 히데키가 현역 시절 유학한 나라는 스위스, 1940년 일본과 삼국동맹(三國同盟)을 맺은 나치독일 등 목숨의 위협이 전혀 없는 ‘안전한’ 중립국‧동맹국들뿐이었다. 베를린 등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히데키가 들을 수 있었던 건 오직 ‘미국은 속 빈 강정이다’ ‘위대한 아리안(Aryan)민족과 명예 아리안인인 일본인들만 우월하다’와 같은 허위선전‧정신승리뿐이었다.

 

히데키는 벼락출세와 좁은 안목이라는 최악의 조합 앞에 ‘나르시즘(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졌다. 급기야 그는, 우리로서는 박수 칠 일이지만 일제 입장에서는,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히데키는 제국을 위한답시고 미국과의 전쟁을 전격 결정하고 삼국동맹 이듬해인 1941년 12월 진주만공습(The Attack on Pearl Harbor)을 감행했다.

 

백 번 듣기만 하고 오판한 개구리의 최후

 

항공모함 6척을 포함한 대규모 일본함대는 수천㎞를 들키지 않고 이동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에 불벼락을 안겼다. 히데키는 “그것 봐라. 역시 나는 천재야” “내 사전에 패배란 없다”고 외쳤지만 그건 철저한 오판이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미 대통령은 의회에서의 ‘치욕의 날(Day of Infamy)’ 연설에서 단호한 어조로 여야의 대일(對日)전쟁 승인을 요청했다. 의회는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하원에서 (래디컬 페미니스트이자 반전론자였던) 1명을 제외하고서 초당(超黨)적으로 전원 승인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했다. 당시 미국은 대영제국의 바통을 이어받아 신흥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경제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태평양에서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했다. 나치독일 유보트(U-boat) 등에 의해 해안선이 봉쇄된 영국인들은 미국의 소나기 같은 ‘스팸(통조림)’ 세례 앞에 환호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Withdrawal of Dunkirk)에서 무기 대부분을 상실한 수십만 영국군을 랜드리스(Lend Lease‧무기대여법)로 전원 무장시킨 것도 미국이었다. 전후(戰後)에는 오로지 미국 혼자서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유럽 각 국을 재건했다.

 

진주만에서 일격을 맞은 미국은 이를 갈면서 빛의 속도로 해군력을 복원, 나아가 증강하기 시작했다. 브루클린(Brooklyn)‧필라델피아(Philadelphia) 해군조선소 등지에선 마치 자동차나 자전거 찍어내듯 항모‧전함‧순양함‧구축함 등이 조립돼 진수됐다.

 

미국 각지 젊은이들은 일제타도를 외치며 뜨거운 열기로 자원입대했다. 당시 시대상 전시(戰時)상황에서의 남성의 군 미필(未畢)은 속된 말로 ‘남자구실 못 한다’는 소리 듣기 딱 좋았다. 게다가 상대는 ‘비겁하게’ 기습해 여자‧아이까지 해친 악마들이었다. 입영이 거부된 남성들 상당수는 치욕감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둘리틀 특공대(Doolittle Raiders)는 짧은 항모 활주로에서 육군항공기를 타고 기적적으로 이륙한 뒤 제국의 심장부 도쿄를 공습해 히데키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히데키의 나르시즘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The Battle of Midway)의 대참패로 인해 90도로 꺾였다. 일본계 미국인 출신의 아이바 토구리(본명 도구리 이쿠코‧戶栗郁子) 등 ‘도쿄로즈(Tokyo Rose)’들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LA를 일본군이 점령했다” “네 여자친구 바람났다더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필사적으로 미군 철수‧항복을 유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미군장병들은 “하루빨리 일본에 가서 도쿄로즈를 구경해야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윌리엄 홀시(William Halsey) 해군제독은 “일본군이 미 항모 등 수십척을 격파했다”는 도쿄로즈 거짓방송에 “그 함대는 지금 인양돼 적진을 향해 후퇴 중”이라며 재치 있게 맞받아쳤다. 홀시 제독은 전쟁계획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일본군을 죽이고, 또 죽이고, 더 죽이는 것(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미 육군항공대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은 “일본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놓겠다”고 별렀다.

 

‘우물 안 히데키’의 무능에 힘입어 일제는 결국 패망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広島)‧나가사키(長崎)원폭은 태평양전쟁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잘못된 리더 선택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은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지배 아래 1945~1952년 사실상의 미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을 ‘가이진 쇼군(外人將軍‧외국인 정이대장군)’으로 떠받들었다. 쇼군은 막부의 최고지도자를 뜻한다.

 

백 번 보고, 생각하고, 행했던 이소로쿠

 

일본군에 마냥 졸장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상술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히데키와는 정반대로 태평양전쟁 이전에 ‘잠재적 적대국’ 미국 등에 유학한 적 있었다.

 

흔히 태평양전쟁 이전의 미일(美日)관계를 동맹관계라고 생각하지만 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일(中日)전쟁에서 석유 등이 필요했던 일본은 필리핀 등 남방(南方)자원지대를 노렸다. 그런데 필리핀은 미국의 최우방국 중 하나였다. 미국은 미국대로 일본에 금수조치를 취하는 한편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때부터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원조했다.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 등 미국 의용군(을 가장한 정규군)도 중국 내에서 암약했다. 때문에 일본 내 반미(反美)감정은 상당했다.

 

사실 히데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배경에도 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이소로쿠 등도 동의했다. 둘의 차이점은 나르시즘에 젖은 히데키는 지지율 올리느라 ‘일단 저질러놓으면 어떻게든 이기겠지’라는 식이었고, 이소로쿠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은 필패(必敗)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결사반대했던 이소로쿠는 태평양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절감하자 “내가 개전(開戰) 초 몇 달 동안은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장담 못 하겠다”고 했다. ‘우물 밖 이소로쿠’는 미국 유(有)경험자로서 북미대륙의 엄청난 경제력‧생산력‧군사력·브레인파워 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래를 정확히 내다본 건 이소로쿠였다.

 

미국도 이러한 이소로쿠를 최대위협으로 여기고 끝내 제거했다. 반면 졸장 히데키는 전범재판(戰犯裁判‧극동국제군사재판) 때까지 멀쩡히 살아남아 ‘권총자살 쇼’를 일으키는 등 온갖 민폐를 끼치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은 군인에게 있어서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이오지마(硫黃島‧유황도)전투를 지휘한 일본 육군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도 이소로쿠와 같은 케이스였다. 육대를 우등으로 수료한 다다미치 또한 미국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武官)으로 근무한 적 있었다. 미국의 국력을 체감한 그는 “대미(對美) 전쟁은 절망적이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직(閑職)을 떠돌던 다다미치는 일본 패망 직전의 이오지마전투에 희생양 격으로 투입됐다. 그는 여타 일본군 장성들과 달리 반자이(万歳‧자살)돌격을 엄금해 쓸데없는 병력손실을 줄이는 한편 미 해병대를 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상당한 타격을 줬다.

 

최근 여야별‧여야총합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결과가 나왔다. 종합조사에서 한 초선(初選) 국회의원이 1위에 올랐고 한 정부부처 장관으로서 정계에 첫 입문한 인물이 2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국민의힘에선 해당 장관이 선두를 달렸다.

 

이를 두고 환호의 목소리도 일각에서 있다. 반대로 ‘우물 밖 이소로쿠’ 등을 제치고 권좌에 욕심냈다가 시원하게 국정(國政)을 말아먹고 그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목숨 잃은 ‘우물 안 히데키’를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은 경험이 일천(日淺)한 지도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며, 백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행함만보다 못하다” 이번 여론조사 결과가 많은 걸 생각나게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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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email protected]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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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span class=Best" />
    오주한Best
    작성자
    2023.06.03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이번 여론조사 대상이 된 인물들 중 유일하게 많은 경험을 가지신 분만은 말씀하신 취사선택자들에서 빼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ydol7707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우물 밖을 경험하고 배워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을 해서 선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걱정이 됩니다.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6.03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이번 여론조사 대상이 된 인물들 중 유일하게 많은 경험을 가지신 분만은 말씀하신 취사선택자들에서 빼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오주한
    ydol7707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당연한 말씀입니다. 준표형님께서는 그렇지 않죠.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6.05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_-*)

  • INDEX
    2023.06.02

    우리 렌야쨩은 오물이 아닙니다. 지휘관 단신으로 수십만의 병력을 패퇴시킨 장판파의 장비와 같은 존엄이십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6.03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글쎄요. 웃자고 하시는 말씀이신지..

  • 오주한
    국가영도위원회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웃자고 하는 말 맞아요 기자님ㅋㅋㅋㅋㅋ

  • 국가영도위원회
    오주한
    작성자
    2023.06.03
    @국가영도위원회 님에게 보내는 답글

    짐작했습니다 /(-_-*)

  • 국가영도위원회
    오주한
    작성자
    2023.06.05
    @국가영도위원회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아 참 지금은 저 기자 아닙니다..ㅎ

  • 풀소유
    2023.06.04

    그 와중에 오늘도 고통받는 렌야챵…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6.05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업보가 오래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