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보살 화신’으로서 신라‧당나라人 한마음 계도
‘反시진핑’ 中 민간, 韓과 함께 ‘反마라’의 길 도모해야
‘K-컬쳐’의 선구자
지난 2009년 11월20일,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한중(韓中) 민간이 주목하는 행사가 열렸다. 1300년 전 대륙에서 불법(佛法)을 설파해 현지인들로부터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존경받았던 한 신라왕자 입상(立像)이 중국에서 서울 봉은사를 거쳐 고향 서라벌에 돌아온 것이었다.
주인공은 통일신라에서 당(唐)나라로 건너갔던 김교각(金喬覺‧생몰연도 서기 695~794년). 한국에서는 생소하지만 중국 현지에선 거대 대불(大佛)이 조성될 정도로 유명한 ‘K-컬쳐’의 선구자 같은 인물이다.
안후이성(安徽省) 지우화산(九華山) 입구에 있는 ‘김교각 스님 노천동상’ 높이는 무려 ‘100m’다. 중국 현지에서 김교각의 위상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중국인들은 고선지(高仙芝)는 몰라도 김교각은 안다”는 말까지도 있다고 한다. 고선지는 고구려 출신 당나라의 명장이다.
콧대 높은 시성(詩聖)마저 찬양하다
김교각의 행적은 그와 동시대 학자이자 지우화산 인근에 살았던 비관경(費冠卿)이 813년 무렵에 쓴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 이용(李庸)의 구화산지(九華山志)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김교각은 신라왕자 출신이었다고만 확인될 뿐 실명 등 구체적 신상은 알 수 없다. 입당(入唐) 시기는 719년 등으로 추정된다. 그는 대륙 곳곳을 유유자적히 누비다가 구자산(九子山‧지금의 지우화산)의 수려한 풍경을 보고 산마루의 작은 석굴에 자리 잡았다. 일설에는 서역(西域)도 방문했다고 한다.
서역은 ‘푸른 눈의 승려’ 쿠마라지바(구마라습‧鳩摩羅什‧344~413) 등의 영향으로 불교가 왕성히 연구되고 있었다. 김교각보다 몇 세대 이전 인물인 현장(玄奘‧602?~664)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서역의 여러 나라를 찾은 뒤 반야심경(般若心經)‧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등을 저술했다. 대당서역기는 훗날 한중일 모두에서 대히트한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바탕이 됐다.
홀로 수십년 간 수행하던 김교각의 명성은 757년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그를 만난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에 의해 퍼졌다. 김교각은 자신의 설법(說法)에 크게 감동받은 제갈절의 간청으로 종종 하산해 마을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현지 거부(巨富)였던 민양화(閔讓和) 부자(父子)는 거금을 출자해 지우화산에 화성사(化城寺)라는 절까지 지었다. 김교각의 이름은 콧대 높은 대륙인들은 물론 천리만리 신라인들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많은 당나라인‧신라인들이 지우화산을 찾았으며 나란히 앉아 불문(佛門)에 귀의했다. 김교각은 황립도(黃粒稻)라는 신라 벼종자를 가져와 당나라인들에게 농사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인의 존경을 받던 김교각은 794년 돌연 제자들을 불러 작별을 고했다. 비관경 등은 김교각이 참선 중 세랍(世臘) 99세로 열반(涅槃)에 들자 산이 울고 절벽이 무너지며 종소리가 요란하고 새들이 비통히 울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김교각의 입적(入寂)이 당나라인들에게 그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자(信者)들이 김교각의 시신을 석함(石函)에 안치한지 3년 후 보니 얼굴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고 손은 부드러우며 뼈마디마다 소리가 나 마치 금쇠(金鐵)를 흔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김교각의 육신을 등신불(等身佛)로 만들어 석탑에 모셨으며 육신전(肉身殿)을 세워 이를 보호했다.
이후 지우화산은 중국 4대 불교명산 중 하나가 돼 13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김교각의 성지(聖地)로 보존되고 있다. 나머지 3개 산은 쓰촨성(四川省)의 어메이산(峨眉山), 저장성(浙江省)의 푸투오산(普陀山), 산시성(陝西省)의 우타이산(五臺山)이다. 4대 명산 중 오직 지우화산만이 실존인물이자 외국인이었던 김교각을 보살로 모신다는 점에서 김교각의 존재감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시성(詩聖) 이태백(李太白‧701~762)도 김교각을 만난 뒤 그를 위한 작품을 여럿 남겼다고 한다.
김교각, 오늘날에도 韓中 민간 가교 역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 등을 일삼는 시진핑(習近平) 폭주 하에 국가차원의 한중관계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다. 다만 민간‧지자체에선 여전히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이달 중순에는 수십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대구‧군위 관광지 팸투어에 나섰다. 최근 서울시는 중국 저장성 정부와 코로나 이후 첫 관광교류 행사를 가졌다. 김교각은 우리나라 상당수 지자체들의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 특히 불교신자 유치 발판이 되고 있다.
도박‧종교 등을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했던 중국공산당이 유이(有二)하게 금지에 실패한 게 마작, 그리고 불교라는 말도 있다. 중공(中共) 내에서 “마작‧불교를 막았다간 천안문사태는 우습게 보일 정도의 폭동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는 설도 있다. 중국 내 불교신자 규모 통계는 없지만 2010년대 초중반 기준으로 약 2억명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5년 5월 우리나라 한 매체는 현지르포 등을 통해 “직장사표까지 내고 출가할 정도로 중국 내 불교신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재 적잖은 중국인들 사이에선 반(反)시진핑 정서가 팽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에는 수많은 사람이 백지(白紙) 들고 거리로 나와 제로코로나(Zero-COVID) 반대시위를 벌이다 공안(公安‧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제로코로나는 독재자 시진핑의 코로나방역 실패 등을 감추기 위해 자국민들의 자유를 희생시키려는 목적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어질고 현명한 지장보살은 악도(惡道)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들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불(成佛)하기 전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지장보살과는 정반대인 마라(魔羅)의 행보로 내외에서 손가락질 받고 있는 시진핑을 지켜보며, 불기(佛紀) 2567년 석가탄신일을 맞아 1300년 전 김교각의 불당(佛堂)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중 민간이 하나 돼 현존하는 마라와 맞서 싸울 수 있게 되길 고대해본다.
무역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세계평화에 이바지 할수 있겠군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해의 합치는 분쟁을 억제합니다. 정치적 압박에서 자유로운 문화와 종교의 교류도 가치가 있는것 같습니다
중국이란 저 무거운 짐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기에.. 당장의 가시적 효과보단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투자 성격으로 해볼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 번 끄적여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