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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수양제’ 시진핑에게 보내는 편지

오주한

조명관계, 4군6진‧반청복명 등 상호존중 있었기에 가능

‘北 스폰서’ 中의 원차이나 요구는 견성(犬聲)일 뿐

 

단호히 고토(故土)수복 나선 세종대왕

 

조선의 4대 국왕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祹‧생몰연도 서기 1397~1450년)를 두고 흔히 어질고 착한 임금이었다고만 평가한다. 하지만 세종이 4군6진(四郡六鎭) 등을 개척한 정복군주였다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동북아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명(明)나라는 몽골족의 원(元)나라를 이제 막 중원에서 몰아낸 탓에 안팎이 완전히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다. 조선도 고려를 거꾸러뜨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여파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만주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었다. 뚜렷하게 어느 나라의 영향력이 행사되지 않았으며 고만고만한 여러 여진족 부족들이 올망졸망 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세종은 이때가 국경을 확장할 절호의 찬스라고 여겼다.

 

세종은 고토(故土)수복을 명분 삼았다. 조선의 국호(國號)부터가 만주, 한반도 북부 등지에 위치했던 고조선(古朝鮮) 승계 의미였기에 문제될 소지는 없었다. 고조선의 정식국명은 조선이었으며 이씨(李氏)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후대 학자들이 ‘옛 고’를 붙인 것이었다. 상당수 여진족 부락 또한 고구려·고려·조선 등 역대 한민족 왕조를 섬겨온 터였다.

 

세종은 1432년 여진족 건주위(建州衛)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여연진(閭延郡‧지금의 북한 자강도 중강군 일대) 침입을 이유로 최윤덕(崔潤德) 등에게 대군을 주어 4군 개척에 나서도록 했다. 이로 인해 머잖아 여연‧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4개 군은 조선영토로 편입됐다.

 

세종은 내친 김에 6진 개척에도 나섰다. 1433년 건주여진 오도리(斡朶里) 만호부(萬戶府)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童猛哥帖木兒)가 경쟁부족 공격에 사망하고 그 부족이 패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도층을 잃고 상을 당한 먼터무 부락에서 곡소리가 퍼지자 세종은 기다렸다는 듯 김종서(金宗瑞)에게 북벌을 명했다. 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의 진화타겁(趁火打劫‧불 난 집을 덮친다) 등에 따른 것이었다. 세종이 마냥 심성 착한 군주인줄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겐 의외의 강단 있고 모진 면모다.

 

조선 국토수복 인정한 明…조선, 明 국토수복 지지로 화답

 

세종 등의 노력 덕분에 한반도는 압록강‧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국경선을 확립할 수 있었다. 문제는 먼터무 등이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은 명나라 신하였다는 점이다. 먼터무는 앞서 명 조정으로부터 동씨(童氏) 성과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 등의 벼슬을 받았다. 4군 개척 과정에서 달아난 이만주도 머잖아 명의 신하가 됐다.

 

상당수 역대 중국 왕조는 여수(麗隋)전쟁‧나당(羅唐)전쟁처럼 끊임없이 만주‧한반도를 노려왔다. 초기의 조명(朝明)관계도 이성계‧정도전(鄭道傳)이 요동(遼東)정벌에 착수할 정도로 나빴다. 게다가 먼터무‧이만주 등은 명의 관리였기에 명나라로선 충분히 4군6진을 자국 영토라고 우길 수 있었다. 조선의 고토수복에 명 조정이 시비 걸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었다. 중국은 홍콩 같은 작은 땅도 기어이 돌려받을 정도로 땅에 집착하는 면이 강하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조정은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각오했다.

 

그러나 명나라 5대 황제였던 선덕제(宣德帝) 주첨기(宣德帝)는 의외로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도리어 조선 두부를 맛본 뒤 맛있다고 극찬하면서 북경(北京)을 찾은 사신에게 큰 상을 내리고 노고를 위로하는 등 조선과의 관계강화에 나름 애썼다.

 

이후 조명관계는 우방(友邦)으로서 굳어졌다. 명나라는 1592년 일본의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壬辰倭亂)‧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키자, 왜군을 조선 땅에서 막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여송(李如松)을 필두로 수십만 지원군을 조선에 파병하기도 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종지부를 찍은 히데요시는 열도는 천황(天皇)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륙을 정복해 천자(天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었다고 한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기근이 들자 쌀 100만석도 원조했다. 때문에 파병‧원조 주역인 만력제(萬曆帝) 주익균(朱翊鈞)은 자국인들로부터 ‘고려천자’라고 비난받기도 했다.

 

명나라는 조선 파병‧원조 등이 원인이 돼 국력이 크게 기울어져 훗날 만주족(여진족)의 청(靑)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조선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는 진리에 따라 17세기 중후반 명청(明靑)교체기에서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명나라의 반청복명(反淸復明‧청을 몰아내고 국토를 수복한다)을 지지했다.

 

흔히 조명관계를 사대(事大)관계라곤 하지만 상호존중 관계였다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실제로 조선 조정으로부터 임진왜란 지원요청을 받은 명 조정은 “수양제(隋煬帝)‧당고종(唐高宗)‧당태종(唐太宗)의 백만대군도 막아낸 게 조선인들 아닌가. 실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우리 군대를 자기들 안방에 끌어들여 포위‧섬멸하려는 것 아니냐”며 처음엔 조선 패전 소식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조선을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받는 게 있어야 주는 것도 있다”

 

시진핑(習近平) 1인 독재체제 하의 중국의 한국 내정간섭이 도를 넘고 있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는 2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은 한중(韓中)수교의 기초다. (한국이) 이를 튼튼히 다지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대만에 대한 한국 측 입장정리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고 한다.

 

국제관계에선 주고 받는 게 불변(不變)의 진리다. 북한 스폰서를 자처하는 중국이 원차이나(One China)만을 한국에게 강요하는 건 ‘견성(犬聲)’에 지나지 않다. 이달 초 부산 주재 중국총영사와 만난 홍준표 대구시장은 ‘하나의 대한민국’ ‘한국 핵무장’ 등을 중국이 지지할 때 원차이나에 대한 한국 지지 또한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총영사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반청복명 지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명나라가 먼저 조선의 4군6진 등 고토수복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조명관계 근간은 상호지지였다. 지금의 적잖은 중국인들도 허난성(河南省)‧안후이성(安徽省) 등지의 거대 대불(大佛)을 성지화하는 등 한국을 존중하고 있다. 해당 대불들은 신라 출신 승려 김교각(金喬覺)이 모티브다.

 

이미 “한국은 대대로 중국 속국(屬國)이었다”는 망언(妄言)을 쏟아낸 바 있는 시진핑 주석은 반대로 혼군(昏君) 수양제 등의 전철을 정녕 밟으려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민족은 언제고 사대관계에 나선 바 없다. “한국은 작은 산봉우리”라던 주장은 발언자 개인의 착각일 뿐이다. 지금 한중관계에서 필요한 건 조명관계와 같은 상호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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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email protected]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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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5.26

    역사를 클레임으로 활용하는순간 사학은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정치와 이권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역사학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합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5.26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일본 정치인들 필독서 중 하나가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이라고 합니다. 많은 한국 정치인들도 열국지, 대망 등을 읽고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과거와 현재의 대화입니다.

  • 오주한
    INDEX
    2023.05.26
    @오주한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전적으로 옳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연장선인 현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본없는 이 드라마가 정말 신선하고 재밌습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5.26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저도 부지런히 쓰면서 많이 배우고 또 새로운 깨달음들에 감탄하곤 합니다. 감사합니다.

  • ydol7707

    불편한 진실을 말하자면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의 은을 강탈했고, 명군은 조선땅에서 횡포를 부려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중국역사는 중공을 포함해서 제대로 도움을 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5.27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물론 불미스런 일이 적잖이 있긴 했습니다만,

     

    좌파들이 노근리사건 등을 부각시키며 미국의 6.25 파병 전체를 폄훼하듯,

     

    명군의 횡포를 들어 만력의 양대왜란 파병 전체를 문제시하는 건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소견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역사상 중국 횡포도 상당했습니다만, 양대왜란만 놓고 보면 조명 간 협력이 없었더라면 조선백성들이 어떻게 됐을진 알 수 없으니까요.

     

    본 칼럼은 중국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아닌, 수양제처럼 남의 나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시진핑이 '고려천자' 등을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임을 말씀드립니다.

  • 풀소유

    '외교의 기본은 상호존중이다.'

    늘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