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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용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오주한

희송, 현자 통해 치세…희호, 현자 내치다 공화 자초

공화주의 핵심은 다수(多數)…제2의 소목공 인정해야

 

공화정의 기본은 ‘수용’

 

공화제(共和制)는 다수의 주권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다. 반대개념은 군주제(君主制)다. 대한민국을 포함해 오늘날 지구촌 대다수 국가가 채택 중인 공화제에서 국가원수‧정부수반(首班)은 국민투표로 선출된다. 치자(治者)는 국민 뜻을 받들고 국민을 설득하는 한편 현자(賢者)의 교훈을 발판 삼아 통치해야 한다. 이에 실패한, 다시 말해 지지율 제고에 실패한 치자는 레임덕(Lame duck‧권력누수) 앞에 민심의 철퇴를 맞고 만다.

 

리퍼블리커니즘(Republicanism)을 번역한 단어가 ‘공화’다. 그런데 이 단어가 수천년 전 고대 봉건왕조 주(周)나라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중세~근세에는 마테오 리치(이마두‧利瑪竇‧생몰연도 1552~1610년)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동방을 찾았다. 이들은 이국(異國)의 선진적 정치체제에 찬탄하고 과거(科擧)시험 등 여러 제도를 끝내 유럽에 도입했다. 귀족 혈통세습이 보편적이었던 서양과 달리 동양은 서기 6세기 수(隋)나라 때부터 이미 과거제도를 통해 입조(入朝)의 문호(門戶)를 일반백성에게도 개방하고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비록 서양의 리퍼블릭과 주나라의 공화가 완전히 동일한 의미는 아니지만, 동양은 단순히 서구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걸 넘어 리퍼블릭이라는 이념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둘 모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공단 중용해 치세 이룬 주성왕 희송

 

현대 사학계 연구 등에 의하면 주나라는, 물론 여러 이견이 있지만, 기원전 11세기 무렵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서쪽에서 이주해온 희성(姬姓) 일족이 일으켜 세운 작은 나라로서 상(商‧또는 은)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

 

말기의 상나라는 차마 표현하기 끔직한 인신공양(人身供養) 등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이에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여러 제후를 규합해 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주나라는 일개 제후국에서 종주국의 지위에 올랐다. 상제(上帝)를 모시던 상나라와 달리 천손(天孫)사상을 도입한 것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과정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등장한 것도 주나라 때다.

 

초기 주나라의 정국(政局)은 불안정했다. 희발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 희송(姬誦)이 새로운 천자(天子)로 등극했다. 자연히 여러 제후들은 젖먹이 임금을 얕봤다. 특히 상나라 왕실후예로서 송(宋)나라를 봉토로 받은 무경(武庚)이 그러했다. 희발은 막대한 머릿수를 가졌으며 이젠 주나라 백성이 된 상나라 유민(流民)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나라를 완전히 멸하는 대신 종묘(宗廟)보존을 허락한 터였다. 중앙집권제와 달리 봉건제에서의 제후들은 외교권 등 일부의 제약만 있었을 뿐 작위세습‧자치권 등 무수한 권한이 허용됐다.

 

섭정(攝政)을 맡게 된 희발의 동생이자 희송의 숙부인 주공단(周公旦) 희단(姬旦)은 위기를 슬기롭게 타파했다. 희단은 무경 등이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키자 직접 출정해 3년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왕위를 찬탈하는 대신 조카가 성인이 되자 자발적으로 섭정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서경(書經) 등에 의하면 장성한 희송은 숙부가 두려워 숙청하려 했지만 비밀스럽게 간직됐던 한 비서(祕書)를 읽고서 자신을 꾸짖었다. 이 비서는 “(죽음을 앞둔) 형님은 살려주시고 대신 제 목숨을 거두십시오”라는 희단의 눈물 젖은 기도문이었다. 바로 금등지사(金縢之詞)의 유래다. 학계 일각에서는 인의(仁義)가 핵심인 유교(儒敎)의 실질적 창시자를 희단으로 보기도 한다. 고대유적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한 목판화에는 어린 조카 옆에서 공손히 허리 숙이고 있는 희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소목공 등 고언에 뒤 닫다 공화시대 맞은 희호

 

희송은 선조의 가르침 아래 성군(聖君)의 길을 걸었다. 희단처럼 사리사욕 없는 정치 추구, 즉 민본(民本)도 가르침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그렇지 못했다. 주나라 10대 국왕인 여왕(厲王) 희호(姬胡‧기원전 890~828년)는 국인(國人), 즉 백성의 살림터였던 산림천택(山林川澤‧산과 숲과 내와 못) 독점을 전격선언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이었다. 산림천택에는 땔감 삼을 나무가 있고, 가족과 나눠먹을 산짐승‧물고기가 있으며, 목을 축이고 논밭을 적실 하천 등이 있다. 수천년 후에 세워진 조선왕조도 왕실재정을 맡아보던 내수사(內需司)의 산림천택 점유로 몸살 앓았다. 하지만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유성룡‧1542~1607) 등의 강력한 고언(苦言) 앞에 여민공지(與民共之‧민관협력)를 추구함으로써 백성과의 상생을 도모했다. 맹자(孟子)는 “땅의 주권이 비록 임금에게 있다 해도 토지 이용권리를 백성과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희호는 융통성이 없었다. 간신배 영이공(榮夷公)을 중용한 그는 척지막비기유(尺地莫非其有‧천하는 모두 임금의 소유물이다) 개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산림천택 독점을 강행했다. 자연히 냉방에서 얼어 죽고 곡식 한 톨 못 먹게 된 백성들은 크게 반발했다. 예양부(芮良夫)‧소목공(召穆公) 등 지도층도 “이런 통치를 견딜 자는 없다”고 간언(諫言)했다.

 

그러나 소귀에 경(經) 읽기였다. 지지율이 폭락하고 도처에서 악소문이 나돌았지만 희호는 희발‧희송‧희단 등 선조(先祖)의 자세를 답습하길 거부했다. 그는 늦게나마 민의(民意)를 읽고자 하는 대신 ‘마이웨이’로 일관하며 강제로 뒷담화를 막아버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법이지만 희호는 이를 몰랐다. 급기야 여러 제후들마저 입조를 거부했다. 이는 더 이상은 희호를 만인의 리더로 인정할 수 없다는 무언(無言)의 메시지였다.

 

기원전 841년 ‘희호타도’를 외치며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기록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관군(官軍)도 희호에게 등 돌린 것으로 추측된다. 민의에 눈 감고 귀 닫으며 융통성이라곤 없었던 희호는 그제야 땅을 치고 후회하며 머나먼 이국땅으로 도주했다. 이 과정에서 태자 희정(姬靜)마저 아비를 따르는 대신 소목공의 자택으로 달아나버렸다. 자식까지도 아비의 행태를 납득할 수 없어 대신 백성의 손을 들어줬던 셈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등에 의하면 주나라에는 일시적이나마 공화정(共和政)이 수립됐다. 백성을 대신해 희호에게 간언했던 백성의 대표자 격인 소목공‧주정공(周定公)은 옥좌를 비운 채 여민공지를 부활시켰다. 일설에는 마찬가지로 백성의 대표자였던 공백화(共伯和)가 천자대리(代理)로서 다스렸다고 한다.

 

진위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현대에는 대체로 전자(前者), 즉 공동통치에 무게를 싣는 성향이 강하다. 백성의 대표자들이 함께 정무(政務)를 봤다고 해서 나온 말이 바로 ‘한가지 공(共)’ ‘화합할 화(和)’ 즉 ‘공화’다. 민본을 추구했던 이들 현인들은 수년 뒤 나라가 안정되자 미련 없이 사퇴했으며 만인은 희정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선왕(宣王) 희정은, 비록 일부 실수들도 있었지만, 선대(先代)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충신‧능신(能臣)을 중용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였다. 떠나갔던 제후들도 다시금 주나라를 종주국이자 종가(宗家)로 섬겼다.

 

‘척지막비기유’의 끝 길이 어떠할지는 자명

 

전근대시기에는 원칙대로만 하면 세상만물은 모두 임금의 것이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임금에게는 감히 뇌물죄 등을 물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전쟁사(史) 전문가로 알려진 임용한 박사에 의하면 어느날 한 신하가 뇌물수수 혐의로 탄핵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유교가 국교(國敎)였던 조선에서 공직자 부패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등에 처할 중죄였다.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은 엄벌을 촉구했지만 임금은 해당 신하의 공적 등을 감안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신하가 당파(黨派)싸움의 희생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백관 몇몇은 급기야 “지금 주상(主上)께서도 공범이기에 저러시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그러자 임금은 기다렸다는 듯 “너희들 지금 내가 뇌물 받았다고 하는 거냐”고 추궁했다. 아차 한 신하들은 모두 입을 닫아버렸다. 원칙대로 하면 설사 임금이 뇌물을 받았다 해도 ‘천하 어딘가에 있던 내 것을 내가 찾아온 것’일 뿐이다. 따라서 임금에게 뇌물죄를 적용하면 이는 곧 임금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꼴이 돼 대역죄(大逆罪)가 된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원칙은 원칙대로 놔두면서도 놀라운 융통성을 발휘했다. 내수사를 설치해 국고(國庫)와 왕실 사유재산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임금이 함부로 나랏돈을 쓸 수 없도록 강제했다. 나아가 상술한대로 여민공지 정책을 실시해 백성 누구나 산림천택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류성룡은 “백성 대할 때는 큰 제사 모시듯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정권교체가 1년이 지났지만 현 대통령 지지율이 좀처럼 반등(反騰)하지 못하고 고착(固着)상태다.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되지만 앞서 축적된 정치권 지혜를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가 가장 큰 배경으로 꼽힌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정상이 아니다”며 사유를 진단했다.

 

그러나 현 대통령은 ‘독불장군’이라는 이미지를 좀처럼 벗지 못하고 있다. 그 영향인지 급기야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내년 총선에서 ‘야당 다수 당선’을 원한다는 응답이 ‘여당 다수 당선’보다 높은 49%를 기록(이상 여론조사 상세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했다고 한다.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레임덕은 불가피하다는 게 중론이다.

 

공화주의의 핵심은 ‘다수(多數)’다. 이를 잊는 순간 지도자는 결코 희호 등의 운명을 비껴갈 수 없다. 전제(專制)정치를 원한다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자의 고언을 수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조선왕조는 지도자의 권위는 권위대로 내세우면서도 류성룡 등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백년 대계(大計) 근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주공단의 희송도 마찬가지다.

 

만약 정 그럴 수 없다면, 그럼에도 희호의 운명이 두렵다면, 개인적으로 감히 단언컨대, 지금도 과감히 쓴소리‧고언을 마다하지 않는 제2의 소목공에게 리더로서의 길을 자진(自進)해 열어주는 것도 생존의 큰 방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용산’은 간과해선 안 된다. 권력은 한 순간이다. 당(黨)과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건 척지막비기유가 아닌 공화주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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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email protected]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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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공통일
    2023.06.05

    공천이 끝나고 총선에서 당락이 결정되면 이 정권은 끝.. ㅎㅎ

  • 멸공통일
    오주한
    작성자
    2023.06.05
    @멸공통일 님에게 보내는 답글

    온갖 오물로 얼룩진 더불x망했당이 아닌, 양당정치 체제에서 수권 연장 가능성이 높은 한 정당의 올바르신 맏형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INDEX
    2023.06.06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거기 때문에 결과는 대선에서 정해져 버렸읍니다. 모두 기도합시다. 이 상자에서 좋은패가 나오길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6.06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부디 잘 풀려나가길 빌 뿐입니다.

  • 풀소유
    2023.06.06

    대통령이 된 것도 아닌데 손바닥에 王자부터 쓰는 것 보고 불통 독불장군은 예상했습니다.

    총선 후 이 나라가 괴연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됩니다.

  • 풀소유
    오주한
    작성자
    2023.06.06
    @풀소유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저 또한 근심이 사라지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