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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더불어의 대선배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아무리 구폐지부 한들 화무십일홍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29권 명종18년(1563년) 6월25일 신미(辛未) 두 번째 기사(記事)에는 다음과 같은 인사이동이 실려 있다.

 

이감(李戡)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오상(吳祥)을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홍천민(洪天民)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목첨(睦詹)을 병조참지(兵曹參知)로, 김백균(金百鈞)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으로, 윤의중(尹毅中)을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박계현(朴啓賢)을 좌승지(左承旨)로, 한옥(韓沃)을 우승지(右承旨)로, 강사필(姜士弼)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이영(李翎)을 사헌부 집의(執義)로, 권순(權純)과 황삼성(黃三省)을 장령(掌令)으로, 최옹(崔顒)과 윤지형(尹之亨)을 지평(持平)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재미난 건 몇몇 인물들에 대한 품평(品評)이 주석처럼 달려 있다는 점이다. 실록을 쓴 사관(史官)들은 가령 윤의중에 대해선 “성품이 온순하고 단아하여 사람들이 모두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혹평도 있다. 사관들은 권순‧황삼성을 두고선 “성품이 본래 사납고 권세에 아부하여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고 깎아내렸다. 이영에 대해선 “이량(李樑)에게 추종해 붙어서 현달(顯達)한 직임에 등용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량은 조선 중기의 왕족(王族)이자 외척(外戚)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품평은 이감에 대한 것이다. 사관들은 이감이 아부의 달인이라고 비판함은 물론 왜 그러한지 ‘사례’까지 상세히 적어 놨다. “이량과 손님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이감도 참석했다. 이량의 기첩(妓妾)이 밖에서 들어오자 이감은 후다닥 뜰로 내려가 절하며 맞이했다. 사람들은 이감을 (조선의) 조사역(趙師睪)으로 지목했다”

 

즉 이감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대감어른의 ‘애첩’에게 엎드리면서까지 권력자에게 꼬리 쳤던 것이다. 이감은 원래는 윤원형(尹元衡) 등과 결탁해 조선 중기 조정을 주도한 사림파(士林派)를 공격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명종이 점차 윤원형 견제 목적으로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인 이량을 지원하자 재깍 이량으로 환승해 저러한 추태를 보인 것이었다.

 

당시 모임은 국정(國政)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적절한 장소‧시기가 아닌데도 권력자의 사모님 앞에 저 혼자 쪼르르 달려가 넙죽 엎드려 개처럼 구르는 등 필요 이상으로 예를 갖추고 아양 떠는 건 지금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을 작태다. 허나 효과는 주효(奏效)했는지 이감은 무려 만조백관(滿朝百官) 감찰을 맡는 사헌부 고위직에 발탁됐다. 이 ‘충성맨’이 제 야욕을 위해 얼마나 많은 관료들을 몰아댔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이 간신배보다 수백 년 앞서 송(宋)나라에는 이감보다 더한 위인이 있었다. 명종실록에서 이감의 비교대상이 된 조사역(생몰연도 서기 1148~1217)이 그 주인공이다.

 

송사(宋史) 조사역열전(列傳) 등에 의하면 조사역은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그가 출사(出仕)하던 무렵 가세(家勢)는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에 조사역은 당상대관(堂上大官)이 되고자 당대의 권력자 한탁주(韓侂胄)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동시에 온갖 혼이 담긴 아첨‧아부를 떨었다. 한탁주는 남송(南宋)의 대학자 주자(朱子‧주희)를 핍박한 것으로 유명한 권신이다. 얼마나 그 알랑거림 수준이 저질스러웠으면 당대 사람들은 조사역을 가리켜 거세무쌍(擧世無雙) 즉 “세상에 둘도 없다”고 비꼬았다.

 

사례도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한탁주에게는 열 네 명의 애첩이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한탁주에게 북주관(北珠冠) 네 개를 선물했다. 한탁주는 가장 총애하는 첩 넷에게만 이를 나눠줬다. 이 소식을 들은 조사역은 무릎을 탁 쳤다. 그는 그 길로 거액을 융자해 북주관 열 개를 만들어 빈손으로 툴툴거리던 한탁주의 애첩들에게 선물했다. 조사역은 그 길로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임명됐다.

 

실망하셨는가? 이건 약과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조사역은 그저 역사상의 흔한 간신1로 남았을 터였다.

 

하루는 한탁주가 궁궐 같은 제 저택에 화려한 원림(園林)을 조성한 뒤 백관들을 초청했다. 이곳저곳 구경하던 관료들 상당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원림의 어느 구역에 도달하자 그 곳은 고요한 농촌을 본 딴 고즈넉한 전원(田園)풍경이었다. 개울물 흐르는 작은 다리 옆에는 대나무 울타리가 쳐진 초가집이 있었고 근처 논에서는 황금빛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백관들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대단하십니다” 추켜세웠다.

 

헌데 한탁주는 돌연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다 좋은데 말이지. 원래 농촌은 좀 누렁이 정겹게 짖는 소리와 우렁찬 닭 울음소리가 들려야 제 맛 아니겠나? 그게 없는 게 아쉽네” 아첨쟁이들이 탄식을 하며 맞장구칠 그 때 어디선가 돌연 멍멍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화색(和色)이 돈 한탁주와 무리들은 이 개소리의 발원지가 어딘지 부지런히 찾아 헤맸다.

 

마침내 개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곳을 발견한 한탁주 이하 일동은 기절해 나자빠졌다. 그 곳에는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견공에 빙의해 논두렁 흙탕물을 데굴데굴 나뒹굴던 조사역이 있었다. 인간임을 포기한 그의 자태는 둘 도 없는 미친 개xx였다. 조사역은 이튿날 공부시랑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 겸 임안지부(臨安知府)로 초특급 승진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구폐지부(狗吠知府) 즉 ‘개소리 잘하는 장관’이라 일컬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공개석상에서 권력실세에 대한 ‘당(黨)의 아버지’ 찬사가 쏟아졌다고 한다. 여당과 많은 국민 사이에서는 시대를 역행해도 한참 역행하는 듯한 이 모습에 “아바이 수령 만세” 등 조롱과 장탄식이 이어진다. 이감은 유배(流配)로 끝내 몰락했고 아첨을 즐기던 한탁주도 사미원(史彌遠) 등 반대파에 의해 끝내 처단됐다. 참 웃기지도 않아서 더는 얘기 안 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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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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