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호해‧조고의 그것과 같은 모습에 실색
진 이세황제(秦 二世皇帝) 호해(胡亥‧생몰연도 기원전 229~기원전 207)는 통일진나라의 두 번째 황제다. 진나라 패망에 쐐기를 찍고도 숨어서 눈 가리고 아웅하다가 무참히 도륙당한 인물이다.
부소(扶蘇)‧호해 형제의 아버지 진시황(秦始皇)은 천하통일 후 자주 순행에 나섰다. 영생불멸(永生不滅)의 불로초(不老草)를 평생 찾아 헤맸으나 실패해 끝내 마지막 숙적 죽음과의 싸움에서 패한 황제는 사구(沙丘)란 곳에 이르자 지병이 악화돼 객사했다. 진시황은 임종 직전 칙서(勅書)를 내려 어질고 재주 있는 태자 부소를 제국의 이세황제로 봉했다.
진시황 사망 당시 수레 안 곁에 있었던 이는 환관 조고(趙高) 하나뿐이었다. 조고는 아둔한 호해를 새 주인으로 세워 자신이 국정을 쥐고 흔들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승상(丞相) 이사(李斯), 호해와 공모해 칙조를 날조한 뒤 멀리 북방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있던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는 사신을 보냈다. 순진하고 효자였던 부소는 대군을 이끌고 수도 함양(咸陽)으로 향하는 대신 “지하에서 부황(父皇)을 모시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해는 명실공히 제국의 새 지배자가 됐다. 그런데 그는 이사와 머리 맞대고서 건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려 애쓰는 대신 ‘나르시시즘’에 흠뻑 빠져들었다. 호해는 우선 아방궁(阿房宮) 축조 중단 및 백성 조세부담 완화를 주장한 노신(老臣) 이사를 “건방진 놈. 날 뭘로 보고 그 따위 망발을. 지금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이냐?! 통일위업의 대제국에는 그에 걸맞은 위엄이 필요하다. 백성은 버러지일 뿐이다!” 꾸짖으며 숙청해버렸다.
이후엔 “폐하의 어진 성덕(聖德) 덕분에 만백성이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고 있사옵니다” 아첨하는 조고에게 모든 국사(國事)를 일임하고서 주지육림(酒池肉林)‧육산포림(肉山脯林)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가혹한 형벌‧조세에 봉기한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반란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자연히 만조백관(滿朝百官)은 발을 동동 구르며 호해에게 직언했으나 그 때마다 예외 없이 목이 어깨에서 달아났다.
허나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여기는 절개 높은 뭇 선비들의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호해가 택한 게 ‘잠적’이었다.
호해는 “저 못된 놈들이 폐하의 춘추(春秋)가 어리심을 얕보고 저리 대들고 있습니다. 저들과 더 대면하셨다가는 약점만 보이게 되니 아예 만나지 마십시오” “자고로 성인(聖人)은 속세와는 인연을 끊는 법입니다”는 조고의 충동질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궁궐 깊숙이에 틀어 박혔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들은 조고의 손에서 처리됐다. 백관들은 나중엔 아예 호해의 얼굴 생김새마저 잊어버릴 정도가 됐다.
이는 결정적 패착이 됐다. 우선 조야(朝野)는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최고 책임자의 해명조차 듣지 못한 채 한 층 큰 분노에 휩싸였다. 자연스레 숙손통(叔孫通) 등 많은 중앙 관료‧백성들이 호해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서 패공(沛公) 유방(劉邦) 등에게 투항했다. 둘째, 호해는 측근이라 여긴 조고가 외부와 꾸미는 일을 알 도리가 없었다. 조고는 진장(秦將) 장한(章邯)이 항우(項羽)에게 백기 들고 패공의 대군이 함양으로 진격하자 패공과 밀약 맺고서 호해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고의 사위 염락(閻樂)과 창칼 든 군사들이 궁궐로 들이닥치자 호해가 내놓은 한심한 한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아무도 내게 말해주는 이가 없었단 말이냐!” 시종은 답했다. “신(臣)이 그걸 아뢰었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호해는 왕(王)이 안 된다면 열후(列侯)로, 열후가 안 된다면 일반백성으로 숨어 살겠다고 애걸했으나 모두 거절한 염락은 싸늘히 말했다. “그대가 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죽음뿐이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었고 조야와의 소통도 거절했던 호해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국민의힘 총선백서특별위원회가 총선 패배 책임이 가장 큰 전직 비상대책위원장 면담을 추진 중이다. 그런데 해당 비대위원장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도통 보이질 않고 있다. 한다는 게 도서관 노출 및 일부 인사와의 식사 등뿐이다. 대신 측근이라는 사람이 “내가 대신 특위에 답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흡사 호해‧조고의 그것과 같은 풍경에 많은 당원‧국민은 실색(失色)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또 모두를 위해서라도 공천 내막 등 모두의 궁금증에 직접 대답하는 게 옳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