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운명의 28일’ 감정으로 접근하지 말길
중항열(中行說‧생몰연도 미상)은 전한(前漢) 문제(文帝‧재위기간 기원전 180~기원전 157) 시기의 환관이었다. 부득이하게 흉노(匈奴)로 반영구히 떠나게 되자 최소한의 재기 기회마저 제 발로 차버리면서 친정에 총질 일삼은 인물이다.
사기(史記) 흉노열전(匈奴列傳) 등에 의하면 당시 북방의 유목민족 흉노는 강대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앞서 한고조(漢高祖)는 흉노의 지배자 묵돌선우(冒頓單于)와의 싸움에서 대패한 바 있었다.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됐던 한고조는 묵돌의 연지(閼支‧황후)에게 사람을 보내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한고조가 연지에게 한 말은 “내가 지면 묵돌은 한나라 미녀들을 취할 것이고 그럼 넌 뒷방에 나앉을 것이다. 묵돌을 알아서 잘 설득해라”였다.
연지는 흉노에서 두 번째로 큰 부족 출신이었다. 묵돌은 비록 한고조를 살려줬으나 매년 막대한 공물과 한나라 공주 등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묵돌이 한고조의 아내 여후(呂后)에게 사신을 보내 “서로 가진 것으로 서로 없는 것을 메워봄이 어떤가” 성희롱을 저질러도 한나라는 마땅히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수세(守勢)에 몰렸다. 이러한 기류가 문제 때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문제도 흉노를 달래기 위해 황가(皇家)의 여인을 묵돌의 아들 노상선우(老上單于)에게 시집보내게 됐다. 이 때 수행원으로 지목된 게 중항열이었다. 문명인의 시각에서 볼 때 흉노의 땅은 황량한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졸지에 재수 옴 붙게 된 중항열은 울고 불며 흉노행(行)을 거부했으나 조정은 재고를 거부했다. 북방으로 떠나게 된 중항열은 “내 반드시 한(漢)의 재앙이 되리라” 이를 갈았다.
비록 내쫓긴 처지였으나 중항열로서는 언젠가는 한나라로 복귀해 재기할 날을 꿈꾸고 기약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같은 전한 시기 인물로서 흉노로 떠났다가 억류됐던 소무(蘇武‧생몰연도 ?~기원전 60)는 고진감래(苦盡甘來) 끝에 귀국의 장도(長途)에 올라 재차 중용됐다. 그러나 중항열은 흉노에 도착하자마자 정말로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중항열은 노상을 만나자마자 한나라의 의식(衣食)을 줄일 것을 간언했다. 당시 흉노에서는 거칠고 무거운 가죽옷 대신 가볍고 화려한 비단이 대유행 중이었다. 오로지 말젖(마유‧馬乳)이 재료인 북방음식 대신 중원(中原)의 여러 산해진미(山海珍味)도 큰 인기를 끌었다. 중항열은 이러한 분위기가 유목민족 전투력의 원천인 사납고 거친 야성(野性)을 앗는다고 여겼다.
1천여년 뒤 흉노의 후예인 몽골족(蒙古族)의 원(元)나라는 중원문물에 대거 심취했다가 건국으로부터 100년도 채 안 돼 무너지고 만다. 반대로 만주족(滿洲族)의 청(淸)나라는 변발(辮髮) 등 정체성을 지킴에 따라 약 300년 간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다. 선우는 중항열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흉노의 전투력 유지에 큰 도움이 됐다.
중항열은 또 흉노에게 숫자 셈법 등을 전수했다. 흉노는 하나 둘 정도까지만 세고 그 이상은 그냥 “많다”고 퉁쳤던 듯하다. 비로소 부족 내 병력‧가축 등의 규모를 자세히 기록‧관리‧과세(課稅)할 수 있게 된 흉노의 국력은 크게 불어났다.
‘복수의 완성’은 천고마비(天高馬肥) 즉 ‘한나라 침공’이었다. 중항열은 노상을 부추겨 “진상품 수량‧질이 떨어진다”를 구실로 해서 수시로 한나라 변경(變更)을 넘게 했다. 문제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화친협정 준수를 요구했으나 노상은 앞에선 고개 끄덕이고 뒤에선 또 노략질 일삼았다. 한나라 사신이 “역시 오랑캐답게 신의(信義)가 없고 야만스럽다” 일갈(一喝)하자 ‘흉노인’ 중항열은 “우리는 그래도 너희처럼 자기 백성들 등골을 빨지는 않는다”고 응수했다. 중항열은 노상의 뒤를 이은 군신선우(軍臣單于) 시기까지도 살아남아 한나라에 칼을 들이댔다.
그러나 중항열의 친정에 대한 총질은 오히려 한나라를 자극했다. 흉노에게 빼앗기고 시달리던 한나라는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이를 갈면서 대대적 북벌(北伐)에 나섰다. 곽거병(霍去病)‧위청(衛靑) 등 명장들에게 흉노는 대패했으며 일부는 한나라에 귀순하고 일부는 서쪽으로 달아나는 등 사분오열됐다. 흉노는 이후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짐작컨대 배신자 중항열의 일가는 그 난리통에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재표결(28일)을 앞두고 집권여당이 어수선하다. 국민의힘에서 낙선‧낙천(落薦) 인사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와 의결정족수가 채워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총선 참패 책임이 있는 전직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당대표 옹립 움직임도 심상찮다. 한 순간의 감정으로 친정에 칼을 겨누면 남는 건 ‘결별’ 뿐이다. 속된 말로 집도 절도 없거나 남의 집에 얹혀 사는 신세가 되는 그 때는 후회해도 늦다. 중항열이 아닌 소무의 길을 택하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아, 당 지도부에서 본회의에 소속 의원 전원이 참석하되 모두 기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참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