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자뻑’ 무소속 출마했다 고개 숙여버린 발기
발기(發岐‧생몰연도 ?~서기 197)는 고구려(高句麗)의 8대 국왕 신대왕(新大王)의 셋째 아들이자 9대 왕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동생이다.
고국천왕은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왕위는 발기의 동생인 상산왕(山上王) 연우(延優)가 이었다. 원래는 발기가 고국천왕이라는 ‘백’을 업은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고국천왕의 부인인 왕후(王后) 우씨(于氏)는 남편이 사망하자 처음에는 발기를 찾아갔다. 그러나 발기는 형수를 그저 그렇게 대했다. 이에 우씨는 연우를 찾아갔다. 연우는 대접을 위해 직접 고기를 썰다가 제 손을 다치는 등 형수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
연우에 의해 벼락출세 가도가 막힌 발기는 매우 발끈하면서 희벌떡 일어서서 요동(遼東)으로 향했다. 고구려는 급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비대위원장은 연우였다. 고구려에서 탈당한 발기는 “두 번이나 고개 숙였는데 나를 공천취소하다니 정의의 이름으로 저 비대위원장을 용서하지 않겠어. 무소속 출마한 뒤 당선돼 복당하겠어”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꿇지 않겠어” 외치며 고구려의 텃밭 국내성(國內城)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치인들 중 그를 따라나선 이는 지위고하 막론하고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고국천왕의 유족들이 발기를 지지했다는 문헌내용도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발기가 난잡하게 그러모은 지지세력은 잡다한 이들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는 소설 삼국지(三國志)에도 등장하는 공손도(公孫度)의 3만 병마(兵馬) 즉 고구려의 적대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야심차게 무소속 출마한 발기는 단 한 번의 싸움에 깨갱하고 세 번째로 고개 숙였다. 자신이 왕이 될 관상인 줄 착각하고 스스로를 똘똘이로 과대평가하던 이 금쪽이 철부지의 야심은 꺾이고 말았다.
상산왕의 명을 받아 출병한 발기의 동생 계수(罽須)는 한줌밖에 안 되는 형의 세력을 한 큐에 말아먹었다. 당내에 누구도 이 요망한 물건을 돕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건 갑질밖에 없었던 발기는 계수와 마주치자 “네가 감히 형을 죽이려드느냐” 호통 쳤다. 창을 거둔 계수는 발기에게 다음과 같이 준엄히 꾸짖었다. “한 때의 분함으로 친정을 결딴내려 하니 이는 무슨 뜻이오? 무슨 낯으로 조상님들을 뵙겠소!” 할 말이 없어진 발기는 힘없이 늘어진 채 스스로의 목숨을 거뒀다.
과거 언행들이 논란이 돼 결국 K당에서 공천이 취소된 J씨가 금일(18일)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마치 자신의 공천을 앗아간 H씨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그러나 출마지의 K당 소속 시‧구의원 등 누구도 J씨를 따라나서서 탈당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선거는 조직력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데 말이다.
J씨가 마지막으로 믿어볼 구석은 “공천받자 전화 주셨다”고 그토록 자랑한 Y씨인데 그도 별다른 의미심장한 행보는 없다. 사실 Y씨가 가출해서 친정 표밭 갈라먹으려 하는 탕아(蕩兒)의 손을 들어줄지, 향후 수 년 동안 믿고 기대야 할 K당과 H씨의 손을 들어줄지는 안 봐도 그림이 나온다. 물론 Y씨 행보가 종종 워낙 ‘파격적’이다 보니 변수는 있지만 말이다.
정치한 지 얼마나 됐다고, J씨의 금일 탈당 기자회견에서의 “정치인생 건다” 등 발언들 보니 그가 얼마나 ‘자뻑’에 휩싸여 왕자놀이 즐기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당정치가 더 얼룩지기 전에 제 발로 나가는 게 좋긴 해서 탈당까지는 필자도 내심 바라긴 했는데, J씨가 무슨 정치거물이라서 그의 착각과는 달리 무소속 당선돼 복당(復黨)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무소속 출마해 누구 좋으라고 친정 표만 갉아먹는 건 그저 친정과 원수가 되자는 소리밖에 안 된다. J씨의 미래가 그려지는 듯하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우리 한민족 자랑스런 역사 얘기였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일부 남성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J를 대신해 제가 죽일 놈입니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불쾌함 푸시길.. 여성분들께도 사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