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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칼럼] 현미 비보(悲報)가 소환한 1960년대···"박정희 대통령은 성공했다"

뉴데일리

가수 현미가 타계했다. 명복을 빈다. 나는 그분과 아무 인연이 있을 턱 없다. 1968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그분이 JTBC 전신 TBC TV에 출연하는 모습을 간혹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분 타계 뉴스를 접하는 순간 확 하는 감개가 치솟음을 느꼈다. 놀랐다. 내가 왜 이렇지? 유튜브의 현미 노래 모음을 틀었다. 밤안개, 떠날 때는 말 없이, 보고 싶은 그 얼굴...

알았다. 그분 노래를 듣는 건 나의 1960년대를 반짝하고 되살려내는 잠재의식의 깨어남이었다. 나의 1960년대, 나와 우리들의 청춘, 우리들의 1960년대는 내 마음에서 지워진 게 아니었다. 고스란히 쌓여있다가 한순간에 ‘현재의 마음’으로 되돌아 왔다. 헬로, 나의 20대~30대 초!

감미로움보다는 상처였다. 그러나 훗날의 성장을 위한 경험이었다. 순례 길이었다. 싯다르타 같은 시행착오였다. 소설의 초입이었다. 다큐멘터리의 초장이었다. 배움이었다.

1960년대의 추억···산업화와 민주화의 충돌

1960년대는 어떤 세월이었나? 단어의 나열만으로 의식의 흐름을 추적해 본다.

4.19. 5.16. 중앙정보부, 군사재판.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고도성장. 경부고속도로. 현대자동차. 첫 직장 중앙일보(국제부), 3선 개헌,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 미국 반전(反戰)운동, 히피 세대, 흑인 민권운동, 마틴 루터 킹 목사, 케네디 대통령·로버트 케네디 암살. 김영삼·김대중.

김지하 오적(五賊). 김지미. 엄앵란. 신성일. 현미(밤안개). 정훈희(안개), 한명숙(노란 셔츠의 사나이). 조앤 바에즈(우리 승리하리라, We shall overcome). 엘비스 프레슬리(러브 미 텐더, Love me tender). 톰 존스(딜라일라).

이쯤. 그 시대는 군부 엘리트의 근대화와 일부 지식인들의 ‘자유 사고(思考)가 충돌한 시대, 후진국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가 부딪힌 시대였다.

오늘의 결과와 기준에서 볼 때 이 논쟁에서 승리한 쪽은 박정희·이병철·정주영·구자경·신격호·최종현이었다. 이념적 스펙트럼 차이 여하간에,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있으면 이걸 인정해야 한다.

유신이 절정에 달했던 1976~1979, 내겐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그러나 남 탓 아닌 내 탓이었다. 사물을 보는 기준이 그 시대 주도세력의 그것과 달랐기에. 자유 사고‘ 쪽이었다. 나쁘게 말해 ’두뇌 질‘이었다.

"내 생각과 달리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정직은 했었다. 이 자질을 심어준 신(神)과 부모님께, 그리고 내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객관적 상황은 내 생각과는 달리 가고 있다는 것, 박정희 대통령은 성공하고 있다는 것, 그의 성공은 한국·한국인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한국은 산업화하고 있었고, 내 집엔 보너스 덕택에 냉장고, TV, 피아노가 들여졌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나는 부천시청에 마련된 그분 빈소엘 갔다. 조문하고 묵념하고 명복을 빌었다.

“저야 혼났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큰일 하셨습니다. 이걸로 모든 앙금 털어버립니다. 편히 쉬소서.”

이걸로 나는 1960년대와 작별을 고했다. 안녕, 1960년대! 4.19에서 10.26까지. 20년의 격변. 전근대에서 근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다). 많이 겪고 많이 배웠다. 정치·경제를 넘는 정신적 배움의 기간이었다.

결론. 초장에 다 알았노라, 자만하지 말라. 싯다르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배우고 깨쳤다. 나도 그러길.

근데 희한하다. 왜 현미 영가(靈駕)가 이 재확인 순간을 선물하고 가셨지?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그러나 주무시기 전에 밤안개 한 곡 부탁합니다. 부군 이봉조 씨의 섹스폰 반주와 함께.

[편집자 주]류근일(柳根一) 전 조선일보주필(존칭 생략)은 자유당 집권 시절인 195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 교내 동인지에 기고한 글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되는 등 일찍부터 필화를 많이 겪었다. 1961년 5.16 군사정권 하에선 남북학생회담과 관련,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1968년 석방후 중앙일보에 입사, 논설위원으로 많은 글을 썼다. 그후 또 다시 민청학련 사건 등에 휘말려 시인 김지하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981년 조선일보로 옮겨 논설주간과 주필을 지냈다. 1938년생임에도 불구, 지금도 뉴데일리 논설고문으로 왕성하게 자유주의 수호를 위한 글을 쓰고 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4/05/20230405000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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