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시작에 앞서
필자는 이 글이 첫 칼럼이며 글솜씨가 조악해서 보는 사람이 불편할수 있으며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 글이라 공감이 어려운 점 참고하기 바란다.
1. 어린 시절 느꼈던 빈부 격차와 소외감
나는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흔히 말하는 미션 스쿨(mission school)로 일 년에 백만원에 가까운 수업료가 들어갔다. 당시 목욕탕 청소와 세신 일을 하셨던 아버지의 한 달 수입이 130만원 정도였던 걸 감안하면 굉장히 큰 돈이었다. 가방끈이 짧았던 부모님은 그들이 못 배워서 당했던 부당함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자랑 같지만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그렇게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학년 때는 잘 알자 못했지만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 되어 점차 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돈 많은 집안의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로 패거리가 나눠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 계층처럼. 물론 나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다.
부르주아 아이들의 부모들은 좋은 직업을 갖고 있었다. 대학 교수, 의사, 사업가, 고위 공무원 등 그야말로 최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프롤레탈리아 아이들의 부모는 일반 회사원이면 훌륭한 축에 속했고 일용직 근로자, 비정규직이 대부분이었다.
친구 A의 생일 파티에 갔을 때였다. 그는 붙임성이 좋아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도 생일파티에 초대했고 나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어린 초등학생에게 돈이 어디 있겠나, 나는 생일 선물로 급하게 학교 앞 매점에서 꽃씨를 샀다. 주머니에 있는 돈 500원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하게 선물로 할 수 있을 만한게 그것 뿐이었다.
그의 부모님이 대형 suv를 몰고 왔는데 그 때 자동차에 TV가 나오는 걸 처음 봤다. A는 익숙한 듯 TV 채널을 자유자재로 바꾸었고 나는 거기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A의 집에 도착하니 커다란 상 두 개에 피자와 치킨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초대받은 아이가 열 명이 조금 넘었는데 거의 두 명에 피자 한 판, 치킨 한 마리 꼴이었다. 스케일에 놀라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대망의 선물 수여식이 다가왔고 A의 친한 친구들은 만 원이 넘는 학용품, 장난감을 선물로 내놓았다. 불행하게도 선물 수여식에서 내 차례는 거의 끝이어서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수줍게 꽃씨를 내밀었다. 포장도 되지 않은 채 알록달록 꽃 그림과 그 위에 커다랗게 노란색 바탕체로 적힌 꽃 이름.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다행히 A의 부모님이 모든 선물을 기쁘게 받아주었다. 아직 어린 아이였던 A는 약간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그 상황이었어도 아마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 같다. 파티가 끝나고 아이들은 제각기 삼삼오오 모여서 놀았다. A와 친한 친구들은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나는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꽃씨를 건넸을 때 느꼈던 그 오묘하고 불쾌한 감정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자격지심과 소외감이었다.
2. 노력의 결실
A의 생일파티에 이어 A의 절친 중 한 명이 학기 도중 해외 유학을 떠났다.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던 나는 부모님에게 나도 해외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부모님은 그 때 내가 했던 말이 꽤나 충격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어린 아이가 스스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한게 참으로 대견하면서도 그것을 들어줄 수 없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고.
생일파티 사건은 자칫 잘못하면 나에게 잘못된 인생관을 심어줄 뻔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빠른 시일 내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사립학교답게 초등학교 6학년들은 중학교 진학 준비를 위해 매달 시험을 쳤다. 등수가 교실 뒤 게시판에 떡하니 걸렸다. 상위권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아이들이었고 1등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7~12위를 왔다갔다하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상위권 학생들을 따로 불러 덕담 및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때 담임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조금만 더 공부하면 1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 조금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네 살 터울이었던 형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도 똑같이 따라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학은 자신 있는 과목이었고 암기가 많은 영어와 예체능 쪽을 공략하기로 마음 먹었다. 시험이 있기 보름 전부터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고 애매하거나 모르는 것들은 문제로 만들어 스스로 문답하는 형식으로 공부했다. 마지막 삼 일에는 내가 만든 문답집을 다시 한번 풀어보고 애매한 건 기억날 때까지 머리에 쑤셔넣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형은 성적이 좋지 못했다.)
그 다음 시험에서 나는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다. 아이들 앞에서 1등으로 호명되고 박수를 받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왔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노력의 결실, 성취감이었다. 그 뒤로 나는 죽 5등 안을 왔다갔다 했는데 상위권 아이들의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어떤 공부를 시키냐고 그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그 때 우리 어머니는 능청스럽게 답했다고 한다.
"속셈 학원이랑 학습지 하나뿐인데요."
3. 운이 좋았다.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된건 절대로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무한한 지원이 있었고 공부로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 덕분이었다. 오히려 늦게 찾아온 사춘기 때문에 고등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서울권 대학 진입에 실패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지방거점국립대였고 그마저도 내가 원하는 물리교육과가 아닌 공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공대 진학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취업문이 점점 좁아져 가는 시기였고 나는 간신히 턱걸이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부모님은 자기가 살면서 가장 기쁜 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사회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니 비로소 사회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취업난과 부동산 폭등으로 인해 젊은 세대가 희망을 잃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그 원인이 바로 노력의 가치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단한 노력을 통해 무언가 성취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젊은 세대에게 과연 그런 게 존재할까?
정치 영역으로 들어와서, 2030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위에서 말한 노력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좌절의 긴 터널에 갇혀 있었던 아픔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내가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주는게 바로 진정으로 청년이 원하는 꿈이 아닐까 생각한다.
4. 글을 마치며
쓰고 보니 칼럼이 아니라 수필 같은 느낌이다. 경험에 기반하다보니 일부는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지적 및 의견은 가감없이, 추천은 넉넉하게 줬으면 한다.
진짜 수필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 추
마치 수필처럼 담담하게 인생사와 인생관을 잘 표현하신거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