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들 담은 담론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자 나선 조선 임금들
사회는 아직 범죄밭… 韓 미복잠행 나서길
<지지율이 내핵까지 추락하지 않으려면>
동아시아에서는 미복잠행(微服潛行)이 치자(治者)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꼽혔다. 미복잠행은 남루한 옷 입고 변장한 뒤 길거리로 나아가 밑바닥 삶을 목격하고 백성 목소리를 청취한다는 뜻이다.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들어앉아 탁상공론만 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면서 지각 넘고 맨틀 넘어 내핵까지 뚫고 들어가는 제 지지율 보면서 “이건 다 반대파 때문이야. 저것들만 때려잡으면 된다” 따위 소리나 여야 막론하고 읊게 된다. 때문에 현군(賢君)들은 24시간이 모자란 바쁜 정무에도 수시로 백성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미복잠행 선구자는 전설상의 군주인 요(堯)임금이다. 진(晉)나라 인물 황보밀(皇甫謐‧생몰연도 서기 214~282)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의하면 요임금은 즉위 50년째 되던 해에 백성의 옷 입고 수행원 한 명만 달랑 챙긴 채 민정시찰 나섰다.
첫 번째 고을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우리 백성 살리신 건 모두가 그대의 지극한 덕이니 신경 쓸 필요 없이 임금님 법도(法度)를 따르기만 하면 되네”라는 노래 불렀다.
두 번째 고을에 들어서자 한 촌로(村老)는 한 손으로 배 두드리고 다른 손으로 땅 두드리며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며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대체 내게 무슨 상관인가”라는 격양가(擊壤歌) 불렀다.
미래의 새싹들은 건강하게 쑥쑥 자라나고 백성은 흥에 겨워 배 두드리니, 요임금은 촌로의 ‘불손한’ 어투조차 아랑곳하지 않고서 비로소 “내 치세(治世)가 내 생애가 헛되진 않았구나” 안심했다. 그 시절 그 풍경은 작자미상의 조선시대 그림 명현제왕사적도(名賢帝王事蹟圖)에 담겨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탁주 걸치다 욕 한 사발 먹은 정조대왕>
우리 조선왕조 임금 상당수도 미복잠행을 중시했다.
최고 성군(聖君)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조대왕(正祖大王‧1752~1800)은 어느 날 저자로 나아갔다가 목이 컬컬해지자 도성 안 탄막(炭幕‧주막)에 걸터앉아 장삼이사(張三李四)들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런데 웬걸, 정조실록(正祖實錄) 등에 의하면 장정이고 주모고 입 모아 정조 욕을 했다. 술기운 오른 한 사내는 고관나리들 들으라는 듯 “도대체 조정 것들은 뭐하는 물건들인가. 여름 홍수 때문에 소출(所出)이 말도 아닌데 무슨 쌀을 작년보다 더 거두나, 도둑놈들” 목청 높였다.
다른 사내는 맞장구치며 한 층 대담한 욕 내뱉었다. “임금이 문제야 문제. 구중심처(九重深處) 틀어박혔는데 백성인들 풀 뜯어 먹는지 뭘 뜯어 먹는지 알 턱이 있나. 임자, 안 그래?”
정조로서는 제 욕을 하면서 자신에게까지 호응 요구하는 이 ‘상놈들’ 요절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허나 실록 어디에도 정조가 팔 걷어붙이고 고을사또 호출해 매타작했다는 내용은 없다. 정조는 “아직도 나는 성인(聖人)들 발끝에도 못 미치는구나” 자책하며 더더욱 선정(善政)연구를 거듭했다.
<진심 어린 민심 접하자 비로소 안도한 성종>
이렇게 밑바닥민심 훑고 지극적성 민생(民生)에 매진한 임금들은 백성으로부터 진심어린 칭찬 들으면 비로소 한시름 놓고 웃었다.
성종(成宗‧1457~1494)은 밤마다 편복(便服)으로 환복하고서 대신들조차 임금이 어디 갔는지 모르게 한양 도성을 보행했다. 따르는 수행원은 한 두 명의 무예별감(武藝別監)이 전부였다. 하루는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를 찾았을 때였다. 광통교(廣通橋)를 지나는데 다리 아래에 웬 사람이 처량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성종은 그를 불러 누구냐고 물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사내는 “저는 경상도 흥해(興海‧포항)에 사는 김희동(金喜東)이라는 숯장수인데 한양 구경을 한 번도 못했습죠. 한양 구경도 하고 임금님도 뵈려고 왔는데 임금님이 어디 계시는지 도통 알 길이 없고 날까지 저물어 하는 수 없이 다리 밑에서 자게 됐습죠” 답했다.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순박한 사내의 말에 성종은 시치미 뚝 떼고서 말했다. “나는 이첨지(李僉知)라는 사람이오. 임금께서 사시는 곳을 내 알기는 아오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 그러시오?”
그러자 화색(和色)이 돈 사내는 이렇게 답했다. “저희 고을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임금님을 칭찬 중이시오.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걱정 없이 잘 산다는 말씀도 전하고 수라(水剌) 반찬이나 하시라고 전복‧해삼도 올리려 온 것이오. 제발 임금님 좀 뵙게 해주시오”
투박한 말투였으나 진심을 느낀 성종은 따르던 군관(軍官) 집에 사내를 우선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이튿날 궁궐로 불러들여 “이첨지가 바로 이 나라 임금일세” 껄껄 웃었다. 성종은 놀라 자빠진 사내의 해삼‧전복을 고맙게 거둔 뒤 그 보답으로 후한 선물을 내리고 금의환향(錦衣還鄕)케 했다.
<사회는 아직 시름 중… 축배 터뜨리긴 일러>
비단 정조‧성종뿐만 아니라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부터가 미복잠행을 솔선수범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는 안보(安保)가 최우선 국책(國策)이었기에 이성계는 손수 허름한 옷 입고 남산에 올라 성곽 축조상황을 챙겼다.
한동훈 법무장관이 최근 대구를 방문했다. 현장은 그의 지지자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 이뤘다고 한다.
한 장관이 장관 취임 후 민생치안 등 위해 많은 노력 기울인 것 안다. 어그러진 ‘검수완박’을 ‘검수원복’으로 되돌리려 노력했고 또 상당부분 정상화된 것도 안다.
그러나 정작 필자가 현 정부 출범 후 둘러본 사회 저자거리는 앞서의 ‘잃어버린 5년’과 달라진 게 거의 없다. 서울 서초구 신논현역 일대, 경기도 모처에서는 최근까지도 무전취식(無錢取食) 건달들 난무하고 일반시민은 그들 눈치를 봤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모처에선 일주일 동안 무려 두 번이나 “내가 무슨 마약을 했네” 취지의 대화도 ‘대낮에’ 들었다.
아무 관복(官服)도 없는 필자가 보다 못해 (물론 일부 인사는 ‘청소’ 요청을 무시하긴 했지만) 현역 국회의원들에게 민원 넣어 겨우 청소했거나 또 청소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한 장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지난 잃어버린 5년의 사례에서 보듯 ‘업적포장’은 결국엔 밑천 드러내게 돼 있다. 한 장관께서 검사시절이든 장관시절이든 얼마나 사회 구석구석 미복잠행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찰 없이 한 번 가까운 곳부터 길거리 다녀보시길 권한다. 안전이 우려된다곤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들도 소수 수행원만 거느린 채 얼마든지 미복잠행 나섰다.
정치인의 자세는 결국엔 믿고 싶은 것만 믿음이 아닌 ‘현실’을 보고 들음이며, 정치인의 최대무기는 진심 어린 민심의 지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문재앙 앞잡이로 보수 궤멸의 주범인 자가
잠행을 해봤자 바뀌는 게 있을까요?
나라보다 자기 출세가 먼저인 사람입니다.
막말로 윤석열의 수하로 열심히 보수 인사들 사냥하다가 윤석열이 조국과 이인자 경쟁에 밀려나자 같이 팽 당한 거지 저들이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까?
문재앙 앞잡이로 보수 궤멸의 주범인 자가
잠행을 해봤자 바뀌는 게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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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로 윤석열의 수하로 열심히 보수 인사들 사냥하다가 윤석열이 조국과 이인자 경쟁에 밀려나자 같이 팽 당한 거지 저들이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까?
본 글은 한 장관께서 정계투신에 앞서 본업과 결자해지부터 먼저 충실하시라는 따끔한 일침 나름 점잖게 전하고자 써봤습니다. 감사합니다.